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 제대로 깨는 페미니즘 비평: 〈꼬꼬무〉의 페미니스트 없는 ‘우리-시민’

📬최가은

“행복은 ‘집 안에’ 있다”처럼 글자 그대로 해석돼 온 행복의 약속을 교란시키기 위해서는 의미가 통하게 하는 기술들을 교란시켜야 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페미니스트 의식은 공손한 말들과 사랑의 언어들 아래 감춰져 있는 폭력과 권력에 대한 의식이다. 단지 가능성을 제한하는 장소로서의 젠더에 대한 의식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 내 바람은 인권으로서의 행복, 정치학에 적합한 언어로서의 행복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을 재활성화하는 데 있다.” (사라 아메드, 2021, 147쪽, 159-160쪽)

‘올바른 시민’ 만들기 프로젝트

문화·예술계는 한국 사회의 변화한 젠더 의식을 가장 강렬히 체감할 수 있는 공간 중 하나다. 특히 지난 5년 간 생산된 대중문화 대다수는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와 성숙된 시민성을 가시화하고, 이를 입증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주력해왔다. 맞춤형 가치관의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시사·교양 프로그램[1]은 시청자가 대중 매체를 통해 “자신의 생각·느낌·의견을 본인이 ‘따르는’ 사람에게 ‘맡기는’” 사유 및 교양의 ‘외주화’ 경향을 적극 활용한다(김내훈, 2021). 이와 더불어 ‘PC화 한’[2] K-드라마/영화의 반(反)가부장제, 반(反)인종주의적 요소는 문화 콘텐츠가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에 발맞춰 시청자 ‘교양’의 방향성을 조정하는 데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 관련 프로그램으로 전문가로부터 ‘쉽게 소화된’ 지식·정보를 제공 받는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알아두면 쓸데 있는 범죄 잡학사전>, <차이나는 클라스>, <어쩌다 어른>, 영화와 인문학 토크를 겸비한 <방구석1열>, 상처 치유, 자아 긍정을 통해 ‘정상적’ 시민으로의 성장을 독려하는 성인 대상 심리 상담 프로그램 <금쪽 상담소> 등이 있다.
[2] 대중문화와 연계되는 ‘PC(정치적 올바름)함’은 전문가 담론과 대중 담론 양쪽에서 소수자 재현, 다양성 추구, 정전 재구성, 혐오적 발언 배제 등으로 이해된다. ‘PC가 묻었다’는 표식이 콘텐츠를 둘러싼 논쟁의 기준이자, 문화 영역을 “젠더전이 펼쳐지고 있는 전쟁터”로 만드는 주 원인이 된 지는 오래다(손희정, 2017). 한송희와 이효민(2020)에 따르면,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한 대중 담론은 ⓐ 안티 페미니즘과 연결된 반(反)PC주의 ⓑ 원작 훼손에 대한 분노 ⓒ 역차별 담론과 왜곡된 정체성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다인종 캐스팅과 같은 ‘PC한 제스처’가 원작을 훼손하거나 심지어 역사를 왜곡한다는 주장으로는 이창균(기사 보기), ‘PC 비판’ 전반에 대한 반론으로는 위근우(기사 보기)가 있다.) 한편 논문에서 언급되는 ‘디즈니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정치적 올바름과 대중문화의 만남은 콘텐츠 생산 국가와 기업에 ‘진보적’ 이미지를 부여하며 대중성 및 자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를 남긴다. 이와 관련해 이 글이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대중문화 향유에 거의 실시간으로 개입하는 페미니즘 비평이 주로 ‘PC 논쟁’의 대리전을 치르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누락되는 것은 ‘PC’와 대중성/자본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여러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 무엇보다 이들 조건이 대중 페미니즘 담론과 우호적으로 연계되는 과정에 관한 비판적 분석이다.

한편 시청자에게 ‘올바른’ 시민과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재현하고 또 설명하는 이들 콘텐츠는, 우리 사회에 시민성을 형성할 여타의 적절한 공적/사적 공간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도 한다. 이른바 ‘혐오사회’로 규정되는 근래 한국 사회의 풍경, 20대 대선을 둘러싸고 펼쳐졌던 온갖 갈등의 서사가 그와 같은 시민성 공간 부재 문제와 연결될 때, 대중문화의 가시적 변화는 공동체 ‘계몽’ 프로젝트로서 그 유효성을 보다 쉽게 획득한다.

