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이

* 이 글은 연구자의 석사학위청구논문 “한국사회 무연고사망자의 ‘상주 되기’와 장례실천을 둘러싼 가족정치”의 연구후기로, 논문을 작성하기까지 연구주제 선정배경과 자료수집경험을 담은 에세이입니다. 연구자의 석사학위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사례 및 핵심주장과 관련하여 보다 발전된 심층적인 분석으로는 “무연고사망자의 ‘상주 되기’를 통해 본 사후(死後)의 가족정치(이소윤, 2023)”를 참고해주세요.
1. 할머니와 ‘무연고 환자’들의 죽음
논문의 시작은 할머니의 죽음이었다. 내가 스물세살 때 돌아가신 할머니는 약 2년 정도 병원에서 아파하시다가 병원에서 사망하셨다. 할머니가 입원해있던 병원에는 정말 많은 아픈 사람들이 있었다. 할머니가 아프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고 있다는걸 알지 못했으며, 아픈 몸을 간병해줄 보호자들의 ‘부양 의무’라는 것이 (자연스레 여자들의 일로 기대될 뿐 아니라) ‘돈’이 많이 드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이러한 ‘부양의무’는 할머니의 죽음 이후의 장례식장까지 이어졌으며, 꼬박 3일을 빈소에서 밤을 새고 나서야 어른들이 왜 그렇게 조의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조의금은 추모의 표시인 동시에, 산더미처럼 쌓인 병원비와 장례비용을 갚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적후원금인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미래’는 어떨까? 저마다의 가치관과 성적지향성과 비혼주의와 기타 등등으로 인해 연애-결혼-임신-출산-양육으로 이어지는 생애 경로와 등지고 살아가는 와중에, 그간 모아둔 돈보다 갚아야 할 대출금이 더 많은 친구들과 나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사실 나는 나중에 내가 어떻게 부양의무를 책임질 수 있을지도 걱정이지만 누가 나를 돌봐줄지가 더 걱정되는 편이다.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불안, 걱정, 고민,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정되어온 ‘가족 돌봄’과는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현장에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보호자는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돌봄의 현장이 필요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도교수님의 추천으로 알게 된 서울 소재의 S병원은 약 30년 동안 의료취약계층을 위해 무료 진료를 실천해온 가톨릭 재단의 의료기관으로, 기존의 가족 돌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돌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연구를 진행하던 2021년은 코로나19가 계속해서 확산함에 따라, 대부분의 공공병원이나 상급의료기관에서는 보호자의 병원 출입뿐 아니라 자원봉사자모집을 중단한 상황이었으며 S병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코로나를 뚫고 어떻게 연구 대상에 접근할 수 있을까?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코로나 상황에서 단 한 번의 백신접종만으로 내가 병원 민족지를 수행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서 논문 학기 개강을 1주일 남긴 시점에 또다시 논문 주제를 바꿔야 하는 건가, 라는 멘붕 속에서 S병원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중, 난생 처음보는 글자를 발견했다. ‘무연고 환자’. 소식지에 따르면, S병원에서 이뤄지는 여러 돌봄 중 하나로 연고자와 연락이 닿지 않는 무연고 환자들의 장례를 돕거나, 그들의 가족을 찾아주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연고라는 말은 정확히 어떤 뜻일까?
인터넷에 ‘무연고’라는 세 글자를 검색하던 2021년 9월의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무연고의 정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연고의 개념은 (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아니라) 「장사등에관한법률」(이하 ‘장사법’)을 통해 정의된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한국의 ‘장사법’ 제12조는 (1) 연고자가 없거나 (2) 연고자를 알 수 없거나 (3)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기피하는 경우를 무연고사망자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현행 장사법 2조 16호에 따르면,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르는 자로써 ‘연고자’의 범위는 원칙적으로 배우자와 직계존비속 그리고 형제자매만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장사법에 의하면 조카나 며느리는 연고자가 될 수 없는데, 이 점에서 연고자의 범주는 민법이 규정하는 가족(779조, 직계혈족의 배우자)이나 친족(777조, 4촌 이내의 인척)의 범주보다도 더욱 협소하게 규정된다는 특징이 있다. 마찬가지로 현행 장사제도에 의하면 성소수자뿐 아니라 이성애에 기반한 사실혼 관계의 커플조차도 서로의 연고자가 될 수 없다(이소윤, 2023).
