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SIWFF] 개막작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대담

영화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테오나 스트루가르 미테브스카 감독, 2018) 포스터

올해로 21회를 맞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와 ‘20+1, 벽을 깨는 얼굴들’이라는 슬로건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총 31개국에서 출품된 119편의 영화 중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모습을 담은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가 개막작으로 상영되었습니다. 2014년에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이 영화는, 마케도니아의 한 마을 슈티프에서 행해지는 ‘구세주 공현 축일 이벤트’에서 한 여성의 돌발 행동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줍니다. 성직자가 강물에 던진 십자가를 잡으면 행운을 얻는다는 이벤트는 ‘남자’에게만 열려있는데, 주인공 페트루냐는 여성으로서 그 벽을 깨고 십자가를 쟁취합니다. 남성 참여자들과 지역 공동체는 그 십자가를 빼앗으려 하고 그녀를 비난하지만, 페트루냐는 십자가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죠. 이러한 페트루냐의 행보,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 필진들은 어떻게 느꼈는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참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홈페이지)

1. 십자가를 쥔 여자, 페트루냐    

상상 : 영화 어떻게 보셨나요?

낑깡 : 제목을 생각해보면, 페트루냐와 예수를 비유하는 대사들이 있던 거 같아요. ‘물 위를 걷는다’, ‘지가 예수야?’, ‘만약 신이 여자였음 이게 가당키나 하겠어?’ 등.  

강물 : 맞아요. 영화 앵글이나 특정 장면을 제목과 엮어서 생각해볼 때 페트루냐를 예수가 처했던 상황이랑 비슷하게 묘사하려 했다고 느꼈어요. 페트루냐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나설 때 남자들 무리 속에서 침을 맞고 욕설을 듣는 장면은 마치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하기 전에 군중 속에서 핍박받는 모습 같았어요. 페트루냐가 여자라는 점이 뭐가 그렇게 다르고 틀리다고 할 수 있는지. 단순히 여자라는 사실 때문에 신성하지 않게 되는지 묻는 기자의 말에서도 드러나죠. 신성한 전통은 언제부터 ‘신성’했고, 어떻게 ‘전통’이 된 건지 관객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닐까요?

미현 :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훔쳤다’라고 [주변에서] 표현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자격 없는’ 사람이 잡았기에 훔쳤다고 생각하는 느낌이에요. 십자가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에서 여성들이 뭔가를 차지하거나 [요직에] 앉았을 때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견들이 작동하는 거죠.

강물 :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잡은 순간에도, 참여한 남자들은 여자가 십자가를 잡을 수 없다며 욕을 하고 ‘성스러운’ 교리를 운운했잖아요. 하지만 말만 앞서다 예수에게 꾸중을 듣는 성경 속의 율법학자들처럼,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었어요.

미현 : 그 대회에 참가한 청년들이 정말 독실했을까요? 영화에서 신부가 의식을 거행할 때에도 신부에게 빨리 십자가나 던지라고 재촉하는 걸 보면 그들에게 십자가를 잡는 행위는 단지 남성적인 ‘명예’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었겠죠.

만두 : 항상 하던 동네 행사에서 1등 하고 싶은 마음 아닐까요?

낑깡 : 페트루냐가 처음 경찰서에서 십자가를 들고나올 때 남자들이 욕을 하고 물을 뿌리는 등 폭력을 행사하잖아요. 그때 십자가의 의미가 페트루냐와 남자들에게 동일하게 보이지 않았어요. 십자가를 누가 쥐는가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된다는 거죠. 여성들이 남성적인 의미 체계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쟁취했을 때, 그들에게 쏟아지는 사회적인 비난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장면이라 생각해요. 

2. 페트루냐의 십자가와 모순들

만두: 빼앗긴 게 없을 때 종교가 보여주는 관용과 배려는 점차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는데요. 강에서는 신부님이 저 여인[페트루냐]에게 십자가를 돌려주라고 했는데, 이후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돌려주지 않을 걸 알게 되니까 [신부님은] 점점 초조해지며 언어를 잃어 가죠.

