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wd Vol.6 페미니즘 정치, ‘불행’의 좌표 다시 찍기: 닫는 글

🌊강물

어느덧 기획 6호의 마지막 글입니다. 이번 기획은 제20대 대통령선거와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페미니즘 정치’라는 큰 틀 안에서 구상되었는데,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내부에서는 Fwd가 그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더라도 시의성 있는 글들을 소개해온 만큼, 이번 글들도 발행 시기가 시의적절할지 많은 염려가 있었습니다. 이 논의가 성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실천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 오히려 그 발걸음을 지체시키진 않을지 등등 시시각각 바뀌는 정세와 현안 속에 고민은 깊어져만 갔습니다. 더구나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필진 중 누군가는 당혹감, 절망감 등 이로 말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겪었고, 다른 누군가는 예측되지 않는 4년으로 깊은 고심에 빠지며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돌이켜보면, 기획 글들이 얼마나 시의적인지가 중요하기보다는 그 고민들이 있었기에 작금의 상황을 설명할 단초를 얻은 듯합니다. 따라서 닫는 글에서는 필진들의 생각과 고민이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풀어보려 합니다.

리예는 2000년대 이래 한국의 온라인 공간에서 전유된 밈, 짤방 등이 탈 맥락화된 서사 안에서 한국여성 또는 여성가족부에 대한 혐오를 어떻게 양산하는지 지적하였습니다. 특히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단 일곱 글자로, 관련 논쟁을 일축시키고 근거 없는 혐오를 선동한 윤석열의 행보가 나오게 된 흐름과 그것이 야기한 효과를 짚어내고자 했습니다. 실제로 대통령 당선 전후 성평등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한 밈이 더 많이 재생산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가 강화되었다는 전언들이 들려오고 있습니다(기사 보기). 따라서 이러한 특정 형태의 서사들이 미치는 파급력에 대해 면밀한 분석이 더욱 요해질 것이라 사료됩니다.

한편 이번 대선 때 많이 거론됐던 또 다른 키워드는 ‘능력에 따른 공정한 인사’였습니다. 현재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불공정한 절차와 처사 때문이며, 개개인의 능력을 중심으로 사람을 뽑고 성과를 측정한다면 공정한 보상이 될 것이라는 게 주요 골자입니다. ‘여성가족부 폐지론’ 또한 여성가족부가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정책을 펼치며 남성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과 함께 제기되었으며, 이때 능력주의는 그에 대한 대안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요직에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현 정부의 철칙은 결국 남성중심적인 내각을 구성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명의 국무위원 중 단 3명, 차관(급) 인사 41명 중에서는 단 2명 만이 여성들이라는 점에서, ‘한국 내각에 남성만 있다’는 워싱턴포스트 기자의 지적은 뼈아픈 현실을 보여주었습니다.[1]

[1]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서 워싱턴포스트(WP) 기자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한국 내각에 남성만 있는데, 앞으로 어떠한 노력을 할 것인지’ 질문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에게 공정하게 기회가 적극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아,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보장할 생각’이라며 답했다(기사 보기).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전력을 볼 때, 그 같은 말은 어불성설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시드는 능력주의로 개개인의 능력 계발을 장려함으로써 소속 가정이나 사회의 격차, 더 나아가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능력에 기반한 ‘공정함’은 안티페미니스트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주장되는 바로, ‘능력’ 자체에 대한 질문을 달리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동아제약 채용 차별,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금융계 여성 차별 등 ‘(그들이 말하는) 공정한 인사’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에 무엇을 어떻게 ‘능력’으로 정의하는지 문제제기 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고 또 필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드가 능력주의와 공정으로 표방되는 구조적 부정의에 대해 환기했다면, 라니와 최가은의 글은 현 시국에서 ‘분위기 깨뜨리는’ 페미니스트들 또는 페미니즘이 재현되는 양상을 다루었습니다. 라니는 ‘이대남’ 대항 주체로 호명되는 ‘이대녀’ 프레임은 성별과 연령대를 기준으로 집단화된 결과이며, 이들이 부상했다는 시각은 종전의 역사와 맥락을 삭제시킨다고 비판합니다. 즉, 이대녀가 곧 페미니스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동일시 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페미니즘 정치가 왜곡·축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페미니즘에 달라붙은 부정적인 정동들에 일정 기인하는데, 최가은 역시 그러한 이유로 소위 ‘진보적’으로 분류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페미니즘에 접근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음을 설파합니다. 그에 따르면,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행복한’ 사회에는 사회적으로 합의/승인된 시민 모델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언급하면 야기될 (것이라 예상되는) 갈등 요소들은 감정화 등의 전략으로 적극 차단됩니다. 

