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

지난 8월, 출판사 열다북스는 쉴라 제프리스(Sheila Jeffreys)의 내한 계획을 알려왔다. 쉴라 제프리스는 호주 멜버른 대학의 사회정치학부 교수로, 제니스 레이먼드(Janice Raymond)의 지적 조류를 이어 이른바 ‘트랜스젠더리즘(transgenderism)’을 비판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연구자이다. 작년 그의 저서 『래디컬 페미니즘: 성별 계급제를 꿰뚫는 시선』[1]과 『코르셋: 아름다움과 여성혐오(원제 : Beauty & Misogyny)』가 한국어로 번역·출간된 데 이어, 최근에는 『젠더는 해롭다(원제 : Gender Hurts)』가 번역·출간되었다. 제프리스가 한국에 방문하는 이유는 열다북스와 인천여성의전화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젠더박살 프로젝트>에서 강연하기 위함으로, 이 프로젝트는 『젠더는 해롭다』의 국내 번역·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이다.

한편 최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젠더’ 개념을 페미니즘에 반하는 것으로 보면서 “젠더론 안 사요” 선언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젠더를 ‘해로운’ 것으로 보는 제프리스의 논의를 주요한 참조점으로 삼고 있다[2]. 따라서 본 글은 『젠더는 해롭다』의 내용이 최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의 논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면서, 이 책의 주요 내용인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비판 및 그 비판이 전제로 하는 ‘젠더’ 개념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분석하면서 제프리스의 젠더 개념화가 갖는 문제를 짚고자 한다.

1.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론”

『젠더는 해롭다』의 서문에서, 제프리스는 ‘젠더’ 용어가 고안되고 사용되어 온 과정을 살피면서 젠더 관념과 실천이 ‘해로운’ 이유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젠더’ 관념은 인터섹스(intersex) 유아의 성을 규범화하기 위해, 즉 그들의 성별을 구분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안되었다. 보수적인 성 관념을 지닌 남성 성 과학자들은 생물학적 성에 가장 적합한 행동적 특성을 규정하고 그에 인터섹스 유아를 맞추기 위해 젠더 관념을 사용했다. 이후 ‘젠더’는 1970년대에 들어 제2물결 페미니즘의 주요한 개념으로 채택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 페미니즘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제프리스에 따르면 이들 페미니스트는 ‘젠더’를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적 특성 사이의 차이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전까지 주로 사용되어 온 ‘성 역할(sex role)’이 ‘젠더’라는 용어로 대체되면서 젠더의 의미는 점차 남성 권력과 여성 종속이라는 체계 자체를 의미하도록 변형되었다. 제프리스는 이러한 쓰임이 성 카스트(sex caste) 위에서 여성을 지배하는 주범인 ‘남성’을 감추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Jeffreys, 2014: 3-5).

페미니즘이 젠더를 개념화해 온 복잡한 역사를 놀랍도록 간략하게 정리한 뒤에, 제프리스는 제3물결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을 ‘젠더’ 개념이 ‘해로워’지게 된 주범으로 지목한다. 그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제3물결 페미니스트 및 퀴어 이론가들은 젠더 정체성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젠더를 이동 가능한 유희와 같은 것으로 본다. 특히 제프리스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가 “젠더를 개인적인 표현이나 수행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남성 지배의 물질적 권력 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로 대표되는 퀴어 이론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여성’ 범주를 해체하려 하며, 더 나아가 퀴어 정치학은 여성 실존의 육체적 실재(fleshly reality)에 대한 모든 고려를 ‘젠더’로 대체해버린다는 것이다(Jeffreys, 2014: 42).

