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wd Vol.6 페미니즘 정치, ‘불행’의 좌표 다시 찍기: 기획의 변

🌊강물

제20대 대선 전후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군 키워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페미니즘’을 꼽아볼 수 있겠습니다. 선거 이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발언은 연일 쏟아졌으며, 대통령 후보자를 검증하는 TV 토론회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박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 국내 특정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가 페미니즘이었다는 사실은 페미니즘에 대한 세간의 많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대선 후보군이 본격적으로 부상될 때, 정치권에서 정치적 세력화를 도모하는 방식은 바로 반(反)페미니즘 언사를 채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8월 대권의 유력후보로 거론된 윤석열 후보는 ‘건강하지 못한 페미니즘이 이성 간 교제를 가로막아 저출생을 초래한다’는 취지로 발언하며 논란을 빚었습니다(기사 보기). 그는 구조적 성차별이 없으니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반면 이재명 후보는 마지막 대선 토론회에서 ‘성차별과 불평등을 시정하는 운동이 페미니즘’이라며 윤후보에게 일침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불과 반 년 전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모 커뮤니티의 글을 공유해 표심을 모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기사 보기).

‘젠더갈등’을 부추켜 페미니즘을 격하하고 소위 ‘이대남’을 공략하려는 움직임은 앞선 4·7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선거에서 20대 전후 남성 유권자의 약 70%가 국민의힘을 지지했다는 점이 밝혀졌는데, 여야 안팎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참패 원인을 두고, ‘페미니즘에 치중된 정책’ 때문이라는 주장과 ‘페미니즘을 이용한 정치적 포퓰리즘을 그만두라’는 설전이 맞붙기도 했습니다(기사 보기). 이렇듯 페미니즘은 20대 남성들의 표심을 얻기 위한 전략 위에서 혐오 정치의 공세를 받았습니다. ‘성별을 갈라친다’는 오명과 함께, 페미니즘은 이제 남성들을 ‘역차별’하는 ‘불공정함’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는 신보수주의가 만연하던 1980년대 미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저지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에 관해 한 차례 다룬 바 있습니다(참고). 앞글에서 언급했듯, 권리를 신장시키려는 여성들의 노력을 다수의 불행으로 치환하며 여성들로 하여금 거리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주어진 성역할을 요구하는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가리켜 백래시(backlash)라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80년대 미국의 상황과 비슷한 백래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이며, 청년 남성들 개인의 노력을 무화시키고 가정의 평화를 깨뜨린다는 주장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또는 페미니스트)은 ‘이기적인’ 여성들의 세력화된 행위로 사회의 후퇴를 부추기는 정치 사상 또는 집합체가 아닙니다. 그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이항대립적 기준에 질문을 던지는 실천적 학문이자 공동체입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즘 테제는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던 일이 기실 불평등한 정치 구조적 문제이며, 단순히 여성 대 남성의 대립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반페미니즘적 언행을 취하는 이들은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불공정한 사회의 원인을 페미니즘 탓으로 귀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여성친화적인 정책으로 오히려 대다수 남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동등한 기회를 보장해 성별과 무관하게 정당한 경쟁과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을 고민해봐야 합니다. 하나는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사회에서 개인이 경쟁하며 겪게 될 불이익의 책임에 관한 문제이며, 다른 측면은 페미니즘이 가져온다는 ‘다수의 불편함’에 대한 의미입니다. 

