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 ☁️미현

오늘날 학생 사회는 위기에 처했다고들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학생 사회 ‘위기담론’은 여전히 대학가를 맴돌고 있다. 많은 대학에서 투표율 미달로 학생회 선거가 무산되고, 학생회가 학교 밖의 정치사회적 의제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학생들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등 학생 사회 ‘위기담론’은 학생회의 역할 및 학생회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기로 지목한다.
지난 2월 논란이 되었던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도 ‘위기담론’의 연장으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은 존중하지만 중앙도서관만은 파업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라고 요구했다. 총학생회의 요구는 질타를 받았고, 총학생회는 입장을 선회하여 노동조합 파업에 연대를 선언했다. 하지만 총학생회의 초기 입장처럼 학생들만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로 스스로를 협소하게 규정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협상력을 약화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가지고 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본 글은 서울대 총학생회의 행보와 같이 나타나는 학생 사회의 ‘위기담론’을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학생 사회의 ‘위기담론’을 비판적으로 재고하며 ‘탈정치화’된 이들이 만들어내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탈정치화’란 정치적으로 분석되고 해결책이 논의되어야 할 문제가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어 정치적인 문제로 제기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시설노조의 파업을 구조적 문제에 대항하는 행동이라기보다는 ‘존중할 수 있는’ 사적인 행동으로 간주한 것처럼 말이다.
한편 지난해 수도권 대학에서 이슈가 되었던 총여학생회 폐지 과정에서는 정치적 수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정치적 무관심, 투표율 무산 등 학생 사회의 ‘위기담론’이 지목하는 ‘개입하지 않는’ 탈정치화 현상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점에서 본 글은 총여학생회의 폐지 과정을 통해 ‘탈정치화’된 주체들이 가진 정치에 관한 인식과 그들이 실천하는 정치가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위기담론’ 이후의 학생 사회와 대학페미니즘의 미래를 상상하고자 한다.
1. 총투표=민주주의?
2015년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페미니즘이 학내의 중요한 이슈로 등장한 이 시점에 ‘총여학생회 폐지’ 흐름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지난 몇 년 간 ‘페미니즘’은 대학 사회에 파열음을 내는 키워드가 되었다. 대학의 페미니스트들은 ‘남톡방 성희롱 사건’을 공론화했고, 오로지 남성뿐인 학과 교수진을 비판하고 여성 교수 충원을 요구했으며, 성폭력 가해 교수에 맞서는 기자회견을 열고 교수 연구실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의 파열음은 환영받지 못했다. 학내 페미니스트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총여학생회(이하 총여)’라는 학내 여학생 대의기구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과 투쟁은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학내에서의 ‘불편한’ 위치를 잘 보여준다. 2018년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세 개 대학에서 총여학생회 폐지 총투표가 진행되었고, 총여 폐지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총여를 지키거나 새로 세우려는 학생들이 대립했다.
결국 지난해 서울 내 세 학교에서 총여학생회를 폐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실상 서울 내 모든 대학교에서 총여가 사라졌다(경과 보기).[1] 세 학교의 총여학생회가 없어지게 된 계기와 과정은 모두 다르지만, 각 학교에서 총여학생회 폐지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학생 총투표’라는 형식을 채택하여 총여학생회 폐지를 주도했다. ‘총투표’는 마치 논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민주적인 방법인 것처럼 제시되었다. 심지어 연세대 총여학생회 재개편 추진 위원회는 연세대학교 학생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이한열 열사를 소환하면서, 총여 폐지에 대한 논의가 곧 민주주의의 실천이라고 내세우기도 했다.