여아낙태와 같은 여성 차별은 젠더 정체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다는 이유에서 제프리스는 이러한 논의 전반을 기각한다(Jeffreys, 2014: 5-6). 생물학적 토대를 계속 호출하면서, 그는 ‘젠더 정체성’이란 젠더 스테레오타입에서 파생된 여성성, 남성성에 대한 상상적 관념일 뿐이며, ‘여성’은 젠더 정체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성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이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는 허구의 젠더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생물학적 성과 다른 젠더 정체성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젠더’ 개념 자체를 허황된 것으로 치부하면서, 제프리스는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3]’을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사상으로 대치시킨다. 제프리스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리즘’이란 “전통적인 젠더 역할에 불편함을 느끼는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하는 용어”로(Jeffreys, 2014: 17), 어떤 사상이나 운동을 가리키기보다 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이들을 뭉뚱그려 부르는 말에 가깝다. 그러면서 그는 트랜스젠더리즘이 젠더를 이행 가능한 무엇으로 상정함으로써 ‘여성’의 실재를 부정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제프리스에게 페미니즘이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 범주에 속해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움직임이기에, 페미니즘은 ‘여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여성’의 실재를 부정하는 트랜스젠더리즘은 페미니즘을 ‘해친다’.

2. 젠더는 제거될 수 있는가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리즘을 상호배타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제프리스의 주장 기반은 이렇듯 ‘젠더’를 개념화하는 방식에 있다. 이러한 개념화는 여러 면에서 대단히 문제가 있다. 먼저 그는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위계 등 서로 다른 개념을 ‘젠더’라는 용어 하나로 교묘히 통합시킴으로써, 젠더 개념이 시대적인 맥락 및 운동의 역동에 맞추어 변화하고 정교화되어 온 역사를 모두 해프닝, 즉 ‘섹스’라는 근원적인 범주 하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발생한 해프닝인 양 일축해버린다.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위계 등은 각각 ‘젠더’ 개념을 구성하는 다양한 층위이나, 그 자체로 젠더와 등치 될 수 없다. 또한 젠더를 단순히 젠더 정체성이나 젠더 스테레오타입들을 표지하고 포괄하는 중립적인 단어로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젠더는 “사회적으로 인지된 두 성들 간의 관계에 대한 지식”으로(Scott 1988: 42-44), ‘여성성’ 혹은 ‘남성성’이라는 관념을 생산함으로써 특정 존재를 ‘여성’ 혹은 ‘남성’으로 표지하게끔 하는 일련의 과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제프리스는 분석적 도구로서의 젠더가 분석 대상으로 삼는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등을 젠더의 하위 범주인 것처럼 포섭시킴으로써 범주 혼동을 유도한다. 따라서 젠더 정체성,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위계가 모두 ‘해로운’ 것이므로 젠더 역시 ‘해롭다’는 논증은 성립 불가능한 범주적 오류이다.

그뿐 아니라 젠더 스테레오타입이 여성들에게 ‘해로운’ 것이기 때문에 사라져야 한다는 제프리스의 제거주의적 주장은 젠더 스테레오타입이 개인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통해 사라질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하다. 그러나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 제약을 받으며, 모든 행위는 그것이 놓인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언제나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 즉, 젠더 스테레오타입은 모두가 그것을 행하지 않고 거부할 때 바로 없어질 수 있는 것인 양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여러 행위자의 수행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하고, 생산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제프리스의 젠더 제거론⎯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면⎯은 그가 그렇게 비판하던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제프리스는 버틀러가 젠더를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옷이나 장신구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실상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 개념은 정반대를 가리킨다. 오히려 버틀러가 말하려던 바는, 젠더화된 삶이란 주체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자연화된 이성애 섹슈얼리티라는 폭력적인 제약 하에서, 그 제약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이다(Butler 1990, 1993a).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을 개인의 자유 의지에 따른 자발적인 선택으로 보는 이러한 오독에 맞서 “젠더 수행성은 오늘은 어떤 젠더가 될까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기도 했다(Butler 1993b: 22). 애너매리 자고스가 지적했듯, “제프리스는 버틀러의 이론적 입장을 과잉 단순화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과잉 단순화를 자신이 비난하고자 하는 이론적 입장의 결함으로 오인하고 있다(Jagose 2012: 142).” 혹자들은 버틀러를 자유로운 젠더 선택의 가능성을 찬미하는 ‘리버럴’ 이론가로 오해하곤 하나, 앞서 보았듯 젠더 스테레오타입, 젠더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고 보는 제프리스의 입장이야말로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을 전제하는 ‘리버럴’에 가깝다.