그런데 이들 대중문화의 젠더 의식은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그 시발점으로 삼는 페미니즘의 재부상보다는 외려 ‘촛불혁명’이라는 더욱 ‘보편적’인 기억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해당 프로그램들의 서사는 군사정권의 그림자를 퇴치하고 촛불을 통해 정치적으로 거듭난 한국 사회의 새로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1980년대의 유산인 민주화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면서, ‘자유’와 ‘평등’, ‘민주’의 개념으로 합의된 좋은 사회를 향해 나아갈 것을 약속한 이들로 기대된다.

한편 다수의 남초/극우 커뮤니티는 이러한 경향 전반을 ‘PC 묻은’ 콘텐츠로 분류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에게 여전히 ‘PC’란 곧 ‘좌편향’적 관점이자 ‘페미니즘’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중문화와 관련한 ‘PC 논란’이 곧 ‘페미 논란’으로 연결되곤 하는 “‘정치적 올바름’ 논쟁의 한국적 특수성을 보여”준다(한송희, 이효민, 2020). 항간에선 일부 보수 페미니즘과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지속적인 공모가 우려되고 있는 와중에(김보명, 2021), 페미니즘에 대한 유별난 반동과 함께 가속화되었던 청년 남성의 정치적 보수화는 여전히 페미니즘과 좌편향을 ‘PC’ 영역으로 한데 묶으며 결집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페미니스트-시민은 “무엇이 PC인가”라는 중대한 문제제기에 앞서, 페미니즘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되는 ‘PC’를 적극 수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면서도 놓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민 양성 프로젝트에 페미니스트 모델은 충분히, 그리고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3]>(이하 꼬꼬무)는 앞서 살핀 대중문화의 경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 콘텐츠이다. 또한 <꼬꼬무>는 ‘촛불’을 배경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권의 기만적인 ‘86세대적’ 도덕의식에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권력 영합적인 진보 담론에 국한시킬 수 없는 지향점을 지닌다. 그러나 먼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꼬꼬무>가 페미니즘의 정치적 개입이 아예 불가능한 영역으로 ‘시민’의 얼굴을 상정하고, 이를 다시 ‘진보적 시민’의 얼굴로 적극 재생산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페미니스트라는 분위기 깨는 자(killjoy)를 단순히 배제할 때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를 동료 ‘시민’으로 언급해야 할 때 프로그램이 드러내는 당혹감에서 투명해진다. 이 글은 <꼬꼬무>가 페미니스트-시민 개념을 대하는 태도를 대중문화 속 ‘시민’과 ‘페미니스트’의 표준화된 관계로 확장해 이해한다. 이때 문제적인 것은, 이들 관계가 겉보기에 대립적이거나 단순 배타적이지 않을 때, 페미니즘 비평이 프로그램에 보이는 무관심이다. <꼬꼬무>에 대한 비판의 부재는 그간 대중문화 산업의 남성권력과 시대착오적 재현 방식에 초점을 맞춰왔던 페미니즘 비평의 한계를 노출한다. 다음 절에서는 <꼬꼬무>의 ‘시민’을 통해 관련 문제를 들여다봄으로써, ‘페미니즘적 비판’의 위치와 재활성화의 조건을 고민한다.

[3]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2020년 6월 <에스비에스 스페셜>에서 맛보기(파일럿) 형식으로 첫 방송 되었고, 총 3회의 파일럿 방송을 거쳐 9월에 정규편성 되었다. 최고 시청률 4.7%를 찍은 시즌 1은 2020년 9월부터 2020년 11월까지(2020. 09. 17 ~ 2020. 11. 26) 총 10부작으로 방영된다. 시즌1의 성공에 힘입어 재개된 시즌 2는 최고 시청률 6.7%를 경신하며 2021년 3월부터 대략 4개월 간(2021. 03. 11~ 2021. 07. 29) 총 21부작으로 확대 방영되었다. 시즌 3은 2021년 10월 재개되어, 2022년 6월 현재에도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꼬꼬무>의 동료 시민과 페미니스트

<꼬꼬무>의 기획의도는 ‘그날’로 대표되는 역사적 사건을 “한 사람의 소시민”인 ‘나’가 주관적으로 재해석하여 ‘오늘’의 ‘너’에게 전달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4]. 현대사의 굵직한 범죄 사건을 재해석하는 ‘범죄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의 한 갈래로서 초반 인지도를 쌓았던 <꼬꼬무>는 프로그램을 향한 시청자의 열광적 지지를 기반 삼아 시즌 2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근현대사 저널의 역할을 자처한다.