낑깡: 신부님이 너무 웃기는데,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잡은 사건이] 종교에 대한 모욕이라며 페트루냐를 설득하려다가 실패하고. 서장은 페트루냐를 고소해야 절차가 진행될 수 있다고 하는데, 신부는 거짓말을 못 하니까 서장한테 해결을 미루고. 페트루냐가 위법 행위를 한 것이 아닌데,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라도 십자가를 돌려받아야 하는 모순이 반복되고.

오온 : 남자들이 경찰서 유리창을 깨자마자 그들을 경찰이 제압한 건, 그 경찰들이 정말 원칙주의자라는 것이죠. 체포할 명분이 생겼으니까. 그런데 페트루냐를 어떠한 원칙과 근거도 없는데 계속 잡아 두잖아요. 젠더가 무엇이냐에 따라 받는 다른 불합리한 대우를 계속해서 대비 시켜 보여주는 거죠.

상상 : 페트루냐가 만났던 검사의 말도 모순적이었어요. 페트루냐에게 인종, 종교 혐오, 국가 모욕의 죄를 물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걸 유발한 건 페트루냐가 아니죠. 이러한 장면들은 마케도니아의 법적, 종교적, 공적 체계가 젠더화되어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어요. 신부도 그렇고, 경찰도 그렇고, 검사까지. 페트루냐라는 여성이 진입한 순간, 이 체계들이 비정합적으로 어그러진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낑깡 : 결국 경찰이 금고로 십자가를 빼앗잖아요. 무언가를 할 수 없으니까 손 쓸 수 없는 곳에 보관하지만, 이게 정당화될 수 없으니까 결국 페트루냐에게 십자가를 다시 돌려주죠. 그리고 마지막에 경찰서를 나서면서 페트루냐가 신부님에게 십자가를 휙 돌려주고, 신부님은 고맙게 받아들이며 이 모순을 해소하고.

오온 : 우리나라였으면 경찰관이 페트루냐에게 폭력을 가해서라도 십자가를 빼앗았을 거로 생각해요. [우리나라였다면] 사적 소유의 차원에서 공권력이 강제적으로 개입했을 텐데, 영화상에서는 금고에 십자가를 넣으며 소위 ‘귀여운 사기’를 치죠. 그런데 페트루냐를 체포하고 그녀에게서 십자가를 빼앗을 아무런 정당성이 없으니 경찰이 계속해서 종교에 정당성을 요청하는 모습을 볼 때, 이 나라의 특수한 맥락이 있겠구나 싶었어요.

만두 : 한국은 되게 세속화되어 있죠. 종교가 막강한 이익 집단의 형태로 국가권력과 공존하는 식으로요. 반면 마케도니아는 국가권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종교를 내면화해서 일체화되어있는 느낌이에요. 우리나라 경찰은 기독교의 눈치를 본다면, 이 나라[마케도니아]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남자들이 정교회 자체인 듯해요. 

3.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잡은 이유?

낑깡 : 한편 기자의 재치도 웃겼어요. 남자들이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훔쳤다고 하자, 기자가 ‘작년 우승자가 여자였다’고 하니 남자들이 부정하며 여자가 올해 처음 ‘잡았다’고 표현하죠. 그 순간 남자들은 여성인 페트루냐가 십자가를 정정당당하게 쟁취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요. 기자가 페트루냐에게 여러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도 흥미로웠어요.

상상 : 페트루냐의 돌발을 가부장제, 성차별, 저항 프레임으로 끼워 맞추려고 하는데, 이런 장면에서 연구자의 모습이 객관화되어 보여 너무 웃겼어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객관화하고.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때 여기저기 “이건 성차별이야!”하고 지적하던 기억도 나고요. 당사자들은 별생각 없는데 말이죠. (웃음)

낑깡 : [이렇게 다양한 의미가 경합하는 가운데] 막상 페트루냐의 엄마가 바라는 건 소박했어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에 관해 얘기하기보다, 페트루냐가 취직을 해야 한다고 [뉴스에서] 말하는 게 너무 웃겼어요.