3. 생물학이라는 자가당착

제프리스는 ‘성 역할’이라는 용어가 젠더로 대체되어버린 것을 문제점으로 짚으면서, 젠더 개념이 여성차별의 원인인 생물학적 성의 존재를 가린다고 주장한다. 제프리스에게 있어 생물학은 페미니즘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토대이며, 따라서 생물학적 요인에 기반한 여성의 억압을 이야기하지 않는 모든 이론은 페미니즘의 대척점에 서게 된다. 그러나 만약 제프리스가 원하는 대로 ‘젠더’를 ‘성 역할’로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성 ‘역할’이라는 개념에는 이미 사회문화적 구성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적 구분이 일정 생김새의 성기를 갖고 태어나는 순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규범과 실천을 통해 ‘구성’되어 나가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 바로 ‘역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물학을 자명한 진리로 상정하는 제프리스의 시도는 사실상 모순에 빠지고 만다. 생물학은 언제나 사회문화적인 언어화를 통해 우리에게 인식되고 경험되며, ‘자명한 것’으로서 주어진 생물학이란 없다. 제프리스는 여아감별낙태를 예로 들면서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 억압을 설명하는데, 태아를 ‘여성’ 혹은 ‘남성’으로 인식하고 구별하는 행위 자체에는 이미 특정한 성별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문화적인 과정이 개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여아감별낙태는 생물학적 성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젠더화된 권력의 작동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제프리스는 이러한 지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제프리스는 여성이 평생 종속된 성 카스트에 속한다고 단정 짓기까지 한다(Jeffreys 2014: 5). 생물학이 변화하지 않는 토대로 자리 잡으면서, 여성에 대한 억압 및 차별은 변화할 수 없는 운명으로 굳어진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보부아르의 명제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족쇄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프리스는 이 생물학적 결정론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기꺼이 환영하면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이라는 운명을 다시 여성들 앞에 내려놓는다. 이러한 주장은 가장 ‘근본적(radical)’인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을 생산하는 전략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을 억압의 주체로, 여성은 억압의 객체로 고정하면서 이 억압적인 체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불안과 공포를 확대 재생산한다. 이는 여성에게 체현된 억압의 구조와 배경을 밝히기 위해 억압자로서의 남성-피억압자로서의 여성 구도를 강조하는 논리로, 억압의 원인과 결과를 서로 물고 물리는 자기 반복적 구조로 설명한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여성이 억압받는 이유는 그가 억압받는 성별인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또 여성을 여성이라는 집단으로 정초시키는 것은 그가 억압을 받는 성별로 태어났다는 사실 뿐이다. 이러한 자기 반복적 순환 논리가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그로부터 우리가 실질적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진지하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4. 우리에겐 다른 길도 있으니까

위에서 제프리스의 이론을 다각도에서 비판했지만, 본 글의 목적은 사실 제프리스의 ‘젠더론’을 도덕적으로 정죄하거나 무조건 ‘혐오’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젠더는 해롭다』의 출간에 부쳐, ‘젠더’라는 개념이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에 가장 문제적인 개념이 되었음을 인정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이를 둘러싼 논의의 장에 적극적으로 뛰어 들어와 주기를 요청하고자 한다. ‘젠더가 무엇인지’, ‘젠더 개념으로 어떤 논의를 더해갈 것인지’에 대한 연구와 토론은 현재 페미니즘 흐름의 격동 속에 있는 한국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스스로를 ‘래디컬’로 지칭하는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젠더 개념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이들은 나아가 젠더에 관한 논의 전반을 ‘필요 없는 것’, ‘쓸데없고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 말대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젠더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동시에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젠더화된 억압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깔끔하고 편한 방식으로 젠더의 개념을 상자 속에 넣어버릴 수 있을까? 제프리스가 이미 자명한 기반으로 믿고 있는 ‘여성의 몸’과 ‘몸의 경험’은 사실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역사에서 매우 논쟁적인 주제였다. 남성은 몸을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인 존재였던 반면 여성은 끝없이 몸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육체적인 존재였기에, 페미니즘은 그 어떤 지적 체계보다 여성의 존재 조건을 이루는 몸과 물질에 대해 숙고해 왔다. 페미니즘 이론사에서 여성의 몸은 단 한 번도 이론의 안전한 토대가 되어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장 문제적이고 도발적인 질문들이 펼쳐지는 장이었다. 

