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사태에서 페미니스트인 ‘나’를 위치시키기

🐹젊은쥐

중동 전문가인 박현도 교수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점령을 두고 “몇십 년간 중동 이야기를 해왔지만 한국에서 이토록 중동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었던 건 처음인 것 같다”고 밝혔다(영상 보기). 중동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죽었을 때도 국내이슈에 밀려 주목받지 못했던 중동문제가 이번에는 한국인들에게 다른 정동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일테다. 카불 공항에서 날아오르는 비행기에 몸을 던지고, 제 몸이 오를 수 없다면 자신의 아이라도 비행기에 태우고자 하는 모습 앞에서 대중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보편성을 공유했다. 한편 중동 문제에 관해 한국 사회에서 이만큼의 충격을 가져다 준 사건이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주목을 받는 중동문제는 시류를 거슬러 가는 듯이 보이는 ‘반근대성’에 있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시대의 진보성과 충돌하는 듯 보였던 건 바로 ‘여성인권’이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을 점령하자마자 온갖 미디어들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앞으로 얼마나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될지 연일 보도하기 바빴다. 탈레반 집권 이후 살해당한 여성운동가들의 이름과 프로필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었고, 부르카를 쓴 채 거리를 걷는 여성들의 사진이 많은 기사들의 메인에 걸리기 시작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죽음과 모습들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서술된 적은 단연코 없었다.

그만큼 ‘여성인권’은 큰 힘을 가진다. 먼 타국에 있는 여성의 죽음과 인권의 쇠퇴 앞에서 특히 한국의 많은 페미니스트들 역시 아픔을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과 무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여러 단체들은 ‘국제사회’라는 모호한 공동체 속 민주국가로서 한국의 책임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개인은 무력감을 쉬이 느낄 수 있는 이 사태 앞에서 어떤 자세와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이 글은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정치-외교적으로 다루는 글이 아니다. 이 글은 페미니스트 행동으로서 서로 다른 지리와 역사적인 맥락에서 상이한 사회정치적 위치에 처해있는 여성들을 이해하는 인식론적 변화를, 그리고 전지구적 페미니스트 행동에서 국가나 민족 범주를 삭제하기에 앞서 탈식민, 민족주의, 국가라는 틀을 통해 여성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을 제안한다. 더불어 페미니스트 언어로 주조된 어떤 담론과 행동들이 어느 집단에게는 억압적인 보편성과 세속성을 담지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들의 죽음과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책임이 우리에게도 있음을 시사하고자 한다.

1. (포스트)식민주의와 근대성의 치열한 각축장으로서 여성의 몸

아프가니스탄을 수차례 방문한 다큐멘터리 피디 김영미는 그곳을 ‘중세’ 그 자체라 표현한 바 있다. 푸른색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 당나귀와 마차를 보고 자연스레 떠올린 것이다(김영미, 2011).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프가니스탄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내재된 근대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각인된 영토이다. 1839년에서 1919년까지 총 세 차례에 거쳐 영국과 전쟁을 거친 후 1919년 독립한 아프가니스탄은 60-70년대에 여성들의 사회보장 및 참여를 높이는 자유적인 개혁을 시행하고 여성 운동 또한 부흥했지만, 1978년 소련이 침공하자 다시 나라의 운명은 휘청거렸다. 외세의 개입과 이에 따른 아프간 정부의 붕괴를 우려한 여성조직들이 저항했지만, 반군에 의해 소련이 물러난 건 14년이 지난 후였다. 1994년,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고 2001년 우리가 잘 아는 9.11테러 발생 후 올해 초까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세워 지원하다 다시 탈레반 손에 아프가니스탄이 넘어간 상태이다(김영미, 2011). 냉전시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미국이 무기와 자금을 댄 대소항전 전사들이 지금의 탈레반임을 떠올리자면, 미국이 키운 괴물이 탈레반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중후반부터 21세기의 초입까지 서구 사회는 탈식민 시대의 도래를 외쳤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여전히 서구가 만들어 놓은 제멋대로 된 국가의 경계와 냉전의 후유증으로 시름을 앓고 있다.

