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온

1.
2017년 수잔 팔루디의 『백래시』가 한국에 번역 출판된 이후, ‘백래시backlash’ 개념이 부쩍 논의되기 시작했다. 백래시를 주제로 한 페미니즘 강연이나 세미나가 꾸준히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으며, 트위터 등 SNS에서는 백래시라는 단어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백래시’를 둘러싼 열띤 논의는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의 상황과 맞물려 있다. 2015년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일터, 학교,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메갈’ 혹은 페미니스트를 색출 및 검증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2016년 미투 국면 이후 성범죄 무고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라고 외치는 남성 집단이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기 위한 사회 전반적인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백래시’라고 할 만하다. 이와 같은 국면에서 ‘백래시’의 빠른 수용과 광범위한 유통은 이 개념이 동시대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안티페미니스트들의 거센 공격을 설명하고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 한국의 SNS 상에서 이루어지는 백래시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면 이 용어는 주로 기존 사회가 구성해 놓은 ‘여성성’을 수용하고 수행하는 행위를 지칭할 때 쓰인다. 이러한 용례에서 ‘백래시’는 주로 여성 개인의 꾸밈이나 결혼을 가리킨다. 이들 행위는 사회가 지정해 놓은 ‘여성성’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옹호하기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이 지향하는 바와는 근본적으로 배치背馳된다고 여겨진다. 더 나아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 행위자를 지칭하는 데 ‘백래시’에 접미사 ‘-er’을 붙인 ‘백래셔backlasher’라는 신조어가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최근 한국의 맥락에서 ‘백래시’라는 말은 페미니즘 운동을 무화시키기 위한 사회적인 움직임과 페미니즘 운동의 목표에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개개인의 행동을 모두 지칭하는 데 쓰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연 사회적인 움직임과 개개인의 행동이 ‘백래시’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 묶일 수 있는가? ‘백래시’를 둘러싼 말들의 범람 속에서 개념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백래시’라는 말이 지칭하는 대상이 너무나도 많고 다양한 현재의 논의 지형 속에서, 우리는 다시 “대체 ‘백래시’가 뭐길래?”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사실 팔루디의 『백래시』가 사례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서술된 탓에, 백래시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본 기획의 변에서는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하기 앞서, 먼저 팔루디가 제시한 반격의 의미를 밝히고 이 개념에 얽힌 오해를 해소하고자 한다.
팔루디에 따르면, 백래시는 “여성운동이 어렵사리 쟁취한 한 줌의 작은 승리를 무력화하려는 노력”이자,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강력한 역습, 반격”이다(Faludi, 2017: 42). 그리고 여기에서 반격은 개별적인 행동 각각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사회정치적인 현상 전반에 관한 것이다. 여성들이 평등을 달성하기 위한 운동을 펼 때 마다 그에 대항하는 반격의 움직임이 일어나 왔는데, 그중에서도 팔루디가 특히 주목하는 반격의 시대는 1980년대이다. 미국의 80년대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 활발했던 제2물결 여성운동의 ‘이후’로 표지되는 시간으로, 신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대이다. 이때 미국 사회는 언론과 대중문화를 통해 여성의 불행을 페미니즘 탓으로 돌리고, 여성들에게 가족의 가치와 성역할을 재주입시키고자 했다. 팔루디는 『백래시』에서 미국의 여성운동에 대응하여 나타난 반격의 움직임을 주로 대중문화의 사례를 통해 증명한다. 그리고 반격의 ‘기원’으로 정치 영역에서의 선전과 선동을, 반격의 ‘결과’로 여성 개인에 미친 영향을 차례로 분석한다.
반격의 대표적인 사례로, 미디어는 ‘불임 유행병’이 돌고 있다고 떠들면서 직장 여성들에게 어서 가정으로 (돌아) 가라고 종용했고, ‘남자 품귀 현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면서 싱글 여성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이러한 반격의 기원으로서 정치적 뉴라이트는 페미니즘 언어를 전유하면서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는데, 여성운동이 성취한 임신중절 권리에 반대하면서 ‘생명 친화적pro-life’이라는 표어를, 여성들의 직업 시장 진출에 반대하면서 ‘모성 친화적’이라는 표현을 내세우는 식이었다(같은 책: 373). 이렇게 뉴라이트는 보편의 가치를 점유하면서 페미니즘의 의제를 특수의 자리로 깎아내리고, 젠더 불평등의 현실을 무화시켰다. 무엇보다 이 담론들은 여성들에게 내면화되어 그들 스스로 페미니즘의 의제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1990년대 ‘포스트페미니즘’의 시대를 도래하게 한 것이다.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서 이루어진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은 여성들이 “여자들은 (페미니즘 없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포스트페미니즘의 테제를 내면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리하자면, 80년대 미국 대중문화에서 드러난 반격의 사례들은 뉴라이트의 정치적인 선동을 통해 강화되고 가속화된, 여성운동에 대한 사회 전반의 반동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대중문화가 암시하는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수행하게 된 것은 반격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다시 말해, ‘백래시’는 페미니즘의 문제제기와 정치화를 무화시키고 역사의 시계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자 하는 사회정치적인 현상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이지, 여성들의 개별적인 행위 각각을 설명하는 용어가 아니다. 무엇보다 백래시는 여성들의 개별적인 행위 하나하나가 페미니즘에 반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사회가 이미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이기 때문에 일어난 반작용과 같은 현상이다. 개별적인 행위 각각을 백래시로 규정하는 것은 “반격이 가진 대응이라는 본질, 다른 힘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그 본질”을 놓치게 한다(같은 책: 46).
2.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는 페미니즘을 논의하는 주요한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백래시에 대한 논의는 앞서 언급했듯 결혼이나 꾸밈 등과 같은 개인의 구체적인 행위나 선택이 백래시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 행위가 페미니즘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데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더 나아가 ‘페미니즘의 진보를 후퇴시키는 행위’라는 뜻으로 백래시를 사용하면서, 운동의 지정된 목표에 어긋나는 행위나 선택을 한 개인들을 ‘백래셔’로 라벨링하고 이들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서 ‘백래시’와 ‘백래셔’는 페미니즘 운동의 ‘성공’을 위해 사라져야 하는 것, 개인의 결단과 선택을 통해 사라질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처럼 ‘백래시’ 개념을 개인의 행위나 선택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게 되면, 페미니즘의 목표는 각 개개인이 특정한 행위나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써 간단히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개인의 행위는 그것이 놓인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며, 언제나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는다. 페미니즘은 그 행위가 놓인 맥락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로부터 해방적인 가능성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이지, 그 행위 자체를 금지하고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어떤 선택이나 행위가 백래시가 맞는지 아닌지, 그 행위자가 페미니즘의 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반격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정치적 맥락에 대한 분석이다. 의미가 만들어지는 사회문화적 과정을 살피지 않은 채 어떤 행위를 옳고 그름의 이분법에 가둔다면, 페미니즘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해 상상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Fwd 창간호 「백래시」는 ‘백래시’라고 일컬어지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된 사회정치적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 호의 필진들은 백래시에 대한 비판이 개인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의 행위를 조건짓고 개인의 행위에 의해 변화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 기획 「오세라비는 ‘어떻게’ 떴나?」에서 낑깡은 오세라비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 주목한다. 한국 페미니즘을 ‘백래시’로 진단한 오세라비의 발언을 분석함으로써, 그가 공론장에서 ‘발화 권력’을 얻게 된 맥락을 살핀다. 두 번째 기획 「총여학생회 폐지에 관한 소고」에서 상상과 미현은 최근 연이은 총여학생회 폐지 흐름에 주목한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활발해진 대학 내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라고 볼 수 있는 이 현상에 담긴 정치적 의미를 분석하고, 폐지 이후를 상상한다. 세 번째, 젊은쥐의 글 「베일은 언제 어디서나 백래시인가」는 ‘백래시’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 쓰기 실천에 얽힌 역사적 맥락을 밝히면서, 베일 쓰기가 갖는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송유진의 글 「탈코르셋과 이분화된 몸」은 최근 ‘탈코르셋’ 운동을 둘러싼 서사의 획일성을 문제삼으면서, 몸들과 그 몸들의 실천을 규정하는 이분법 너머를 상상할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기획들을 통해 Fwd의 필진들은 동시대 한국의 주요 페미니즘 이슈를 기록하고, 그에 비판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생산적인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한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페미니즘의 이론과 언어가 논쟁을 종결시키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논의를 시작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앞으로의 기획 또한 독자들에게 그와 같은 시도로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참고 문헌
- Faludi, Susan(1991). Backlash: The Undeclared War Against American Women, NY: Crown Publishing Group, 황성원 옮김(2017), 『백래시: 누가 페미니즘을 두려워하는가?』, 파주: 북이십일 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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