[4] “눈길을 사로잡는 그 날, 그 사건으로부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내’가 느낀 바를, 온전히 ‘나’의 시점에서 주관적으로 전달한다. 세 명의 ‘이야기꾼’이 스스로 공부하며 느낀 바를 각자의 ‘이야기 친구'(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1:1 로 전달한다.” (페이지 보기)

12.12 군사반란의 전말을 살피며 전두환과 ‘하나회’의 만행을 고발한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꼬꼬무>는 70-80년대 군사정권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을 수행한다. 이와 동시에, 반공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동성을 조명함으로써 우파 담론과 함께 재부상하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를 전면에서 반박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대사 다시 읽기는 최근 우리 사회를 장악한 혐오 정동을 재배치하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인천 인현동 화재’나 ‘대구 지하철 참사’를 재조명하는 방식은 <꼬꼬무>가 개인의 서사를 사회적 시간으로 지속시키는 일에 상당한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라는 사건의 공식 명칭이 ‘술집에 간 불건전한 미성년자’라는 피해자 비난의 여론을 촉발했다는 사실이 비판되는가 하면, 대구 지하철 참사 추모 공간의 이름이 ‘추모’를 삭제할 때(‘시민 안전 테마파크’), ‘추모’가 사회의 ‘혐오’로 각인될 수 있음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건화, 역사화의 과정이 우리 사회의 관점 형성에 관계한다는 사실을 가시화하고, 그것에 내재한 폭력성을 성찰하는 태도는 함께 돌보고 가꾸어 나가야 할 ‘공동체’를 향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이다. 

프로그램의 이 같은 방향은 ‘반페미’라는 공통성을 지닌 다수의 커뮤니티에서 ‘꼬꼬무의 PC화’ 과정으로 이해된다. ‘PC화’와 ‘페미니즘화’의 밀접한 관련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꼬꼬무>는 매우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여성 인권’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배치해 나간다. ‘카사노바’라는 자극적 소재를 경유하여 “현대사 속 정조 논쟁”을 다루거나(2020. 06. 21 방영분), 노동 운동의 저항적 주체로서 ‘여공’의 성취를 상기한다(2021. 04. 22 방영분). 특히 ‘YH 무역 여성노동자 농성’을 다룬 에피소드는 “역사가 어떻게 여성 노동의 역사를 축소했는지 말하고, 그들이 당한 혐오폭력에 노동자와 여성이라는 이중 약자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정확히 명시(기사 보기)”한다는 점에서 프로그램의 역사의식에 젠더 의식이 결부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이 실상 ‘젠더 갈등’을 분리한, (사실상 안티 페미니즘의 담론과도 무리 없이 연결되는) ‘젠더 이퀄리즘’의 명제 아래 제시되고 그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은 ‘꼬꼬무 페미’ 연관 검색어의 발단이 되었던 ‘나혜석 편’이 방영될 때 흥미롭게 드러난다.

