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환영하며: ‘피해자다움’과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하여

2019년 9월 9일, 대법원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유죄를 확정하여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1심에서는 “여성이 자유의사를 제압당하지 않고 성관계를 가진 뒤 나중에 상대방의 처벌을 요구하는 건 스스로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인하는 행위”로 판단하여 무죄를 선고한 반면, 2심과 대법원 판결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공/사적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을 인정하여 1심의 판결을 뒤엎었다. 사법부는 1심에서 안희정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 참조할 법이 없다며 입법부에 책임을 돌리기도 했으나, 대법원은 결국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사법적 틀 내에서도 확실히 ‘성폭력’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안희정 사건의 판결은 한국 사회에서, 특히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우선 위력, 성적자기결정권, 성인지감수성 등의 용어가 사법부에서 전면적으로 언급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법정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통로가 확장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사건의 구체적인 정황에 따라 ‘피해자다움’의 양상이 언제나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음을 짚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한편 이 사건에 그간 쏟아진 ‘꽃뱀설’, ‘정치공작설’, ‘불륜설’ 등의 근거없는 2차가해는 우리 사회가 성폭력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에 담긴 성차별적인 편견을 폭로하고 성인지감수성을 함양해야 함을 드러냈다. 이를테면 가해자의 아내가 음모론을 제기하는 주체로 등장한 순간, 성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불륜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뒤바뀌었고 언론은 이 여성 가해자 – 여성 피해자의 구도를 자극적으로 재생산해냈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사건 판단에 있어 중요한 준거점이 되지 않았으며, 성폭력을 가능케 한 권력의 문제는 도외시되었다. 이는 여전히 한국 사회가 성폭력을 가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법적 판결에서 더 나아가, 성폭력을 둘러싼 의미투쟁의 문화정치 또한 필요하다.

‘미투운동’의 주체로 등장한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의 의미를 구성하는 법적 기준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미투운동의 결실 중 하나인 이번 대법원 판결은 피해자 여성들이 공적 통로를 거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대한 이번 판결을 환영하며, 성범죄를 해석하는 법리해석의 기준을 재고하기 위한 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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