한편 제국주의의 언명과 그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혹은 이슬람주의적) 투쟁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몸을 경유해 발현된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선포함에 있어 빈라덴 체포와 함께 대두되었던 미국의 명분이 바로 아프간 여성들의 ‘해방’이었다. 자신들이야말로 아프간 여성들을 오랜 억압과 전통의 비근대성으로부터 구출해낼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앞세워 여러 여성 정책을 실행했다(기사보기). 여성이 교육을 받는 비율은 높아지고 의회에서 25% 이상은 무조건 여성으로 구성해야 하며, 주요 공직 또한 여성 할당제가 이루어졌다. 부르카를 벗은 여성의 사진은 대표적인 ‘여성해방’의 상징이었다. 눈에 띄는 당장의 변화들은 당연히 존재했다. 그러나 전쟁에 놓인 상황 자체가 여성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 아주 소수의 대도시 여성을 제외하고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감시와 야간 습격, 예측하지 못한 공중 폭격으로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는 등 전쟁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군사작전은 민간인 대량 학살로 종종 이어졌다. 미국의 점령 이후 가시적으로 등장한 엘리트 여성들의 사회 진출, 올림픽에 참가한 여성 모두 여권 신장의 중요한 상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국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한 생색내기에 불과한 측면이 컸다.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 역시 부르카를 굳이 벗고자 하지 않았다.

올 봄, 미국에서 가장 긴 전쟁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자마자 탈레반은 빠르게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미군의 만행에 질려 오히려 탈레반을 환영하는 쪽도 있었지만, 여성들의 상황은 또다시 극단적인 세력 아래 좌지우지되었다. 재집권에 성공한 탈레반은 샤리아(이슬람법)의 틀 내에서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고 그들을 재생산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으려는 가부장적 움직임은 서서히 포착되었다. 식민지배와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의 반복적인 교체 속에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문화적 경계의 지표가 되었다.

2. 포스트워 시대, 참여와 개입의 정치학: 살게 혹은 죽게 내버려둘 것인가

무기가 떠난 아프가니스탄의 땅은 경제전쟁(economic War)으로 이동했다. 탈레반이 여성에 대해 한마디를 덧붙일수록 여론은 악화되었다. 서구 선진국들은 이러한 ‘비민주적이고’ ‘여성혐오적인’ 탈레반이 운영하는 국가를 지원할 수 없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그저 아프가니스탄을 잊어버리자”는 전세계적인 인식이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바이러스는 또 다른 국면이 전세계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빠져나오면서 동시에 탈레반의 달러 사용을 금지시켰고, 외국기업이 아프간에서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러한 제재는 아프가니스탄이 IMF(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코로나로 악화된 민생 구출을 위한 긴급재정보조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기사보기). 사람을 죽이는 건 살상무기뿐 만이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군사목적으로 죽인 민간인의 수가 15만 명이라면,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죽음에 이른 민간인들의 수는 그를 훨씬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다시 한번 더 상기한다면, 건강과 교육에 대한 공적 자금의 축소는 남성보다 여성이 더 타격을 크게 입는다(Saadawi, 2010).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한편, 살리고자 하는 개입은 최소한이지만 아주 소란스럽게 이루어진다. 작년 탈레반이 실시간으로 카불을 장악해나가던 때, 한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의 한국 대사관과 한국국제협력단, 한국 병원 등에서 일한 아프가니스탄인 388명을 구출해냈다. 모두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이들은 의료 엘리트거나 학력이 높은 자들로 모두 국내 치안에는 ‘위협’이 되지 않을 자들이었다. 미라클 작전이라 불린 이 구출 작전은 난민 찬반에 상관없이 내셔널리즘의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의 극적인 구출은 국가의 자부심이자 한국의 국가적 인도주의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와 반대로 아프가니스탄의 비참함을 보도하는 뉴스에 아프가니스탄과 반대로 한국이 얼마나 진보한 민주 사회인지 찬양하는 댓글이 진을 이룬다. 이러한 시각 속에 한국이 난민 수용에 얼마나 야박한지는 잘 논의되지 않는다.