모성애의 탈신화화를 수행한 나혜석의 글, <모된 감상기>를 소개하며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먹는 악마다.”와 같은 구절을 꽤나 당혹스럽다는 제스처와 함께 전달하는 MC들의 반응은 실제 출산과 육아의 경험이 있는 여성 출연자들의 공감으로 상쇄된다. 약속된 리-액션의 자리 그 자체인 패널들은 단순한 반응으로서가 아니라, 충격과 공포, 분노와 참회의 눈물을 상연함으로써 프로그램의 서사를 완성하는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이다. 이를 고려할 때, 이들 출연진이 나혜석의 무엇에 공감하고, 무엇을 거부하는지 상연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시민’의 얼굴을 형성하는 과정, 즉 합의된 ‘시민’과 ‘공동체’의 경계를 설정하는 과정과도 같다. 대화 과정에서 나혜석의 외도 사실과 개인적 결함은 그가 여성의 인권을 부르짖었던 다양한 언어들, 특히 <이혼 고백서>의 신뢰와 자격이 훼손되는 근거로 ‘합의’된다[5]. 이는 보다 더 성숙하고 온화한 동료 시민의 개념에 여성과 페미니스트는 매우 무결한 방식으로만 개입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페미니스트 모델과 관련한 이처럼 조심스러운 접근은 그것의 실질적 내용과 관계된 것이라기보다 분란의 조장 가능성[6], 다시 말해 시민이 합의한 ‘행복’과 ‘조화’의 지표를 훼손할 가능성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5]  해당 부분에서 패널과 MC들은 “우리가 바람 핀 이 여자를 왜 다루는 거야?”, “외도 사실이 없었다면, 혹은 외도 전에 이혼고백서를 제출했다면 좋았을 것이다.”와 같은 대화를 통해 나혜석 ‘승인’의 조건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나간다.
[6]  ‘카사노바 박인수’ 편이 방영되기 직전 게시된 한 보도 자료는 방송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현대사의 정조 논쟁’이라는 주제를 두고 당시 MC였던 장항준과 장성규가 제작진에게 해당 에피소드에 대한 거절 의사를 밝혔으며 평소와 달리 무거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과거의 철지난 정조 논쟁마저 직접적으로 거론하기에는 매우 ‘예민한’ 문제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이 ‘합의된’ 전제를 시청자에게 알려줌으로써, 논쟁 가능성에 대한 프로그램의 입장을 전달하고, 나아가 토론 자체를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낳는다(기사 보기).

<꼬꼬무>에 대한 비평적 개입들

허윤은 온라인 공론장에서 발생하는 젠더 관점의 양극화가 “비평 없이 감정화된 공론장의 한계”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허윤, 2021). 비평이 부재할 때, 미디어에서 파생되는 온라인 담론은 ‘공감’ 혹은 ‘분노’와 같은 거대한 감정으로 이어지기 쉽다. 이 ‘감정화된 사회’가 한 두 명의 ‘영리한’ 프로보커터의 주장(김내훈, 2021)으로 재결집되고, 다시금 거대 양당의 정치적 비전으로까지 제시된 이번 대선의 노골적인 여성/소수자 혐오는 페미니스트 모델을 교묘히 배제하면서도 포섭해온 시민 양성 프로그램들은 물론, 페미니즘 비평이 ‘감정화된 공론장’에 개입해온 그간의 방식을 다시 살피게 한다.

대개의 공적 언어는 <꼬꼬무>를 쉽고, 재미있지만 “흥미가 전부가 아닌” 콘텐츠로 평가한다(기사 보기). 역사 속 개인에 초점을 맞춘 서사는, ‘그날’과 ‘오늘’의 연결 속 우리-시민의 적당한 부채감과 책임의 분산을 상기하며, ‘진정성’, ‘반기억’, ‘탈합치’ 모두를 성취하기 때문이다(권유리야, 2022). 그런데 이 매끈한 연결의 과정에서 <꼬꼬무>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극의 역사가 훼손한 우리 사회의 ‘정상적 행복’을 회복/유지해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이다. 이 선하고 이상적인 목표를 위해 시청자는 <꼬꼬무>가 제안하는 성찰-성장의 서사와 함께 우리-시민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프로그램이 강조하는 이상적 공동체란, ‘한 핏줄 한 민족’이라는 환상적 관념에 토대를 둔, 나아가 철저히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무엇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지적되지 않는다[7]. 뿐만 아니라, <꼬꼬무>가 주목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이 언제나 ‘이성애적 정상가족’ 모델 속에서만 구현된다는 기이한 사실 역시 쉽게 간과된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과 ‘어머니’로서만 여성의 행복을 상상하는 방식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혜석의 ‘불행’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수 없었을 것이다.

