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정치의 현주소

<한겨레21> 박다해

이번 특별기고는 Fwd의 여섯 번째 기획 <페미니즘 정치, ‘불행’의 좌표 다시 찍기>의 필진들이 지난 기획의 연장선에서 마련한 특별 지면입니다. 지난 2022년 1월에 열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정치를 이어가자?!> 간담회를 계기로 초청에 응해주신 필자 박다해 님께 감사드립니다.

들어가며

‘페미니즘 정치’는 무엇인가. 아니, 그전에 ‘페미니즘’과 ‘정치’는 각각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들과 무엇이 달라야 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페미니스트 정치인’들이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올해 초부터 페미니스트 활동가, 정치인 등과 2주에 한 번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던졌던 질문들이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반년 가까이 이 질문에 대한 ‘합의된’ 답을 찾지 못했다. 나름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였다고 생각했는데도, 언제나 미묘한 차이가 존재했고 그 차이를 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늘 정해둔 모임 시간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여러 번 모임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그동안 정치의 영역 안에서 얼마나 위 질문들이 던져지지 못했는가에 대해 새삼 자각하게 됐다. 한국 정치는 최소한의 ‘양적인’ 평등조차 이루지 못했기에, 그동안 정치 영역의 성평등은 대개 ‘남녀 동수’ 또는 ‘여성 비례대표 할당제’(교호 순번제[1])를 최우선으로 두고 그 틀 안에서 논의돼왔다. 그나마 ‘미투’ 운동 덕에 정치·사회 전반의 성차별과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성찰할 기회가 생겼지만, 정치인들은 보란 듯이 그 기회를 차버렸다.

[1] 2004년 1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비례대표 후보의 여성 비율을 50%로 늘리고 여성을 홀수 번호에, 남성을 짝수 번호에 배정하는 교호 순번제를 실시하자 여성 의원이 39명으로 늘었다.

정책의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나 ‘두들겨 맞는’ 역할을 했던 여성가족부가 그동안 훌륭하게 ‘성평등 정책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다른 부처의 성평등 의식은 여가부가 제시하는 ‘최소한’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전 부처와 사회의 성평등 수준이 높아져 굳이 ‘여성가족부’라는 별도 부처가 존재하지 않아도 되길 바라는 건, 사실 누구보다 페미니스트일 것이다.

질문에 대한 성급한 답을 내리는 대신, 이 지면에선 취재 기자로서 여러 현장을 다녔던 경험을 공유하고자 한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그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고민의 출발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평등 정책을 둘러싼 젠더정치

우선 정책이다. 여성가족부는 ‘독립부처’임이 무색할 정도로 적은 예산(2022년 기준 전체 정부 예산의 0.24%)과 인력(2021년 기준 279명)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나마도 이 예산 대부분은 ‘아이돌봄서비스’처럼 양육·돌봄과 관련해, 또는 한 부모 가족·위기 청소년·성폭력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해 쓰인다. 성평등 분야 예산은 여가부 예산의 7%에 불과하다. 이 여가부를 “박살을 내버리면”(장예찬 전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청년위원장) 정말 사회의 ‘젠더 갈등’이 사라질까? 

이 ‘우문’이 정식 공약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엔 ‘셧다운제’를 기점으로 폭발한 여가부에 대한 오래된, 그리고 ‘그래도 된다’며 승인된 혐오가 존재한다. ‘셧다운제’가 사실 청소년보호위원회[2]에서 처음 제안됐다는 점, ‘셧다운제’가 담긴 법안(청소년보호법 개정안)은 2005년 7월 김재경 의원(당시 한나라당)이 처음 발의했고 2011년 한나라당 의원 77명, 민주당 의원 35명이 찬성해 통과시켰다는 사실은 말끔하게 소거된 채, 남성의 영역인 ‘게임’을 ‘감히’ 여가부가 통제하려 했다는 허구의 분노만 남아 여가부를 공격하는 단골 소재로 사용돼왔다. 

[2] 국무총리 직속 중앙행정기관이었고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산하 위원회로 변경되어왔다.

여가부를 출입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유독 다른 부처보다 위축돼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정책의 필요성이나 타당함을 따져볼 새도 없이, 뭘 하든 비난에 노출되다 보니 스스로 무기력을 체화하거나 지나치게 자기검열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실제로 지난 정부에서 운영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장관이 바뀔 때마다 매번 여가부 장관의 퇴임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던 점을 돌이켜보면 현장의 이 무기력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다른 부처는 어땠을까. 성평등 정책은 여가부‘만’ 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여가부 소관 법률은 성평등 전체 분야 중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즉, 성평등 정책을 추진하려면 타 부처와의 협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취재하면서 만났던 여러 다른 부처나 국회는 성평등 정책 전반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고수했다. 바로 ‘무관심’이다. 성인지예산 제도를 관리하는 주무 부처인 기획재정부는 매년 성평등과 아무런 관계없는 예산, 예컨대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 구축’이나 ‘용산 공원 조성’ 예산이 성인지예산으로 편성되는 걸 사실상 방관해왔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난 뒤에도 여성의 재생산권을 포괄적으로 보장하는 후속 입법 조치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존중하기는커녕 졸속으로 간담회를 진행하고, 되레 정책자문기구인 성평등자문위원회 권고와 반대되는 개정안을 내놨다. 그런가 하면 국무조정실은 법무부, 복지부, 여가부 등 5개 부처가 참여하는 회의를 열어놓고 임신중지를 “태아 살해 행위”로 규정하고 형사 처벌을 유지하자는 결론을 냈다. 당시 열린 차관 회의에서 헌재 결정 취지에 부합하는 의견을 낸 부처는 여가부 한 곳뿐이었다. 