2. 공영장례와 시민상주의 경험
나는 이처럼 장사법과 무연고사망자의 정의에 대해 탐색하던 와중에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서울에서 무연고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무려 십년 가까이 치러온 NPO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서울시 NPO단체 ‘나눔과 나눔’은 서울시의 무연고사망자와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공영장례(public funeral)를 치러온 시민들의 결사체로, 이같은 무연고사망자에 대한 반복된 장례지원을 통해 한국 장사법이 허락하는 ‘합법적인’ 연고자의 기준이 터무니 없이 협소하다는 문제의식을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연구자가 한참 연구주제를 선정하던 2021년 가을은 마침 ‘나눔과 나눔’에서도 ‘가족 대신 장례’라는 용어를 통해 무연고사망자의 연고자가 아니더라도 유언에 따라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지자체가 지원하는 방법을 한창 홍보하고, 법제도의 개선방안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처럼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공영장례라는 복지제도가 자리 잡고, ‘가족 대신 장례’라는 새로운 권리 담론이 등장하기까지 ‘나눔과 나눔’의 지난 10여 년의 궤적을 살펴보는 일은 어쩌면 내가 그렇게 궁금해하던 ‘미래’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필요로 하는 ‘가족 돌봄’이 더 이상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시대에, 잘 살고 잘 죽기 위해 과연 제도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어떤 변화가 필요할지, 그 변화된 미래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로 ‘나눔과 나눔’의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혈연과 혼인 중심의 장례 제도가 지닌 불평등과 차별 문제를 여성학적 관점에서 학위논문으로 풀어보고 싶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낸 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직후였다. 사실 당시의 내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아이디어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진지하게 듣고 함께 고민해주었던 사람들은 언제나 ‘나눔과 나눔’의 활동가들이었다. 그날 이후로도 활동가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다정한 말들이 논문완성의 꾸준한 동력이 되어주었음은 분명하다.
내가 자원봉사활동을 위해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울시립승화원의 공영장례 전용 빈소(‘그리다’ 빈소)를 처음으로 방문한 날은 사무실에서의 첫 만남 이후로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나는 자원봉사자로서 이러한 ‘전용 빈소’에서 무연고장례식이 진행될 때면 ‘시민 상주’라는 역할을 통해 고인 예식에 참여하였다. 여기서 ‘시민 상주’란 무연고장례식의 고인 예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고인에게 술을 올리고, 고인의 위패를 ‘모시는’ 등의 모든 과정에서 고인예식을 수행(perform)하는 사람을 뜻한다. 고인의 가족이나 지인 등이 참석할 경우에는 조문객들이 직접 상주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조문객이 없는 날에는 자원봉사자들이 고인의 ‘시민 상주’가 되어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민상주들은 ‘나눔과 나눔’의 활동가들과 함께 공영장례의 빈소를 돌보는 사람이 된다. 무연고사망자들의 ‘가족’들이 빈소를 찾는 날에는 조문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을 챙기고 위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문객분들이 아무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빈소라는 공간에서 가만히 앉아 서로의 곁을 지키거나, 상투적인 말 한마디보다 따뜻한 음료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장례식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에는 고인예식에 쓰인 음식들을 가지런히 챙겨서 ‘나눔과 나눔’과 오랜 시간 인연을 맺어온 쪽방촌의 주민공동체에게 전달하고, 쪽방촌 주민들의 안부를 묻는 것까지 자원봉사자와 활동가들의 역할이 된다.
분명히 승화원이라는 장소 자체를 지배하는 감정은 슬픔과 애통함에 가깝지만, 이처럼 공영장례를 위한 전용 빈소라는 공간에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나누고, 서로의 아픔을 돌보는 시민들의 연대가 공존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의 관계성이란,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자선(charity)’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 나아가는 ‘보편복지’를 지향한다. 이 점에서 무연고 공영장례의 현장은 공동체의 ‘위험’을 인식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solidarity)를 통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과 자원을 확보해 나가는 실천을 특징으로 하는 상호부조(mutual aid)의 사례(Spade, 2020)로 의미화할 수 있다.