이렇듯 페미니즘 백래시라는 물결 아래 ‘분위기 깨뜨리는’ 페미니스트 킬조이는 혐오와 멸시, 때때로 존재조차 지워지는 일들을 겪곤 합니다. 하지만 아메드(Sara Ahmed)는 페미니스트 킬조이에 대해 ‘행복’이라는 이면에 소거되는 삶들의 존재와 불합리한 구조를 폭로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지향하거나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의 ‘행복’이 어떠한 상황과 조건들을 전제하는지를 예리하게 질문하는 것이 페미니즘 정치의 역할인 것입니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성차별적인 구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개입해야 할 문제의 외연을 넓히기도 합니다. 아이리스 영(Iris. M. Young)은 우리 모두가 현존하는 구조적 부정의에 어떤 식으로든 연루되어 있으므로,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한 전지구적인 정치적 책임을 촉구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 위에서 윤소이와 사라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와 기후위기 문제를 사유하며, 페미니즘 정치의 책임을 상기합니다.

20여 년의 역사 속에 계속된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정부 예산에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을 요구해왔습니다. 즉 장애인의 일상을 보장받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지난 3월,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은 개인 소셜미디어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투쟁에 대해 ‘수백만 승객은 특정 단체의 인질’이며,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번에 서울경찰청장으로 부임한 김광호 역시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국민의 발을 묶어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불법 행위’로 규정하며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사법처리하겠다’는 엄청 대응의 기조를 밝혔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대에 대한 공권력의 부정적인 관점을 여과 없이 드러낸 셈입니다. 윤소이는 ‘다수 시민의 불편함’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대에 대한 혐오가 존재함을 읽어내며, 동시에 ‘출근길’이라는 일상이 ‘강인한’ 직장인들의 신체와 특권에 기반을 둔다고 주창했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시위는 결코 소수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어린이·노약자 등 ‘강인한’ 신체에 속하지 않는 이들 또는 여타의 상황에 따라 누구든 이용하고 있는 지하철 승강기 설치율을 93%까지 이끌어낸 투쟁은 다름 아닌 장애인 이동권 시위입니다. 따라서 이 시위를 단순한 ‘불편함’으로 치부하며 공리주의 규범에 갇히기 보다, 그에 속하지 않은 신체와 일상들을 삶의 바깥으로 몰아내지 않을 것을 강조한 필자의 말을 다시 한번 유념하며 연대할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 기후변화 등 기후 문제에 대한 온갖 용어들과 관심이 범람하는 요즘, 사라의 글은 ‘기술’ 중심의 해결과 대책이 능사는 아님을 지적합니다. 최근 대형 산불의 급격한 증가와 이례적인 가뭄과 홍수를 목격하며, 기후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고 원자력 발전을 적극 확대하여 미래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로드뷰를 발표했습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을 확대해 탄소중립 목표치를 달성하고, 전세계적으로 치솟는 물가에 대비해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는 성장주의와 남성중심의 경제구조를 탈피하지 않는 이상, 사회적 불평등이 더 극심해진다고 말합니다. 필자는 사회경제적 위치, 나이, 장애유무 등 다종다양한 조건에 따라 기후위기 피해가 달라지며, 특히 재난 상황일수록 높아지는 여성의 사망률과 성폭력 노출 확률, 돌봄/가사노동 비중은 이러한 피해가 얼마나 성별화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므로 ‘기후변화 책임국’인 한국이 기후위기의 피해와 책임의 불일치를 시정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는지, 무엇보다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젠더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어떠한 방향으로 기후정의를 실현해나가는지 우리 모두가 책임 의식을 갖고 목소리를 내야겠습니다.

기획부터 발행까지 약 여섯 달간의 장정을 마치고 보니, 두 계절을 지나 어느새 여름이 되었고 2022년도 반이 지나갔습니다. 굵직굵직한 이슈와 사건을 겪으며, 각자가 정의하는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개인적인 이유든 공동체적인 상황이든 복잡한 마음을 안고 계신 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진부한 표현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사회에서 정한 행복으로의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연대하는 마음으로 또 다른 좌표를 찍고 나가는 페미니스트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럼 두 계절을 지나 다음 기획에서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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