법무부는 또 어떨까. 윤석열 정부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마치 법무부에서 통합적으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지만 법무부 산하에서 제대로 지원이 가능할지는 회의적이다. 법무부는 오랫동안 의제 강간 연령 상향(13살 미만→16살 미만)과 성범죄 대상인 아동·청소년을 ‘피해자’로 보는 아동·청소년 성 보호법 개정안을 굳건하게 반대해 온 부처였다. 2020년 1월 법무부가 급작스럽게 입장을 선회해 위 두 개정안을 통과시킨 건,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 온 양성평등 정책담당관과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던 여성 장관이 있었기에 ‘반짝’ 가능했던 일이었다. 군 내 성폭력 문제를 대처하는 과정에서 피해자 신변 자료를 국회에 제출한 국방부, 수년째 성평등 교육안을 개정하라는 목소리를 묵인하는 교육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지난 정부에서 8개 부처(고용부·국방부·문화체육관광부·교육부·법무부·보건복지부·대검찰청·경찰청)에 양성평등 정책담당관실이 만들어진 점은 성평등 정책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선 이들이 부처 내에서 실질적 권한을 갖지도 못하고 고립돼 고군분투하다 지쳐버리는 모습을 종종 보기도 했다.

표류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여의도라고 해서 페미니스트가 설 자리가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여성가족위원회가 여전히  ‘겸임 상임위원회’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의원들의 ‘기피 1순위’ 상임위원회가 된 현실은 성평등 정책이 여전히 무관심과 무지의 영역에 걸쳐져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평등·여성 정책을 추진하는 점이 의원으로서 경력과 당선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의원들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나마 성평등 정책에 관심이 있는 소수의 여성 정치인들은 평소엔 ‘매사 딴지를 거는’ 미운 털처럼 존재하다가 당내에서 성비위 사건이 발생하면 갑자기 당의 ‘얼굴’로 발탁되곤 한다. 마치 그 성비위 사건을 막지 못한 책임이 오롯이 그들한테 있다는 식으로 책임을 묻는 비난 여론도 뒤따른다.

반대로 성평등이란 가치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회피하는 일은 너무나 쉽게 이뤄진다. 최근 치러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57개 단체가 더불어민주당에 특정 후보를 배제하라고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이들은 당 안에서 발생한 ‘권력형 성폭력’과 관련해 2차 가해를 했던 후보들이었다. 민주당은 이 요구에 어떤 답변도 보내오지 않았다. 

결국 지목된 후보들은 모두 경선을 가뿐히 통과해 최종 후보로서 선거를 치렀다. 사건 발생 직후 발표했던 ‘권력형 성범죄·성비위에 대한 무관용 원칙’이나 ‘성폭력 2차 가해 공천 평가에 반영’ 등의 약속은 실상 휴지조각보다 가벼운 말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른바 ‘진보 정당’이라고 해서 상황이 다를까. 정의당이 최근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당내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목소리가 ‘여성 할당제 폐지’를 포함한 혁신안이었음을 돌이켜보자. ‘새로운 진보’라고 불리는 이 당내 의견 그룹은 정의당의 현주소가 “비호감 지적질 페미 정당”이며,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과감한 사회경제적 개혁안을 만들어내는 데” 소홀한 채 “페미니즘과 생태주의”에만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페미니즘도, 생태주의도 모두 ‘불평등과 양극화’란 자장 안에 존재한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목소리다. 

나가며

앞서 페미니즘이 정치의 영역에서 ‘무시해도 괜찮은’ 존재가 된 것과 관련해 정치 당사자와 정책 담당자들을 비판했지만, 언론의 책임 역시 두말할 것 없이 크다. 다수의 언론은 페미니즘을 갈등의 소지로만 다루고, 상존하는 성차별을 개선하자는 요구를 ‘역차별’로 규정하는 흐름을 확산해왔다. 또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누구도 온전히 대표할 수 없는 그룹을 편의적으로 나눠 이들을 대립항처럼 다룸으로써 갈등의 표면에만 집중할 뿐 그 원인을 찾는데 게을렀다. 

그뿐이랴. 검증도, 판단도 없이 오로지 클릭 수만을 바라보며 ‘온라인 커뮤니티’ 글을 받아쓰거나 현실의 기울기를 무시한 채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A vs B’형 기사, 또는 일단 논란이 되는 이슈를 쓴 뒤 ‘아니면 말고’식 기사도 다량 양산되고 있다. 혐오 발언도 직접 인용 따옴표를 달고 기사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확산된다. 이렇게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공론장 자체도 축소됐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페미니즘 백래시가 대선 공약으로 거듭나 전면에 등장한 시기, 정현백 전 여가부 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는 경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와 페미니즘도 압축성장을 했”기 때문에 “사회가 이걸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진단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같은 정치인들이 이러한 “수용의 지체를 이용해 청년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는 설명이다. 

이러한 ‘지체’의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지치지 않고 질문을 던지고 계속해서 답을 모색해가는 일이다. 다시, 페미니즘 정치는 무엇이고, 페미니스트 정치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더욱 기울어진 지형 위에서 협소해진 페미니즘의 공간을 어떻게 확장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페미니즘에 기반한 연대와 접점을 만들고, 이를 지속 가능한 움직임으로 확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해야 한다. 

질문을 던지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 페미니즘 정치는 어쩌면 여기서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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