[7] 김윤정은 <꼬꼬무>의 ‘LA 폭동’ 에피소드가 ‘두순자’를 삭제했음을 지적한다. 한인 두순자가 흑인 소녀를 도둑으로 오인, 총격 살해한 사건을 생략하고 폭동 과정에서 한인들이 보여준 용기와 성숙한 대처만을 서사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꼬꼬무’가 상상하는 민족 공동체가 어떤 모습인지 투명하게 보여준다(기사 보기).

<꼬꼬무>를 향한 드문 비판은 주로 가시성의 장에 무엇이 어떻게 묘사되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재현의 자극성이나 폭력성을 문제로 삼는다. 타자화된 고통을 ‘전시’하고 이를 ‘감상’하는 낡은 미디어 관행과 그 속에서 여전히 배제되고 억압되는 여성/피해자의 자리를 강조하는, 대개의 대중문화 비평의 주된 관점과 같다[8]. 이는 ‘정서 이방인(affect aliens)’인 페미니스트의 “불편함과 소외의 몸짓은 등록되지 않는다”(사라 아메드, 2021, 82쪽)는 아메드의 명제가 많은 페미니즘 비평의 모토이자 목적이 되고 있는 현실을 환기한다. 그런데 ‘등록되지 않는 불편함’, 즉 ‘외부’라는 페미니스트의 자리는 불편함이라는 감각을 그 자체로 단일한 범주로 상정하고, 이를 대리 호소하는 것을 공적 언어의 주요 역할로 고정하는 면이 있다. 이에 따라 공적 언어는 ‘올바른’ 남성-시민 형성 프로젝트에 맞서 ‘올바른’ 여성-시민 모델을 기입하고 재현할 것을 남성-가시성의 장에 요구하는 것에 주력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접근을 통해 우리는 ‘젠더 갈등’을 회피는 것으로 합의된 조화로운 사회라는 상, 그 자체를 문제시하기 어렵다.

[8] 이진송은 <꼬꼬무> 류의 프로그램이 “타인의 고통을 유희거리이자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기사 보기).  여러 대중문화 현상에 발 빠르게 개입하는 이진송과 위근우의 칼럼은 온라인 공론장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시각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들의 비판은 우리 사회의 ‘저급한’ 윤리 의식과 젠더 감수성에 일침을 놓는 것을 거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처럼 보인다. 대중문화에 ‘리얼’하게 재현된 한국 사회의 모순을 환기하거나, 재현의 폭력성을 우리 사회의 주류 시각과 동일하게 겹쳐 놓으면서 이들 논평이 집중하는 것은 사태의 원인과 해결의 주체를 가려내는 일이다. 이들에 있어 대개의 ‘문제’는 어딘가 왜곡되거나 시대착오적인 의식을 지닌 ‘그들-시민’의 몫이다. 따라서 ‘비판’은 ‘그들’의 ‘시각 교정’을 위한 올바른 정보 나열에 소모되며, 글의 최종 목적은 ‘그들’을 향한 성토적 발화(“최소한의 염치는 갖추자.”(기사 보기), “자, 이 중 무엇이 더 합리적이겠나. (후자? 땡!)”(기사 보기)를 통해 ‘우리’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것에 머무른다. 

대중적 파급력을 지닌 프로그램인 <꼬꼬무>가 이른바 ‘젠더 갈등’과 관련하여 보여준 가장 큰 문제점은 프로그램이 설정하는 ‘행복한’ 사회의 모습에 있다. 이 전체의 ‘행복’에 페미니스트 모델과 페미니즘의 의제는 분란을 조장할 가능성을 스스로 삭제할 때만 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페미니즘 비판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러한 ‘행복’과 ‘조화’라는 강력히 합의된 개념의 경계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힘’이 지닌 강력함(대중성)의 원인과 조건, 그리고 효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비평이 그저 ‘우리’의 ‘대리 호소’와 ‘대항’의 자리에만 머무를 때, 혹은 그에 걸맞게 ‘문제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끝없이 이동할 때, ‘감정화된 공론장’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꼬꼬무>의 페미니스트 없는 ‘우리-시민’이 매우 안전하게 재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조화와 화합을 넘어서는 페미니즘 비평