권명아는 생물학적 성을 다시금 토대로 호출하는 최근 페미니즘의 경향을 “여성의 경험과 신체적 경험의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절박함”의 표현이라고 해석하면서, 이 절박함을 의제화하기 위해 다른 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아니라 “기존의 페미니즘 연구가 구축해놓은 경험과 신체에 대한 유물론적 통찰”을 이론과 실천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권명아 2019:  15). 몸을 정신/육체라는 이분법의 열등한 항으로부터 구해내는 동시에, 이분법이 아닌 대안적인 존재론을 이론과 실천의 중심으로 가져오려는 물질주의[유물론적] 페미니즘의 시도는 우리가 참고할 만한 중요한 자원임이 분명하다[4]. 이러한 통찰을 통과하고 나서야 우리는 페미니즘의 풍부한 고민의 결들을 ‘생물학’이라는 좁은 상자 속으로 구겨 넣어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님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경합(agonistics)과 적대(antagonism)의 분명한 차이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적대는 영구적인 갈등을 전제하는 것인 반면, 경합은 반대편 요구의 정당성을 승인한 채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적대가 구체적인 해법을 남기지 않는 것인 반면, 경합은 합의를 위한 복합적인 갈등의 과정을 수반한다(Mouffe 2013). 이는 페미니즘 운동과 정치학을 둘러싼 우리의 논쟁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남긴다. 이론이 그들만의 논리에 따라 명백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이들의 기반을 지우고 허깨비로 만들어버릴 때, 자명한 원리로서 추앙받는 기준들에 부합하는 이들만을 ‘존재’로 승인하고 그 외의 사람들을 ‘비존재’의 영역으로 내몰 때, 우리를 둘러싼 지형은 더 이상 논쟁과 경합이 아닌 폭력과 적대의 장으로 뒤바뀌고 만다.

경직된 이론은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다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한 길만을 필사적으로 붙들어야 할 것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미 여러 각도로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가 아니다. 충분히 논쟁 가능한 문제들을 논쟁 불가능한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착각이다. 분명, 적대가 아닌 경합이 지금 우리의 페미니즘을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서로에 대한 윤리적인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1] 제프리스의 에세이와 소논문을 취합한 선집으로,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은 한국의 번역자들과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이 책의 번역·출간 이후, 제프리스는 현재 온라인 중심으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래디컬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2] 열다북스와 제프리스 초청 행사를 공동주관하는 사단법인 인천여성의전화(2019)는 입장문에서 제프리스가 “젠더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정리”해줄 중요한 인사라고 밝힌 바 있다.
[3] 트랜스젠더리즘이란 “트랜스젠더의 이슈, 역사, 정체성, 정치학 등을 다루는 포괄적인 담론”을 의미한다(김지혜 2011).
[4] 물질주의 페미니즘은 경험·물질과 이론·언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후자에만 집중하거나, 후자를 버리고 전자를 ‘사이비 자연주의화’ 하는 것에 반대하며 (여성의) 본성·자연(nature)을 재개념화 하고자 한다. 물질주의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몸에 대한 생물학적·본질주의 사유를 경계하며 몸을 사회·문화·정치의 흔적이 각인되는 공간이자, 삶을 통해 생산되고 구성되는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Heckman&Alaimo 2008; Grosz 1994)


참고 문헌

  • Annamarie Jagose. (1996). Queer Theory: An Introduction. NY: NYU Press. 박이은실 옮김(2012). 『퀴어 이론 입문』. 서울: 여이연.
  • Alaimo, S., Hekman, S., & Hekman, S. J. (Eds.). (2008). Material feminisms. Indiana University Press.
  • Joan Scott. (1988). Gender and the Politics of History: “Gender : A Useful Category of Historical Analysis”. NY: Columbia University Press.
  • Judith Butler. (1990).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NY: Routledge. 조현준 옮김(2008), 『젠더 트러블』, 파주: 문학동네
  • Judith Butler. (1993a).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NY: Routledge.
  • