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귤희

본 글은 ‘2019 페미니즘 연구-활동가 여름캠프 <페미니즘X페미니즘>’의 ‘몸/성/노동’ 세션에서 발표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1. 서문
2019년 현재 ‘자기관리’는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여성들의 몸은 ‘자기관리’라는 이름으로 취업을 위해서라도 체중을 감량하거나 화장술을 통해 자신을 꾸미기를 요구받는다. 이에 대응하여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몸에 대한 ‘자기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몸에 신경 쓰기보다는 영어학습, 재테크 등에 집중하면서 커리어를 쌓아가는 것에 집중해야 여성이 사회적 억압의 굴레에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몸에 제한된 ‘자기관리’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관리’로 돌아가자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몸 대신 커리어에 집중하자는 ‘탈코르셋 운동’에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직업군들에서는 몸을 관리하는 것과 커리어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여성의 몸은 프로페셔널함의 지표가 되기 때문에 몸에 대한 ‘자기관리’는 곧 자신의 유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때 “몸이냐 커리어냐”라는 양자택일은 불가능하다. 몸이 곧 커리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관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여전히 ‘자기관리’라는 담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애초에 ‘자기관리’라는 담론은 어떤 의도와 지향 속에서 형성된 것일까? 그리고 “몸이냐 커리어냐”라는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한 양자택일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는가?
2. 1990년대 ‘자기관리’ 담론 형성의 정치경제적 맥락
연도 | 1970-1979 | 1980-1989 | 1990-1999 | 2000-2009 | 2010-2019(8월 현재) |
‘자기관리’ 용어가 등장한 기사 수 | 30 | 122 | 608 | 1,516 | 3,908 |
1970년대부터의 기사 검색을 위해서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서비스를 사용하였다.
검색의 대상이 된 신문사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겨레이다.
<표 1>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자기관리’라는 용어는 1990년대에 1980년대에 비해 5배가량 증가한다[1]. 이처럼 언론에서 ‘자기관리’가 빈번하게 사용되던 배경에는 ‘자기관리’라는 담론이 필요해진 정치경제학적 상황이 연관되어 있다. 1990년도에 한국은 3차 산업 종사자 비중이 50%를 넘어가는 탈산업사회에 도달했다. 공장 생산 중심의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를 기반으로 한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의 몸은 생산현장의 관리자와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서 규율된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노동을 하며, 노동의 생산성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몸의 움직임을 얼마나 일사분란하게 체계적으로 조직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었다. 따라서 이때의 노동자들이 가져야 할 노동윤리는 노동자들이 순응적으로 관리자의 지시와 기계의 움직임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1] 자기관리(self-management)와 유사한 자기계발(self-development)이라는 용어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90년대에 급증하였다. 자기계발은 노동과 관련하여 노동자가 미리 취업을 대비하여 높은 영어성적을 획득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의 노동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가 취업 이전에 갖춰져야 하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탈산업자본주의적 맥락과 관련이 있다. 산업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에 대한 기술교육은 기업과 고용주가 담당하던 영역이었으나, 탈산업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자가 자신의 돈을 들여 노동에 적합한 기술과 인간성을 미리 취득해야 한다는 방향에서 자기계발 담론이 사용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본 글에서는 노동자 교육에 관한 문제보다는 노동자의 노동규범 내면화라는 맥락에 집중하기 위해서 ‘자기관리’라는 용어를 중점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비스 생산 중심이 되는 탈산업화 시대에서는 노동자의 움직임이 더 이상 공장이라는 현장에 묶여 있을 수 없게 된다. 즉 노동자의 몸은 더 이상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관리자의 지시와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일사불란한 집단적 움직임으로 조직될 수 없게 된다. 이런 노동환경의 변화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윤리를 요구한다. 산업화시대에 노동자는 손으로 일했다면 탈산업화시대에 고용주는 노동자들이 머리와 가슴으로 일하기를 원한다(Weeks, 2016: 116). 노동자들은 단지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자체를 자기 계발과 자기 성장의 일부로 바라보고 그것을 즐길 줄 아는 것이 노동자의 미덕이 되었다. 즉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착취하기 위한 설계자가 되기를 기대 받는다(Henwood, 1997: 22).”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관리’가 담론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자기관리’라는 용어가 특히 노동활동에서의 자율성이 높은 연예인과 스포츠선수들을 향해 빈번하게 사용된 데에서도 나타난다. 