[1] 연세대는 재개편 사태 이후, 총학생회 산하가 아닌 독립자치기구로 총여학생회를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 에브리타임 게시물 중에서 / 2018.5.23 게시된 글
‘학생 총투표’라는 제도는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모든 재학생들이 직접 안건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일환으로 도입되었다. 그러나 각 학교에서 총여학생회의 존폐 여부를 두고 학생 총투표를 시행하기로 결정하는 과정, 총투표가 발의된 이후 투표가 진행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 직접민주주의 의사결정은 찾아볼 수 없다. 다음은 총여학생회 재개편 총투표 안을 결정했던 연세대 중앙운영위원회(이하 중운위)의 속기록을 발췌한 내용이다.
“총여학생회가 있(어야 하)고 존재해야 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백번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런 부분을 떠나서 이 안건 자체가 총투표가 발의가 된 만큼, 중앙단위의 단체로서 (중운위는) 투표를 진행할 때 안건이 어떠하든 중립에서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세대학교 제15차 중운위 속기록, 2018. 5. 28)
이처럼 중운위 회의에 참여한 어느 누구도 총여학생회를 폐지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총여학생회가 존재해야 하고 (그) 필요성에 대해서 백번 공감”하지만, 전체 재학생의 1/10이 총투표 발의를 요청했기 때문에 무조건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건의 내용과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논의조차도 하지 않은 채 ‘안건이 어떠하든’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내 자치기구가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그저 다수의 학생들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한계 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세 학교 모두 총투표 과정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총회나 토론회가 공개적으로 열리지 않았고, 투표가 시행되기 전 캠퍼스에서 공고를 확인할 수 있는 기간이 하루밖에 되지 않아 투표가 졸속으로 이루어진 학교(동국대)도 있다. 한 학교에서는 총투표 안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총여학생회를 폐지를 원하는 학생이 (총여학생회 폐지에) 반대표를 던지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2편에서 언급하겠지만, 논의의 장은 ‘에브리타임(학교별 시간표 어플)’으로 대체되었다.
공론장의 부재 속에서, 총투표는 오히려 안건 발의의 책임자를 감추어버리는 장치로 기능했다. 동국대의 경우 총투표를 발의하는 서명은 익명으로 진행되었고, 서명에 참여하거나 주도한 그 누구도 개인으로서 드러나지 않았다. ‘총투표’라는 절차만 강조되면서 총여학생회 폐지를 원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총여학생회가 어떤 역할을 하며 총여 폐지가 학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논의 또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표를 통해 “총여학생회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우”[2]는 다수의 학생 중 일부로 감추어졌고, 학생회는 스스로를 ‘기계적 중립’의 위치에서 학생들의 대변자로 자임하면서 정치적 책임을 방기했다.
[2]성균관대 학생회장단은 ‘‘총여학생회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학우들이 많기 때문에 이 기구의 존속 여부를 결정하는 총투표가 필요”하다며 총투표 폐지 안건을 발의했다.
2. 고객님들의 학생회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아이리스 영(Iris M. Young, 1949 ~ 2006)은 사회정의에 관련된 문제가 ‘탈정치화’되고, 이 과정에서 공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구조적 모순이 은폐되는 현실을 현대 정치가 당면한 문제로 제기한다(Young, 1990).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인 것’을 수행하는 공적 기구와 공적 제도는, 서로의 이익에 관련한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그 의견을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다원주의를 보장하는 역할로 협소하게 정의된다. 이는 얼핏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치 과정이며,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논할 수 있는 조건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다원주의는 사실상 정의에 관한 공적인 논의를 배제하며 따라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최근 많은 대학의 총학생회는 공약으로 더 나은 복지혜택을 내건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축제에 얼마나 유명한 연예인을 부르는지가 총학생회 사업의 성공의 지표로 꼽힌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생회의 활동은 유권자 학생들을 위한 서비스를 얼마나 잘 제공하는지에 따라서, 그리고 재학생들의 직접적인 이익과는 상관없는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할수록 그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처럼 공적 문제들이 탈정치화되고 있는 대학 공간 안에서 ‘너무 정치적’이라는 수사는 학생회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총여 폐지 과정에 앞장선 총대의원회의 서명 요구안
동국대학교 총대의원회가 제안한 ‘총여학생회 폐지 투표안’은 어떻게 총여학생회의 역할과 활동이 조직적으로 탈정치화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총여학생회 폐지를 제안하는 주요 근거 중 “시대적 흐름에 따른 총여학생회의 역할과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실질적 운영 성과 부재”라는 항목에서 특히 드러난다.
