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이

이 글은 연구자의 석사학위논문의 일부를 재구성하였으며, 고인의 시신인수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혈연관계의 연고자들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과 가족정치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석사학위논문의 연구방법 및 주제선정배경 등에 관한 정보는 연구자의 연구후기(“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무연고사망자의 상주되기”)를 참고해주세요.
고령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사망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사회를 ‘다사사회(多死社會)’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고령인구의 증가라는 현상 ‘이후’의 상황, 즉 포스트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의 연구자들이 고안해낸 용어(시바하라 케이이치, 2021)인데, 이렇게 ‘다사 사회’라는 말로 특징되는 시간은 한국의 ‘미래’가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재’이기도 하다. 보통 일본사회의 여러변화들, 사회구조적 문제들은 한국보다 일본이 20~30년 ‘빨리’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으나, 인구변동의 문제만큼은 한국과 일본의 상황이 동시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 2020년을 기점으로 한국사회의 사망율이 출생율을 앞지름에 따라, 인구의 자연감소가 관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통계청(기사 보기)에 발표한 2022년 출생사망잠정통계에 따르면, 출생아 수는 감소했지만 고령화로 인해 사망자는 늘면서 한국 인구가 역대 최대 규모 자연 감소(-12만명)를 기록했다[1]고 한다.
[1] 2022년 출생사망잠정통계결과, 출생아 수는 2021년 26만600명에서 작년에는 24만9000명으로 1만명 가량 감소했다. 같은 기간 사망자 수는 31만7700명에서 37만2800명으로 5만5000명 늘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여기’에 이미 도래한 다사사회를 ‘잘’ 준비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에서는 이미 눈앞에 도래한 현실로서 인구의 자연감소가 발생하는 현상을 인류의 ‘소멸’과 ‘재앙’이자 ‘미래 없음’으로 재현하는 재생산 미래주의에 반대하고, 오히려 다사사회의 도래를 기존의 가족제도가 더 이상 지속불가능함을 드러내는 분기점이자 윤리적-정치적 계기로 인식할 것을 요청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공영장례라는 새로운 성격의 장례문화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의 죽음의례와 관련하여 어떠한 인식적, 제도적 변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이같은 변화들이 우리에게 이미 도래한 다사사회를 살아가는데에 어떠한 참조점을 제공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전통적인 가족규범이 공영장례라는 새로운 장례문화와의 관계속에서 어떻게 하여 의문시되거나 반대로 여전히 개인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면서 어떻게 공영장례를 반대하는 근거로 동원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1. 새로운 장례문화의 등장: 변화하는 가족규범과 NPO차원의 죽음준비
먼저 공영장례제도란, 기초생활보장제도에 의해 따른 장제급여수급자 및 장례취약계층 그리고 고인의 연고자가 존재하지 않거나 연고자가 시신을 인수하지 않아서 무연고사망자가 된 시민들을 위해 출발한 복지정책이다. 이같은 공영장례는 전국의 지자체별 공영장례지원조례에 근거하여 운영중이며, 공영장례의 현장을 움직이는 구체적인 행위자들은 지역의 자원봉사자들, 고인의 이웃, 친구, 직장동료, 마을주민 등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지역사회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마을장례, 공동체장례의 특징을 공유한다. 이러한 공영장례는 장례를 주관하는 ‘상주’가 반드시 친족이어야 할 이유도, 자격도, 조건도 없다.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하고 기억하고자하는 마음과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장례식의 상주가 될 수 있다는 점이 공영장례식의 가장 큰 특징이다.