3. 관혼상제와 전통문화의 젠더정치학
그런데 내가 자료수집 과정에서 목격한 것은 공영장례의 현장뿐만이 아니었다. 승화원에 오가는 정말 많은 ‘정상 가족’들이 까만색 상복을 맞춰 입고서 당신의 ‘혈육’을 떠나보내기 위해 상조회사의 직원들과 함께 운구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운구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한쪽 팔에 하얀색 완장을 찬 채로 고인의 영정을 들고 있는 상주의 성별은 여전히 남성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한국의 가부장적인 장례문화의 역사는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학위논문의 이론적 배경을 작성하는 단계에서 자료조사를 하다가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가족 연구자 이효재(1990)에 따르면,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모계와 부계를 동시에 인정하는 양계친족제도가 존재하였으며 이때까지는 부계 혈연에 기초한 직계가족 중심의 삶과 죽음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특히 상장례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 시기에는 불교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오히려 자손을 대신하여 사찰과 승려들이 죽음 의례의 주관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효재, 1990: 15)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혼과 장례, 제사 등의 가정의례가 국가적인 관리와 개입의 대상으로 규범화되기 시작했던 시기는 「경국대전」이 편찬(1471년)되던 조선시대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당시「경국대전」의 상례에 관한 규정에는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수입되었던 당(唐)나라의 문화로서 오복제를 계승하여 그 내용을 구체화하고 있는데, “고려 오복제를 전승하면서 처부모와 외조부모에 대한 규정에서 친조부모와 현격히 차별하는 방향으로 차등을 두었(이효재, 1990: 17)”다고 한다. 또한, 조선의 경우 유교의 세계관에 기반하여 성리학을 통치의 원리로 삼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주자가례」의 규범과 원칙을 현실에 도입하고 시행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체계화되었다. 다시 말해, 한 집안의 장손이 상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습은 「경국대전」의 편찬 이후 조선시대 중후기에 접어들어서야 양반 계층을 중심으로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생각만큼 그렇게 길지 않은 장례문화의 역사를 어째서 아주 오래된 ‘전통’이라고 믿으면서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해온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식민지배 통치술이 조선의 가제도와 어떻게 착종되어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스트 법학연구자 양현아(2012)에 따르면, 일제식민지배 시기에 조선의 가제도가 전반적으로 재구성되는 과정은 “이미 존재하던 조선의 관습에 대한 왜곡보다 훨씬 더 ‘생산적인’ 것(양현아, 2012: 175)” 이었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의 문화를 말살하거나 왜곡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관습’으로 생각되는 문화에 대한 나름의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의 전통문화에 관한 일종의 ‘앎’(지식)을 생산해 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부계혈연을 통한 가계계승의 원리가 ‘한민족’의 전통이라고 보는 ‘앎’은 일본의 법체계를 조선에 이식하려던 일제의 통치자들과 당대 조선의 지배엘리트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생산된 역사적-정치적 담론이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조선의 관혼상제에 관한 규범은 일본 식민 지배를 통해 자취를 감추었다기보다는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근대화’되었다. 특히 상례에 관한 규범의 경우,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제정한 「의례 준칙」과 1912년에 제정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재규칙」에 의해 규제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의례 준칙」의 상당 부분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으로 계승된 바 있다. 한국 장례식의 변천사를 다룬 기존 논의에 따르면, 박정희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할 당시에 발표한 담화문의 내용은 ‘허례허식에 대한 비판’과 ‘조국 근대화 과업 수행’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일제가 「의례 준칙」을 발표할 당시 총독의 담화문과 두 가지 유사성을 공유하기 때문(박태호, 2006: 195-196)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가정의례준칙」은 30여 년이 지난 뒤 1999년에 제정된「건전가정의례준칙」으로 변모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가정의례에 관한 전통 규범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들이나 배우자가 상주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 혈연 중심주의적 관습만큼은 꾸준히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이는 현행 「건전가정의례준칙」에도 그대로 계승되어 가부장적 장례문화의 규범을 되풀이하고 있다(송효진 외, 2019). 관혼상제의 관습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며칠 동안 상을 치러야 하는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 지와 관련한 내용들은 ‘허례허식’을 이유로 하여 계속해서 간소화 되곤 했지만, 상주의 자격과 관련된 전통은 계속해서 보호받아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전통적’ 장례문화를 둘러싼 혈연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법 담론은 한국 가족제도의 역사에서 이미 주어진 ‘순수한’ 전통이 아니라, 조선시대 정치원리로서 성리학과 식민지배국의 통치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선택되어 살아남은 담론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4. ‘관계 단절’ 이후에 탄생하는 관계들
자료수집을 하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S병원의 수녀님과의 만남이었다. 내가 추가 자료수집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던 S병원의 수녀님의 경우, 병원에 오가는 무연고환자들을 여러 차례 돌보아온 경험이 있는 분이었다. 다만 수녀님께서는 공영장례라는 제도와 ‘나눔과 나눔’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계셨다. 나와의 인터뷰를 통해 ‘나눔과 나눔’을 알게 되신 수녀님께서는 혹시 S병원에서 돌보았던 환자도 승화원에서 공영장례로 떠나보낸 경우가 있지 않을지 궁금해하셨고, 장례지원기록에서 수녀님이 돌보았던 환자분의 이름을 확인해줄 수 있는지 여쭤보셨다.
나는 곧바로 ‘나눔과 나눔’의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부고문을 확인을 해보았는데, 놀랍게도 불과 1주일 전에 공영장례를 지낸 고인분 중 수녀님께서 찾으시는 바로 그 환자분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수녀님은 인터뷰를 진행하기 전까지는 ‘나눔과 나눔’의 부고문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셨기에, 만약에 이런 정보를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병원 사람들과 함께 영정사진이라도 챙겨서 공영장례 빈소를 찾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셨다. 수녀님은 아쉬운 대로 그날의 장례 현장이 담긴 ‘나눔과 나눔’의 사진기록이라도 받아보길 원하셨고, 인터뷰가 끝난 뒤 ‘나눔과 나눔’의 활동가에게는 수녀님의 연락처를, 수녀님에게는 ‘나눔과 나눔’의 연락처를 전달해드린 경험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날의 경험을 통해 내가 연구자로서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연결된 존재인가라는 자각이었다. 그동안 언론에서는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처럼 무연고사망자를 묘사하지만, 사실은 장사법이라는 제도가 갈라놓았기 때문에, 혹은 단순히 공영장례를 몰랐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었던 관계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실제로 논문을 쓰며 접했던 사례 중에서는 병원으로부터 시신을 인수하지 못한 사실혼 배우자가 언제, 어디에서 고인의 화장(火葬)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어서 하마터면 무연고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할뻔한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생각보다 많은 사람은 법률혼이나 혈연관계에 국한되지 않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삶을 의지할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사건을 준비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간병과 유언, 장례로 이어지는 돌봄의 실천)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분명히 ‘가족해체’라는 꼬리표만으로 포착할 수 없는 현실이며, 원가족과의 관계단절이라는 양상을 곧바로 ‘사회적 고립’의 증거로 삼는 방식과는 다르게 해석하고 접근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와 관련하여 퀴어가족정치학 연구자 김순남은 “원가족과 다른 관계성을 맺으려는 이들의 가족실천은 ‘나’로서 새로운 삶의 영역을 확보하는 과정인 동시에, 새로운 ‘우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된다(김순남, 2022: 61)”고 논한 바 있다. 1인가구의 증가와 이혼율의 상승이 관찰되는 21세기의 가족변동은 그 자체로 ‘외로운’ 삶의 증가를 의미하는 지표가 아니며, 원가족과의 관계 단절 이후에 새롭게 탄생하는 시민적 유대의 등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사법 상 연고자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는 비친족 상주들과 다양한 행위자들(‘나눔과 나눔’의 활동가들,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한 의전 업체의 장례지도사, 지자체별 무연고 장사업무 담당 주무관 등)의 상호작용을 통한 무연고 공영장례식의 현장은 이러한 새로운 시민적 유대가 가능하기 위한 제도적,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사유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원가족과의 관계 단절이라는 양상에 대한 다른 사유들, 다른 실천들이 더욱 풍부해질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연고 있는 죽음’과 ‘연고 없는 죽음’의 구분 자체가 불필요한 사회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참고 문헌
- 김순남(2022). 『가족을 구성할 권리 – 혈연과 결혼뿐인 사회에서 새로운 유대를 상상하는 법』. 서울: 오월의봄.
- 박태호(2006). 『장례의 역사: 고인돌부터 납골당까지, 숭배와 기피의 역사』. 파주: 서해문집.
- 송효진·선보영·최진희·성경·박수경(2019). 『가부장적 가정의례 문화의 개선을 위한 정책방안 연구: 장례문화를 중심으로』. 서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 양현아(2012). 『한국 가족법 읽기 – 전통, 식민지성, 젠더의 교차로에서』. 서울: 창비.
- 이소윤(2023). “무연고사망자의 ‘상주 되기’를 통해 본 사후(死後)의 가족정치”, 『한국여성학』, 제39권 1호, 101-136쪽.
- 이효재(1990). “한국가부장제의 확립과 변형”, 『한국가족론』. 서울: 까치.
- Spade, D.(2020). “Solidarity Not Charity : Mutual Aid for Mobilization and Survival”, Social Text, 142, 38(1), pp.131-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