이 살리고자 하는 개입의 정치학은 페미니스트 담론 속에서도 치열하다. 한국을 피난처로 찾은 아프가니스탄의 ‘특별기여자’와 더불어 대다수의 난민은 무슬림이라는 종교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우리는 페미니스트적 입장이 난민수용 반대와 결부될 수 있음을 목격했다. 범죄에 관한 공식 통계는 자국남성이 외국인 남성 혹은 난민 남성보다 더 위험을 담지한 존재임을 드러낸다(기사보기). 그러나 우리는 페미니스트이면서도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난민을 거부하고 죽일 권력이 있기에 쉽게 그들의 유입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 

한편 남성보다 상대적 약자인 ‘무슬림 여성’들만을 데리고 오라는 목소리 역시 페미니스트적인 맥락 속에서 들려왔다. ‘무슬림 여성에게 구원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한 인류학자는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한다(Abu-Lughod, 2015). 그의 질문은 우리가 정말 무슬림 여성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됨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 질문은 지금까지 이어져온 백인영웅서사, 즉 갈색여성(brown women)을 갈색남성(brown men)에게서 구원해낸다는 레토릭을 비판한 것이다. 이 레토릭에 따르면 구원되어야 할 무슬림 여성에게는 피해자이자 희생자라는 정체성 및 서사밖에 제공하지 않으며, 무슬림 남성은 가해자로 배격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그리고 나의 페미니즘은 완벽하지 않다. 다른 조건에 놓인 여성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고 그 여성이 사는 삶의 범위를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다른 공간과 맥락 속에 위치한 전지구적 여성들 간의 이해와 연대를 조명하고자 했던 시린 M. 라이는 “여성운동의 경제적 정치적 제도들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되, 여성운동의 당사자들이 자기성찰적이며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는 비판적 개입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Rai, 2014).

내셔널리즘적인 페미니즘이 결국 남성 민족 지식인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진 역사라는 비평은 존재해왔지만, 상당부분 페미니즘 의제는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곳의 물질과 환경에 연결되는 국가정책 위주로 흘러갔다. 국가안보와 페미니즘이 엮일 수 있는 이유 역시 페미니즘의 국가중심적인 측면때문이다. 무슬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이곳에서 종교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무슬림 남성 및 여성을 바라보는 한정된 시선 역시 우리가 가진 인식론적 한계일 것이다. 라이는 이러한 각 여성들이 처한 조건의 한계 속에서 가부장적 구조를 인식하기 위해 반드시 여성들이 유사성을 띄지 않아도 행동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유사한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페미니스트 개인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것은 나와 타국의 여성들을 연결하는 훌륭한 참여 방법론이 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사태에 원인이 될 가부장적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 간 불평등에 나의 책임을 묻는 것이다. 더불어 아프가니스탄 여성운동의 투쟁에 우리를 투영하는 것 역시 하나의 개입이다. 미국의 인도주의적 가면을 쓴 재앙에 책임을 묻는 반면, 탈레반을 적합한 정치적 행위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프가니스탄의 여성주의자들은 전지구의 여성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의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청함과 동시에 현장 속에 행동하는 민간인들의 투쟁을 향한 응원의 시선을 요청했다(기사보기). 아프간 사태 앞에서 페미니스트인 나의 위치는 이러한 사유의 전환과 응답을 통해 재설정될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영미(2019). 『세계는 왜 싸우는가』. 서울: 김영사.
  • Abu-Lughod, Lila(2015). “Do Muslim Women Need Saving?,”Ethnicities, vol.15 no.5. 
  • El Saadawi, Nawal(2010). The Essential Nawal El Saadawi: A Reader, Zed books, 강은교 옮김(2021),  『여성과 빈곤층: 지구적 정의가 마주한 도전』, 전기가오리.
  • M. Rai, Shirin(2001). Gender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Development: From Nationalism to Globalization, Cambridge: Polity Press, 이진옥 옮김(2014), 『젠더와 발전의 정치경제: 페미니즘 관점에서 본 민족주의와 지구화』,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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