한국과 유사하게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경우, 한국의 공영장례와 비슷한 형식의 새로운 장례/묘지문화들이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한국처럼 무연고사망자와 기초생활수급자라는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지원목적으로부터 출발한 복지정책은 아니지만, 기존의 가족제도에 기반한 부양의무의 강제는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현대 일본사회에서의 죽음문화의 변천을 개인화의 관점에서 고찰한 기존논의(이미애, 2011)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새로운 장묘시스템은 처음에는 가족이 없는 고령자들을 위해 생겨났으나 현재에는 자식의 유무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가치관과 계획대로 죽음을 준비하고자 하는 개인들이 이용자가 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이같은 새로운 장묘시스템을 위한 조직화된 자발적 결사체들, 시민유대, 그리고 이에 대한 개인들의 인식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다양화 된 편(송효진, 선보영, 최진희, 성경, 박수경, 2019: 46-49)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가족묘지’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희박해지고 있는데, 일본사회의 가족이 변화하는 풍경을 묘사한 에세이스트 시모주 아키코(2015)에 따르면 최근 들어 “가족묘에 묻히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 결혼한 여성은 성씨만 바꾸는게 아니라 죽어서도 시댁의 가족묘에 묻혀야하는 관습이 있는데, 이러한 관습이 더 이상 현대사회의 ‘좋은’ 삶과 죽음에 적절하지 않다고 여기는 개인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가족을 형성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같은 묘에 묻힌다. 그런 움직임이 보인다. 사이가 좋지도 않고 마음이 통하지도 않는 가족이 억지로 같은 묘에 묻히기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다. 화장한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고 하거나 나무 둥치에 묻어달라는 등 사후처리 방법도 다양해졌다. 화장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가족이 반드시 같은 묘에 들어가야 할 이유는 없다. 이를 봐서도 가족의 형태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죽어서까지 남편 집안의 묘에 묻혀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 죽은 며느리는 이제 참는 건 딱 질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후를 생각하면 가족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시모주 아키코, 2015: 116)
이처럼 새로운 장묘시스템을 위한 NPO는 화장이나 매장 등과 관련한 사후처리만을 위해 활동하지 않으며, 삶(활-活)을 마무리(종-終) 하기 위한 준비라는 차원에서 ‘종활’의 의미를 갖는다. 이같은 ‘종활’이란, “단순히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니라 장례, 묘지, 의료, 돌봄, 재산 등의 정리, 보험, 자신의 생애사 등, 자신의 노화와 돌봄, 죽음을 준비하는 일련의 활동(송효진 외, 2019: 39)”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NPO 차원에서의 종활 지원은 한국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재 서울시의 공영장례를 지원하는 NPO 단체 ‘나눔과 나눔’의 경우, ‘결연 장례’라는 활동을 통해 서울에 거주하는 1인가구 어르신들과의 관계를 이어오면서 어르신들의 유언을 듣거나 영정사진을 함께 준비하는 등 이제까지 전통적으로 가족의 역할이라 간주되어온 죽음준비를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중이다.
2. 장례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연고자(緣故者)들에 대한 도덕적 비난
전국의 지자체별 공영장례조례의 설치현황을 보면, 지난 2021년을 기준으로 전국의 광역자치단체와 기초자치단체를 합하여 총 59곳에 설치된 것으로 파악(기사 보기)되었고, 이듬해인 2022년 11월에는 총 82개의 지자체에 공영장례조례가 설치(기사 보기)되어 증가추세를 보이는 중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사회에서 공영장례라는 조례가 설치되는 지자체가 계속해서 확산되는 과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다. 이는 지자체 조례설치 통계자료만으로 드러나지 않는 울퉁불퉁한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지난 2021년에는 공영장례제도의 도입을 둘러싼 공청회에서 지자체 관계자 중 한명이 공영장레제도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인 해이를 유발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한 일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공영장례 도입 시 관련법을 악용해 장례를 치를 능력이 있음에도 공영장례에 의존하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일반시민과 형평성을 감안해 조례제정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기사 보기)된 것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공영장례제도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고인의 시신인수를 포기한 연고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책임론이 관찰되기도 한다. 이렇게 시신인수를 포기한 연고자들은 무연고사망자의 수를 해마다 증가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22년 3월에는 최근 경기도에서 무연고사망자의 수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상과 관련하여 연고자가 부존재하여 무연고사망자가된 경우를 ‘진짜 무연고’로, 연고자가 존재하지만 시신인수를 포기하여 무연고사망자가 된 경우를 ‘가짜 무연고’로 지칭하면서 후자에 대해서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주장(기사 보기)하기도 하였다.