만두 : 말을 하기 위해 세팅을 했는데, [사실은 그런 의도가] 엇나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미현 : 경찰이 페트루냐에게 [십자가를 잡은 이유가] 도발이었냐고 물으니까 페트루냐는 아니라고 하잖아요. 검사도 와서 그런 행동이 혐오를 유발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정작 페트루냐는 ‘나도 행운 좀 잡아보자’라는 느낌이었어요. 후반부에서는 기자와 연대를 이뤄내는 뻔한 결말이 될까 하고 봤는데, 아니어서 좀 더 뻔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오온 : 저는 제목만 보고 페트루냐가 기적을 일으키는 스토리일 거라고 예상했었어요. 그런데 생각지 못한 전개와 결말이었던 것 같아요. 이 영화가 ‘뻔한 가부장제 고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기 위해 기자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가 계속해서 메타적인 시점을 텍스트 안에서 가져가며 소격 효과를 만들어내잖아요? [‘가부장제의 단면’이나 ‘저항’ 같은 키워드를] 기자의 입을 통해 발화하면서, 관객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자기 의식적인 모멘트를 환기하게끔 만드는 것이죠. 단순히 남자들이, 가부장제가 어떠하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텍스트 내에서 계속 말해줌으로써 영화에 완전히 감정 이입하기보다 거리를 두도록 하는 거죠. 실화 기반의 영화이기 때문에 리얼리즘을 가져가되, 여기에서 어떻게 위트를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감독의 계획도 엿보이고요. 

4. 소회

여느 날처럼 구직에 실패한 페트루냐는 군중에 떠밀려 강가에 다다릅니다. 그때는 마침 강가에 던져진 십자가를 찾는 이에게 행운과 번영을 약속한다는 ‘구세주 공현 축일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죠. 이날만을 고대하며 잔뜩 흥분한 남자들과 달리, 페트루냐는 우연히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얼떨떨하며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성직자의 손을 떠난 순간, 차디찬 얼음물을 헤치고 행운을 거머쥔 사람은 여자인 페트루냐였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여자’가 십자가를 잡은 에피소드는 매우 이례적이며, ‘일탈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가져간 페트루냐를 찾기 위해 경찰은 마을을 수색하고, 그녀를 경찰서에 데려갔습니다. 신부와 경찰은 온갖 달콤한 말과 협박으로, 남자 참가자들은 ‘더러운 년’이라 욕하며 페트루냐에게서 십자가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페트루냐는 그럴수록 위축되지 않고, 때로는 받아치며 자신의 행운을 지켜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경찰서를 나서며, 여유로운 눈빛과 함께 십자가를 신부에게 돌려주죠.

서른 중반에 반듯한 직업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페트루냐는 집안에서 골칫덩어리였습니다. 페트루냐의 탁월한 학업 성적은 일터에서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녀는 남들에게 뒤처진 패배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훈련된 남자들을 뒤로하고, 단번에 행운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그녀는 누구보다 빛났습니다. 종교를 기반으로 세워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페트루냐는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여성으로서 금지된 십자가를 잡은 ‘작은’ 행동은,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 유약한 벽에 금을 내고 깨뜨렸습니다.

문득 예루살렘의 성전을 뒤엎은 예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밀려드는 순례자들의 돈에 눈이 멀어 점점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 되었던 예루살렘의 성전은 더는 백성들을 위한 축제의 장이 아니었죠. 그러자 예수는 거침없이 상을 둘러 엎으며, 사제들의 독식을 호되게 꾸짖습니다. 힘과 권력으로 성전을 장악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예수에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케도니아의 ‘십자가 사건’에서 신은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은 존재한다, 그녀의 이름은 페트루냐.”

정리 : 강물, 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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