우리가 ‘젠더 갈등’이라고 부르는 ‘페미니즘 – 여성혐오’ 간 대립이 실상 동등한 입장의 ‘갈등’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많은 페미니스트 논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9]. 그러나 젠더 갈등에 관한 온갖 감정화된 소란들은 여전히 대중 교양 프로그램과 시청자가 상호 호명하는 동료 시민의 개념 바깥에서, 물밑의 소동으로 분리되어야만 한다. 페미니즘 비평이 바로 이 같은 외부화된 젠더 갈등에 배치될 때, ‘극단적 꼴페미’의 분란 조장 가능성을 차단한 대중문화의 시민 양성 프로그램은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소재에 여성 인권을 할당하며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안전하게 재구성할 수 있다. 근래 발생한 “‘1번남 2번남’으로 대통합된 남녀 커뮤니티”라는 분석과 소위 ‘개딸(개혁의 딸)’로 배치된 여성-시민의 자리는 남성-시민의 ‘행복’ 뿐만 아니라, 여성-시민의 ‘행복’으로 여겨지는 것, 아니 우리 사회의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를 근본부터 의문시할 페미니즘 비평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9] 대중 페미니즘의 주된 속성이 ‘active’라면, 대중 여성혐오는 이에 대한 ‘reactive’를 특성으로 한다. 대중 페미니즘이 여러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면서도 “구조화된 젠더 불평등”에 대한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지속하고 있다면 대중 여성혐오는 오로지 “페미니즘”과 “그것의 예상된 이득”을 향해 문제제기를 한다. 이들 관계를 결코 대칭적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유지되는 대중 여성혐오는 그 내적 비일관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도적인 형태로 구체화될 수 있는 힘을 지닌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Sarah Banet-Weiser,  2018).

우리는 앞서 살핀 아메드의 “불편함과 소외의 몸짓은 등록되지 않는다”(사라 아메드, 2021, 82쪽)는 명제가 우리의 최종 입장이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아메드가 말한 ‘트러블 메이커’로서의 페미니스트는 “즐거움을 나타내는 공적인 기호들 아래 감춰져 있는, 전위돼 있는, 부정당한 나쁜 느낌을 폭로하는 것”인 동시에, “페미니즘의 기쁨까지도 망칠 수 있는”종류의 자리이다(사라 아메드, 2021, 122-124쪽). 외부에(혹은 법 내부에) 명확한 ‘그들’을 겨냥해야만 진행될 수 있는 비판이 아닌, 내재적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스트 비평은 페미니즘의 기쁨까지도 기꺼이 망치려는 자리에서 가능하다. 아메드는 ‘페미니스트’라는 공통점으로 정서적 연대감을 느끼고 있던 백인 여성 집단 앞에 우두커니 나타난 한 흑인 여성의 신체로서 ‘트러블 메이커’를 의인화한다. 존재 자체로 끝없는 갈등과 분파를 생산하는 페미니즘 비평은 ‘조화’와 ‘행복’을 단순히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불행’을 생성의 자리로 만든다. 우리-페미니스트-시민의 얼굴은 다른 누구로부터는 물론 서로로부터 쉽게 삭제되지도, 또 쉽게 포섭되지도 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 권유리야(2022). “이야기하기의 철학-진정성, 반기억, 탈합치-<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당신이 혹하는 사이>를 중심으로”, 『문화와융합』, 제 44권 4호, 1251-1268쪽.
  • 김내훈(2021). 『프로보커터』. 서울: 서해문집.
  • 김보명(2021). “보수적 페미니즘은 ‘여성’을 구할까?”, 『문학과사회 하이픈』. 서울: 문학과지성사.
  • 손희정(2017).  『페미니즘 리부트』. 서울: 나무연필.
  • 한송희, 이효민(2020). “영화와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논쟁 – <캡틴 마블>과 <어벤져스 : 엔드게임>, <인어공주>를 중심으로”, 『언론과사회』, 제 28권 2호, 5-17쪽.
  • 허윤(2021). “커뮤니티와 서사 공동체의 형성”, 『뉴 래디컬 리뷰』, 제 1호, 163-180쪽. 
  • Ahmed, Sara(2010). The promise of happines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성정혜·이경란 옮김(2021), 『행복의 약속』, 서울: 후마니타스.
  • Banet-Weiser, Sarah(2018). Empowered: Popular Feminism and Popular Misogyny,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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