총여학생회는 ‘대학 내 성평등’이라는, “실질적”인 성과로 평가하기 매우 어려운 추상적인 가치를 운영 목표로 하는 기구이다. 이를 위해 동국대 총여학생회는 지난 한 해 동안 반(反)성폭력, 반(反)성차별과 관련한 강연회를 꾸준히 개최하고, 여학생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경찰과 협력하여 불법촬영 장비를 직접 탐지하거나, 축제 등의 행사에 자치규약을 배포하고 순찰 매뉴얼을 작성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국대학교 총대의원회가 제기한 ‘총여학생회 폐지 투표 요구안’은 그간 총여학생회의 행보를 ‘정치적 세력화’ 또는 ‘사법기관화[3]’로 일축해버렸다. ‘대학 내 성평등’이라는 총여학생회의 존재 목적에 충실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총여 폐지의 근거로 활용된 것이다. 이처럼 총여 폐지론자들은 총여학생회의 활동을 ‘여학생’만의 이익을 위한 활동으로 규정한다. 성차별은 구조적 문제이며, 공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탈정치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 학교에서 총여 폐지론자들이 ‘민주주의’를 총여학생회를 폐지해야 한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으나, 이는 첨부한 폐지 과정에서도 살펴보았듯 절차적으로도 정당하지 않으며, 그 내용도 허울뿐인 민주주의에 불과하다.
[3] 동국대학교 총여학생회는 ‘반성폭력’을 기조로 활동해왔다. 사실상 학생 자치기구인 총여학생회에는 사법기관과 같이 성폭력 가해자를 처벌할 권한은 없다. 그러나 총대의원회는 학내 혹은 학교 학생이 관련된 성폭력 사건을 공식화하고, 성폭력이 발생한 맥락을 환기하는 등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 총여학생회가 개입한 것을 들어 ‘사법기관화’라고 지칭하고 있다.
3. 백래시?
2018년 총여학생회 폐지를 겪은 세 학교 페미니스트들의 합동 간담회는 총여학생회 폐지 과정에서 내용과 절차적 비민주성을 지적하며 “그 민주주의는 틀렸다”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지난해 총여학생회 폐지 풍파를 겪었던 동국대 31대 총여학생회 회장 원정은 일련의 총여 폐지 과정에 대해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으로 (폐지론자들이) 그것을 허용했다”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실제 총여학생회 폐지 과정이 민주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이 학내에서 얼마나 인지되었는지는 확인할 순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허용되었고, 이익집단의 요구를 위해 정치적 수사들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서울대 총학생회의 중앙도서관 난방 공급 요청과 총여학생회 폐지 요구는 서로 다른 사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거울 쌍이다. 한 쪽에서는 파업에 대해 ‘존중하지만 피해는 감수할 수 없다’는 탈정치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파업의 입지를 좁히는 정치적 효과를 발휘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정치적 수사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구조적 문제인 성차별을 은폐하여 이에 대한 공적 논의를 소거하는 탈정치화 현상이 나타났다.
총여학생회 폐지 총투표는 ‘위기담론’ 이후 탈정치화된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지금의 대학은 이익집단화된 주장과 과정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통용될 수 있는 시공간이 되었다. 그 속에서 가장 먼저 총여학생회가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별로 특별하지 않다. 1980년대 미국의 페미니즘 백래시가 뉴라이트 정치와 함께 왔듯, 학생 사회에서 총여학생회가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서막에 불과할 수 있다.
(다음주 2편에서 계속)
참고 문헌
- Young, Iris M.(1990).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김도균·조국 옮김(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서울: 모티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