이때의 자기관리는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사랑하고 스스로 노동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면서 성실하게 자신에 노동을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1990년 3월 20일자 《「신기록祝祭(축제)」 한국 마라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라는 기사에서는 한국 마라톤이 세계 신기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의 자기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하며 “선수는 과거처럼 지도자에게만 모두 내맡기지 말고 자진해서 자기관리에 신경써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즉 감시자와 관리자가 없어도 스스로 자기 몸에 대한 통제자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와 비슷하게 매일경제 1990년 4월 25일자 《프로골프 문제많다 活性化(활성화)위한 개선방안은…》에서는 한국 프로골프계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가 직업선수들이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즉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프로가 그럴싸한 아파트를 마련하고 중형 승용차를 굴리게 되면 일단 성공의 궤도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만족해버려 더 이상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며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처럼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노동 그 자체가 자아실현이라는 목적이 된다. 즉 ‘자기관리’ 담론은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요인을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찾을 것을 요구하며, 이를 통해 노동자가 더 이상 공장이라는 장소 속에서 외부요인에 의해 신체를 통제받지 않아도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몸을 자기관리의 대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한다.
노동자의 ‘시간관리’ 역시 ‘자기관리’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공장 중심의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는 스스로 시간관리를 할 필요가 없다. 정해진 시간 동안 고용주와 감독관리자가 설정해 놓은 최대한의 생산량에 따라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 움직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산업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스스로 자기 몸에 대한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 즉 노동자는 최대한의 생산성을 도출해내는 시간을 계산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배치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언론에서는 ‘자기관리’ 담론을 모든 노동자들이 (주부도 포함하여) 지향해야 할 가치로 제시하기 시작하였다. 탈산업화시대에는 기존에 고용주들이 담당하던 노동자의 시간관리, 건강관리, 관계에 대한 관리를 이제 노동자 스스로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담론작용은 노동자 내면으로부터 노동규율이 작용할 수 있도록 자기관리를 노동자의 가치이자 미덕으로 칭송하였다.
3. 2000년대 ‘외모 가꾸기’로의 자기관리 담론의 변화
탈산업사회 시대에 노동자가 자신의 몸을 자신의 자산으로 여기고 그것을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는 ‘자기관리’ 담론의 대상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 외형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특히 여성의 몸과 관련된다. 2000년대의 얼짱·몸짱의 신드롬, 2003년 몸짱 아줌마의 등장에서 자기관리의 의미는 외모 가꾸기로 이행한다. 여기에서 “외모 가꾸기도 자기관리의 일종”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자기관리의 의미가 외모를 가꾸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시작한다.
특히 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소위 핑크칼라 직군에서 여성들의 프로페셔널함은 자신의 몸을 얼마나 관리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스타일리쉬한 옷을 입느냐로 표현된다. 대표적인 핑크칼라 직군인 항공승무원을 연구하면서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는 여성의 프로페셔널함은 여성의 옷차림, 외모와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하였다(Hochschild, 1983: 103). 즉 여성에게 ‘자기관리’의 노동윤리는 곧 얼마나 자신의 몸을 관리했느냐를 통해서 나타난다.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생산에서의 프로페셔널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옷을 사고 외모를 가꾸기 위한 소비해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왜 2000년대 들어서 “외모 가꾸기도 자기관리의 일종”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한다. 예를 들어 한국경제 2007년 2월 16일자《 [피현정의 스타일 톡톡] 국내 여성 헤드헌터 1호 유순신의 ‘내가 10년 젊어 보이는 이유’》에서 유앤파트너즈 유순신 대표는 “여성의 외모는 그 자신의 몸값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이라면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라고 강조해요. 월급을 타면 무조건 10%는 자기 계발, 특히 외모 가꾸기에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모든 개인이 신체에 대한 관리자가 되길 요구하는 자기관리 담론에서 외모가꾸기는 임금시장의 영역으로 진출한 여성들에게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즉 훌륭한 생산자가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은 자기 노동의 주체가 되는 위해서 자신의 신체를 대상화하기를 요구받는다.