먼저 모두가 동일한 조건일 때, 경쟁에서 불가피한 피해가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을 질지 생각해봅시다. ‘구조적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라는 말에는 개인(또는 가족)이 그들 행위로 인해 발생된 모든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국가가 제공하는 자유로운 환경에는 구조적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벌어진 문제는 개인의 역량이 부족해 초래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배상할 책임이 있기에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개인의 욕망과 행동 등 개별적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는 사회 구조를 인정하는 일도 요원해집니다(Young, 1990). 이에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Iris M. Young)은 공동체적인 정치적 책임을 제시합니다. 한 사회 문제에는 개인적 책임과 구조적 원인이 양립하므로, 모든 사회구성원이 정치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Young, 1990).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선언의 화살이 지금은 페미니즘을 향하지만, 결국엔 개인과 가족 단위에 향할 것이라고 설명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형국에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의 의미를 앞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다른 한편 ‘성평등 정책이 성별을 갈라친다’는 등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은 불필요한 ‘젠더갈등’과 사회 분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불편함’, ‘불행’이라는 정동과도 연결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노동시장에서 여성이 마주하는 성차별 외에도 일상에서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소수자들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짚어왔습니다. 또한, 기후위기 정책 등 비인간종까지 고려한 전지구적인 정의 구현을 거리에서 외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외침은 곧 ‘불편한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여성할당제, 여성가족부 또한 편중된 권력 구조를 해소하려는 역사적 산물이지만, ‘성평등 정책이 남녀를 갈라친다’는 왜곡된 논리 속에 존폐 여부 결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지목되거나 때때로 불행을 자처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실천에 대해, 사라 아메드(Sara Ahmed)는 불행을 다시 사유하며 그 의미를 찾습니다. 아메드에 따르면, 흔히 행복은 반드시 추구해야 할 가치[좋은 것, 올바른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사회에서 정한 ‘행복’에 상대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는 특권은 중상층·백인·비장애인·이성애자인 남성 등 ‘다수’로 표명되는 기득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기준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행복으로의 길에서 이탈된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여성들은 ‘공동선’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지 못하고, 가족과 국가의 평화와 행복에 일조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 이면에 타자화된 주변부의 존재와 삶을 드러내고 그 구조를 집단적으로 문제시 하는 게 ‘불행’과 함께 하는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깨뜨리는’ 페미니스트들의 역사에서 이러한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을 시사합니다(Ahmed, 2010). 이번 6호 기획은 이 점에서 기인해 근래에 목도한 대선 관련 언설들이 반페미니즘적 수사를 차용한 방식과 앞으로 페미니즘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들로 글을 구성하였습니다. 

기획의 전반부는 지난 대선 정국의 소회를 나누며 페미니즘에 어떻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수반되었는지, ‘공정한 기회’라는 논리 안에서 성차별적인 구조를 시정하는 대신 어떠한 방식으로 개인의 노력과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첫 번째 글 <짤방의 정치학>(리예)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여섯 글자를 올린 행보에서 출발해, 안티페미니즘적 프로파간다가 오늘날의 인터넷 밈(Internet meme) 문화를 경유해 사안의 구체적인 맥락과 그 안에서의 역동을 지우고 있음을 비판합니다. 필자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유머화된 패러디가 반지성주의 아래 안티페미니즘적 수사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이러한 문화가 20대 남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는 전략으로 활용되면서 불러일으킨 정치적 효과를 분석합니다. 두 번째 글 <구조적 성차별 없는 ‘공정’의 시대?>(시드)와 세 번째 글 <‘떠오르는 이대녀’? : 페미니스트 짜깁기>(라니)는 대선을 기점으로 더욱 부각된 ‘공정’ 담론과 젠더 의제를 다룹니다. 전자는 능력 있는 개인이 그에 준하는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능력주의 담론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공정 담론과 결합돼 페미니즘 백래시를 강화하는 현상에 집중합니다. 더불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스트들의 의제화와 저항방식 역시 능력주의의 문법을 따르고 있으므로, ‘능력 있는 개인’의 전제 자체를 질문하는 방향성을 제안합니다. 후자는 대선 정국에서 페미니스트 주권자가 ‘2030여성’ 또는 ‘이대녀’로 재현된 방식에 주목하며, 페미니스트의 이미지가 어떻게 선거 과정에서 편집되거나 축소었는지를 짚어냅니다. 이를 통해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은 대선에서 갑자기 등장한 집단이 아니라, 이미 성차별과 구조적 폭력에 다양한 방식으로 권리를 행사해온 역사가 있음을 설파합니다.