장사법에서는 무연고의 유형을 세가지로 (연고자가 부존재하거나, 연고자를 확인할 수 없거나, 연고자가 존재하지만 시신인수를 거부한 경우) 다루고 있는데, 통계적으로 이 세 번째 사례가 절반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시신인수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연고자들에 대해 ’가짜 무연고’의 원인이라는 화살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무연고사망자라는 범주의 근거가 되는 ‘연고자’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에 혈연과 혼인을 기준으로 협소하고 차별적으로 구성된 산물(박진옥, 2022; 이소윤, 2023; 김순남, 김현경, 나영정, 이유나, 2023)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사회의 관심은 장사법 상의 연고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정부와 지자체에게 장례의 ‘비용’과 ‘의무’를 떠넘기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모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연 이러한 ‘가짜 무연고’와 ‘진짜 무연고’라는 황당한 이분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가족의 장례를 포기하기로 ‘선택’한 연고자들에 대한 비난은 어떻게 해서 공영장례 자체에 대한 반대논리로 등장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같은 비난은 ‘선택’의 결과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답지 못한 가족들의 ‘선택’에 대한 비난의 핵심은 (시신인수포기라는 선택의 결과 자체보다는) 선택의 ‘불가피성’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시신인수를 포기한 사유에 대해서는 ‘불가피한 이유’와 ‘그렇지 않은 이유’의 경계가 전제된다. 앞서 살펴본 뉴스기사에서 언급된 “장례를 치를 능력이 있음에도 공영장례에 의존하는” 가족들에 대한 범주화가 이를 반영한다.
3. 복지제도의 이용/악용이라는 이분법
요컨대, ‘공영장례를 악용하는 가족들’에 대한 범주화, ‘가짜 무연고’를 양산하는 연고자들에 대한 책임론은 고인의 장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어쩔수 없음, 불가피성을 증명한 가족들과 그렇지 못한 가족들에 대한 경계를 구분지음으로써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가피성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가? 이와 관련한 힌트를 얻기 위해 공유하고 싶은 일화가 있다. 연구자가 석사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인터뷰를 했던 장례지도사 김과장님[2]과 나누었던 대화이다. 이날의 인터뷰에서 김과장님이 생각하기에 ‘불가피성’이란, 경제적인 무능력을 증명할때에 유효했다.
[2] 연구과정에서 진행된 모든 인터뷰는 면접참여자의 동의를 얻어 진행되었으며, 면접참여자의 개인정보(이름, 나이, 소속 등)는 모두 식별불가능하도록 처리하여 작성되었음.
“진짜 그러니까 나는 진짜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거를 이용하고, 무슨 뭐 병원비가 많이 나왔다든지 이래 갖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건 사실은 이걸 이용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걸러내 져야지 않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아들이 포기… 4명인가 5명인가 되는데 포기를 했어요. 근데 거기에 포기를 하면서 집 주소를 쓰잖아요. 최고급 아파트 주소를 딱 썼더라고. 근데 포기를 했어 부모인데! 그러니까 그건 뭐냐 이거지! [연구자: 능력… 경제적 능력이 충분하지만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그렇지, 그거를 무연고로 받아들이면 안 되지 않느냐 이게 법적 제도를 그런 건 막아줘야 하지 않냐 법적으로. [연구자: 그럼 그분들은 그 위임서에 뭐라 썼어요? 그래도 경제적 이유? 아니면 관계 단절?] 관계단절도 있고 거의 이제 자기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으면 관계단절을 다 써요. 그럼 그건 그 사람들이 이걸 이용하는 거잖아. 여기 왔다가 간 사람들 있잖아요. 간 사람들은 가서 내가 보기에는 ‘야 무연고 그거 해도 돼 진짜 잘해’ 이렇게 얘기가 될 거 아니야.” [장례지도사 김과장님 인터뷰 중. 강조표시는 연구자]
실제로 장례를 포기하는 원인에 ‘경제적 어려움’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반 이상이며, 이처럼 ‘어쩔 수 없이’ 장례를 포기하는 개인들에 대한 지원이 우선적으로 필요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한국사회의 평균 장례비용은 1,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지난 2017년의 보도(기사 보기)에 따르면, 한국소비자원의 자료조사 결과(2015년 기준)에서 평균장례비용은 1,443만원(매장의 경우 1,558만원, 화장의 경우 1,328만원)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국소비자원의 2004년의 자료조사 결과에서 평균장례비용이 1425만원(매장의 경우 1652만원, 화장시 1198만원)으로 나타났던 것과 비교할 때, 2015년의 장례비용 평균금액은 약 18만원 상승한 것이다. 물론, (평균금액이 아니라) 지난 10년간 물가상승을 고려하면 총장례비용의 상승율 자체는 오히려 하락세를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장례비용의 평균금액인 1400만원이라는 액수는 기초수급자를 대상으로 제공되는 장제급여비(최대 80만원)와 비교할 때 17.5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 이처럼 ‘경제적 무능력함’을 기준으로 하여 ‘어쩔 수 없이 장례를 포기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선별하려는 접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첫째로, 당사자들에게 불가피함(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지)을 스스로 입증할 것을 요구하는 담론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렇게 금전적인 이유와 경제적 어려움의 문제가 강조될 수록, 연고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가피함, 즉, 공영장례를 향한 어떠한 ‘악용가능성’이 없다는 애도의 순수성을 입증할 것을 요구받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스스로가 얼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지, 불가피함을 ‘성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연고자만이 도덕적-사회적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이 과정에서 ‘관계 단절’이라는 의미가 사소화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실제로 김과장님과의 대화속에서는 이렇게 ‘관계 단절’을 이유로 시신인수를 포기한 연고자들에 대한 비난을 쉽게 관찰 할 수 있다. 돈이 있는데도,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재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례를 치르기를 포기한 연고자에 대한 비난 속에서 ‘관계 단절’이라는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과의 관계속에서 덜 괴롭거나 더 감당할만한 종류의 고통으로 위계화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과 ‘관계 단절’로 인한 문제들은 서로가 서로에 영향을 미치면서 한꺼번에 일어나기도 하고, 관계단절이 원인이 되어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하는 등, 무엇이 더 고통스럽고 덜 고통스러운 문제인지를 따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관계 단절’이라는 이슈가 상대적으로 견딜만한 것, 감당할 만한 고통으로 사소화 될 수록, 애초에 왜 연고자의 범위가 혈연/혼인에 기초하여 협소하게 구성되어있는지, 개인이 출생당시에 등록된 관계를 ‘해소’할 자유와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는 차단될 수밖에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혈연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인 갈등 혹은 폭력의 상황을 드러내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4. 상속인의 가계계승절차로서 장례식의 가족정치
김과장님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사실은 오늘날 장례식이라는 의례 자체에 대한 의미부여가 여전히 ‘상속’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김과장님이 생각하기에, 부모의 장례를 포기했음에도 ‘최고급 아파트’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은 것은 공영장례를 악용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김과장님에게 장례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포기한다는 것은 가족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과장님에게 장례의 의미는 상속의 권리를 정당화 해주는 의례에 가깝다. 다시 말해, 고령화를 넘어서 인구의 자연감소에 진입한 시대의 장례에 관한 개인들의 가치관, 인식, 가족의 실천은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가계계승이라는 맥락 속에서 장례식의 의미를 이해해온 규범적 인식 또한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호주제 폐지 이후에도 상속의 의미를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호주상속’으로 전제하는 상속법은 장례식의 의미를 둘러싼 규범적 인식을 지탱하는 토대가 된다. 예컨대, 망인의 유체를 인수할 권리가 ‘제사주재자’에게 있다는 대법원의 판결(관련논의 바로가기)은 한국사회가 땅에 대한 권리와 상/제례를 주관할 권리와 일치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상속법(민법 상의 규정)과 장사법(개별법 상의 규정)은 각각 별개의 법률로 작동한다. 따라서, 연고자가 시신인수를 포기했더라도, 상속법에 근거하여 한정승인절차를 별도로 밟지 않는 이상 상속법에서는 여전히 채무와 재산이 상속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법원 판례는 민법 제1003조와 사회적인 통념, 관습을 근거로 고인의 유체를 인도받을 수 있는 사람의 범위를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땅을 상속받을 사람에게 부여하고 있다.
즉, 한국의 경우 성문법의 차원에서 (1)고인의 시신을 포기하는 절차와 (2)상속의 권리 및 의무를 포기하는 절차는 별개로 작동하고 있으나, 판례법의 차원에서 고인의 시신을 인도받을 사람은 언제나 이미 상속인으로 한꺼번에 전제되어 있다. 이때의 상속인은 고인의 직계존비속으로 한정되며, 상속인들 중의 1순위는 최근친자 중 최연장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재산을 물려받을 권리로서 상속권은 언제나 이미 가계를 계승할 직계혈족의 것으로 전제가 되며, 이 과정에서 장례식이라는 의례의 기능은 상속개념의 두 가지 의미(재산상속과 가계계승)를 하나의 차원으로 봉합하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상속자의 의례로서 장례식을 이해할 경우, 가족의 장례를 포기한다는 ‘선택’은 두 가지 해석만을 허용한다. 즉, 상속에 대한 모든 일체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거나, 상속할 만한 재산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에 상속권에 대한 계승절차가 불필요하다는 오직 두 가지 해석만을 허용한다.
따라서, 돈(재산)이 있는데도 ‘관계 단절’을 이유로 시신을 포기하기로 선택했거나, 반대로 상속과 무관하게 시신을 인수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선택’은 법제도적으로나 관습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 장례식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시신인수를 포기한 연고자들이 공영장레를 ‘악용할 수 있다’는 도덕적인 비난과 연고자가 아님에도 기꺼이 장례를 하려는 비친족 상주들에 대한 사회적인 ‘우려’는 애도의 순수성을 강요받는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예를 들어, 고인의 연고자를 대신하여 친구들이 직접 고인의 시신을 인수받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으나 “재산을 노리는 범죄로 보일 수 있다”며 경찰의 ‘우려’와 만류에 부딪혔던 사례들(이소윤, 2023: 116-117)은 이처럼 장례식의 규범적 의미(상속자의 가계계승절차로서 장례식)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만연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지난 가을에 열렸던 전시회 <탈가부장:례식展>은 이제까지의 논의와 관련하여 가부장적 가족제도, 특히 상속의 역사로부터 장례식이라는 의례를 분리하기 위한 구체적인 상상과 실험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었던 ‘무지개 상조’는 “동성파트너, 공동체 가족, 지인 등이 장례를 진행하고자 할때 맞닥뜨릴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평등한 장례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상의 상조회사이다. ‘무지개 상조’ 안내서에 수록된 “관에 들어갈 때도 부치이고 싶다”는 ‘유언’이 보여주듯, 수의 선택부터 조문객 복장까지 개개인의 고유함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다양한 선택지와 견적이 제공된다. 이는 장례식에서 더 이상 ‘가계’의 승계나 상속이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지 않게 될때, 과연 어떠한 관계들, 개인들이 애도와 추모의 주체로 등장할 수 있을지 상상해보게 한다.



<탈가부장:례식展>의 ‘무지개 상조’ 안내서 (23.10.27. 연구자 촬영)
5. 나가며
끝으로, 포스트 고령화 시대의 ‘좋은’ 장례를 모색하는 과정에는 민법이나 장사법 등의 법제도적 변화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의 확장이 요청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고령화가 이미 급속도로 진행중인 상황에서 사망인구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예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수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장례식이라는 죽음의례 또한 더더욱 우리 삶의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생애과정 속 죽음이라는 문제를 삶의 ‘반댓말’로서 인식한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더 많은 소멸, 나아가 ‘멸종’이라는 ‘우울’의 시간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죽음이라는 문제를 살아있음에 대한 이분법적 대립항으로서 ‘사망(death)’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재구성되는 동사의 형태로서 ‘죽어감(dying)’이라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어떨까? 문화인류학 연구자 강지연(2020)의 논의에 따르면, 해당개념의 동사형태가 지시하듯이 ‘죽어감’은 삶과 죽음의 문지방으로서 죽게 되어가는 전 과정을 조명한다. 이는 죽음의 문제를 삶이 종결된 어느 한 순간에 발생한 사건(event)으로서 명사적 상태가 아니라, 일주일 혹은 한달 혹은 일년의 시간을 걸쳐서 여러형태를 통해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으로서 죽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접근(Kang, 2020: 12)이다. 즉, 장례식이라는 의례가 더욱 더 일상화된 사회를 준비한다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죽음이라는 문제를 삶을 마무리 (종활)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이처럼 죽어감을 삶의 ‘일부’로 수용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몸은 크고 작은 질병과 통증, 손상과 재생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속에서 타인에게 영원히 의존하며 돌봄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 그러한 돌봄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곧 ‘모두’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 김순남, 김현경, 나영정, 이유나. (2023). “가족질서 밖 소수자의 애도의 정치: 퀴어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관계성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제 39권 3호, 143-179쪽.
- 박진옥, (2022). “비혈연 관계 지인의 서울시 무연고사망자 공영장례 경험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박사학위청구논문.
- 송효진, 선보영, 최진희, 성경, 박수경, (2019). “가부장적 가정의례 문화의 개선을 위한 정책방안 연구: 장례문화를 중심으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 시모주 아키코(下重 曉子), (2015). 家族という病. 김난주 옮김, (2015). 『가족이라는 병』, 살림출판사.
- 시바하라 케이이치(柴原 慶一), (2018). 醫療難民を救う「在宅型醫療病床」, 장학 옮김, (2021). 『초고령사회 일본, 재택의료를 실험하다』. 청년 의사.
- 이미애, (2011). “일본사회의 고령자의 죽음문화의 변용 – 개인화하는 죽음 ‘고독사’를 중심으로”. 한국연구재단(N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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