4. 혐오표현의 근거로서의 여성들의 자기관리
‘외모가꾸기’라는 ‘자기관리’의 담론이 확산되는 가운데 2000년대 중반 온라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된장녀’, ‘김치녀’ 등 “몸을 가꾸는데 치중하느라 내면을 돌보지 않는 여성”을 향한 혐오발화가 등장한다. 즉 “외모 가꾸기도 자기관리”라는 여성의 몸에 대한 규율이 작용하면서도 한편으로 이에 부응하고자 애쓰는 여성들은 종종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몸에 대한 규율로서의 자기관리 담론과 ‘된장녀’, ‘김치녀’ 혐오발화가 서로 모순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여성들에게 프로페셔널해지기 위해서는 몸에 대한 ‘자기관리’를 행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반면, ‘된장녀’, ‘김치녀’와 같은 혐오발화는 그처럼 자기관리에 치중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이기적이며, 내면이 빈약하며, 획일적이라고 비하하고 있는 이중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관해 이라영은 래퍼 제이스의 <성에 안 차>[2]라는 노래를 분석하면서 여성들의 자기관리로서의 소비행위가 ‘된장녀’, ‘김치녀’라는 혐오발화를 통해 비난받는 것을 보여준다(이라영, 2016: 167-168).
[2] <성에 안 차>라는 노래는 다음과 같이 여성의 소비 행위를 허영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많은 백을 갖고도 (성에 안 차), 옷장에 꽉 찬 옷을 보고도 (성에 안 차), 그렇게 멋진 남자를 만나도 (성에 안 차),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고 성에 안 차”
이러한 혐오발화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된장녀’, ‘김치녀’와 같은 혐오발화는 ‘자기관리’와 그에 따른 소비행위의 주체로서의 여성을 겨냥한다. 전통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소비활동은 가족 내 재생산을 위한 것이었다. 즉 여성들의 주된 소비활동은 남편과 아이들을 먹일 음식을 구매하고, 그들이 입을 옷을 구매하며, 가사노동을 수월하게 하기 위한 전자제품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이런 전통적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여성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소비활동을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자 허영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혐오발화는 가족을 위해 소비활동을 하였던 전통적 여성상을 규범으로서 전제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시장으로 진입한 여성들에게 ‘자기관리’가 요구된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신체에 부응하지 않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때 여성의 신체는 단지 미학적인 관점에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도덕적 비판을 받는다. 즉 자신의 몸을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관리하지 못했기에 노동규범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여기에 내포하고 있다.
이제 ‘자기관리’를 둘러싸고 여성에게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요구가 존재한다. 한편에서는 ‘자기관리’를 위한 소비활동을 하는 여성을 비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기관리’를 하지 못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제 ‘자기관리’ 담론은 여성의 신체를 둘러싼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5. ‘자기관리’의 딜레마, 그 긴장 사이에서 그것을 벗어나기
‘자기관리’의 담론이 여성의 신체와 관련되면서 이와 관련하여 여성주의 내에서도 논쟁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관리가 갖고 있는 규율적 성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탈코르셋’ 운동에서 잘 나타난다. ‘탈코르셋’ 운동은 성별분업적인 노동윤리와 여성의 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강제되고 있는 자기관리의 규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성에게 주로 요구되는 자기관리는 애초에 성공의 비결로서 언급되던 자기관리와 상충하는 것을 지적한다. 후자의 자기관리는 시간을 철저히 관리하여 자신의 커리어를 충실히 쌓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생산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다. 반면 몸에 대한 자기관리는 소비의 영역에 더 치중한다. 몸매와 얼굴에 대한 투자는 노동시간을 관리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주며,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데 있어 불확실한 약속을 할 뿐이다.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에게 주로 요구되는 이런 자기관리의 요구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영역에로의 자기관리로 옮겨가는 것을 지향한다. 그러나 여성노동자의 ‘자기관리’는 노동자로서의 커리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것은 화이트칼라 여성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밀스에 의하면 블루칼라 노동자가 보통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것과 다르게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은 자기 옷을 입어야 하며, 이때 화이트칼라 노동자, 특히 여성이 옷에 많은 돈을 쓰는 것에 반영된다(Mills, 1951: 248). 더 나아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업무에 충실하고 있음을 웃음, 친절한 말투, 깔끔한 못매무새 등을 통해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몸에 대한 관리는 노동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자기관리’에서 벗어나 커리어를 위한 진정한 자기관리에 이르자는 주장은 여성노동자의 ‘자기관리’와 커리어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노동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아이러니한 귀결에 이른다.
두 번째는 자기관리가 갖고 있는 주체생산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자기관리의 긍정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몸에 대한 자기관리는 자기 몸의 관리자로 주체가 되는 것이다. ‘된장녀’, ‘김치녀’ 등의 혐오발화는 여성들이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 자기관리의 주체가 되는 것을 겨냥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소비자 여성이 갖는 주체성과 소비영역에서 여성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긍정하면서, ‘자기관리’를 통해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아나는 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이는 탈산업자본주의사회가 여성노동자에게 요구하는 신체에 대한 규율을 긍정하는 것이자, 여성 노동자에게 강조되는 신체에 대한 자기관리와 그 전제가 되는 임금시장에서의 성별분업화에 대해서는 비판력을 상실한다.
그리고 본 글에서 제시할 자기관리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세 번째 전략은 애초에 자기관리라는 담론이 형성된 맥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때의 자기관리는 탈산업자본주의,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형태로 노동윤리와 규범을 내면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케이시 윅스는 페미니즘이 이러한 노동윤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기를 요구한다.
페미니즘 내에는 가사노동에 대한 딜레마가 존재한다. 전통적인 성별분업을 벗어나기 위해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하면서도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딜레마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여성을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가사노동을 이해하고 이에서 벗어나자는 쪽과 여성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에 반대하여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자는 쪽의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케이시 윅스는 페미니즘이 가사노동에 대한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윤리를 받아들인 결과 “일가정 양립”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이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이중적으로 떠맡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고 비판한다. 케이시 윅스는 가사노동이 ‘노동’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한다기보다는 ‘노동’이기 때문에 해방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이 ‘임금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여성해방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 가치에 따라 ‘노동’을 신성시하는 규범을 파괴하면서 모든 인간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사회구조를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탈노동운동, 또는 노동거부 운동을 통해 “가사노동이냐 임금노동이냐”라는 딜레마에 벗어날 수 있다.
‘자기관리’ 담론 역시 노동윤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장의 직접적 구속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을 규율하기 위한 ‘자기관리’ 담론은 여성에게는 특히 자신의 신체를 규율하여 노동자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자기관리’를 거부하고 진정한 ‘자기관리’로 나아가자는 관점은 여전히 노동윤리 안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 자신의 몸을 노동윤리에 부응하여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노동윤리로부터 벗어낼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자기관리’에 대한 논의의 수준을 정치적 지형으로 옮겨 놓는다. 나의 몸이 노동하는 몸으로서 규율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삶을 재창조하고, 비노동시간의 장소와 행위, 관계들을 재생산하고 재규정할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Weeks, 2016: 262). 주디스 할버스탬(Judith Halberstam)은 이것을 “퀴어한 시간”(queer time)이라고 부른다.
‘자기관리’ 담론에 대한 비판, 우리의 몸에 대한 규율에 대한 비판은 왜 우리가 ‘자기관리’의 담론 속으로 빠져들어가야 했는지, 그리고 왜 우리가 스스로의 몸에 대한 통제자와 외부적 노동규율을 내부화해야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외모 가꾸기’라는 자기관리를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를 벗어나, ‘자기관리’라는 담론 자체에 대한 비판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본 글의 요지이다.
이것은 케이시 윅스의 말처럼 유토피아적 상상을 요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해방의 기획으로 노동시간에 대한 단축을 요구할 수 있고, 기본소득을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배치 속에서 형성된 ‘자기관리’의 담론에 가장 근본적으로 직면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 Mills, C. Wright. (1951). White Collar: The American Middle Classe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 Hochscild, Arlie. (1983). The Managed Heart: Commercialization of Human Feeling.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 Henwood, Doug. (1997). “Talking about Work.” Monthly Review 49 (3).
- 케이시 윅스. (2016).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제현주 옮김. 파주: 동녘; Weeks, Kathi. (2011), The Problem with Work: Feminism, Marxism, Antiwork Politics, and Postwork Imaginatio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 이라영. (2016).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 소수자를 위한 일생생활의 정치학. 파주: 동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