한편 기획의 후반부에서는 대선 전후 상황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못하는 존재와 현안들을 살피며 페미니즘 정치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논하였습니다. <이동권 시위와 출퇴근의 정치>(윤소이)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시작됐던 장애인 이동권 시위가 심상정 후보의 공언 전후 변모된 양상을 추적합니다. 출근길이라는 일상의 거리를 쟁취하는 투쟁이 다수 시민의 불편함이라는 감정과 만나며 벌어지는 역학을 사라 아메드의 공리주의 비판을 통해 톺아봅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만큼이나 대선 정국에서 밀도 있게 다뤄지지 못한 기후위기 정책에 대해선 <김은지(27세 취준생), 반지하, 장마: 기후정의는 젠더정의를 요구한다>(사라)에서 논의하였습니다. 필자는 반지하에 사는 27세 여성 김은지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기후정의가 젠더정의와 맞물리는 지점들을 제기합니다. 특히 아이리스 영이 제안한 사회적 연결 모델에 천착해 기후위기를 시정할 책임을 모두에게 요청합니다.<분위기 제대로 깨는 페미니즘 비평>(최가은)은 이러한 페미니즘 정치의 역할에 비판적으로 개입합니다. ‘올바른’ 시민을 양성하는 취지의 문화적 생산물과 안티페미니즘에 대항하는 언어가 쏟아지는 담론장에서 ‘분위기 깨는 페미니즘 비평’이 마주하는 곤경은 무엇인지를 직면하며 페미니즘 비평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이번 호를 준비하며 필진들은 페미니즘의 정의도 복잡하고 다양한데, 페미니즘 정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지 무척이나 곤혹스러웠습니다. 우리 페미니스트들은 내 생활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예민하고 불편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일례로 헐렁한 티셔츠에 한 손에는 에코백을 메고 다른 한 손에는 텀블러를 들며 비건 식당 앞을 지나는 사람은, 열 중에 아홉이 에코페미니스트 아니냐며) 자조 섞인 농담도 주고받곤 했습니다. 더구나 대선이라는 큰 이슈를 지나오며, 그 결과로 초래될 페미니즘 백래시에 숨이 턱 막혀올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등한 사회를 열망하는 존재들의 목소리와 힘 역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애당초 반페미니즘적 언사를 일삼던 국민의힘이 정권심판론 등의 이유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대선의 승기를 쥘 것이라 점쳐졌으나, 양당 후보 간 투표 차는 고작 0.7% 포인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는 역대 대통령선거 투표 중 최소 득표차로, 선거 막판 더불어민주당에 모인 표심이 한 몫을 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전해졌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선거 직후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에 몰린 지지와 성원입니다. 더불어민주당 측은 나흘만에 약 10만 명이 입당 신청을 해왔다고 밝혔으며, 정의당 관계자는 입당 문의가 쇄도했을 뿐만 아니라 개표 과정 중 모인 후원금 규모는 약 12억 원이라고 덧붙였습니다(기사 보기). 그 배경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나, 혐오 정치를 불식시키고 평등한 사회를 이륙하기 위한 의지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은 누구든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밀려오는 새 바람에 필진들도 페미니즘 정치를 다시 이야기 하며 힘을 싣고자 합니다. 다만 페미니즘에 덧붙여진 부정적인 수사를 백 마디 말로 대체하기보다, 한 마디로 정리해보려 합니다. 

“페미니즘 정치는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행복’으로의 길을 택하기보다 그 밖에서 길 자체를 질문할 것이다.”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불행’을 이야기하는 길은 비록 험난하고 예측불가능하며, (아메드의 또다른 표현으로) ‘어딘가에 정박되지 않은 채 항해하는 배’처럼 예기치 못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안정성으로 야기된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살아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앞으로 보일 일련의 글들이 페미니즘에 찍힌 ‘불행’이라는 좌표를 다시 그리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길 바라봅니다.


참고 문헌

  • Young, Iris M.(1990).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김도균·조국 옮김(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서울: 모티브북.
  • Sara Ahmed. (2010). The Promise of Happiness, Duke University Press. 성정혜·이경란 옮김(2021).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서울: 후마니타스.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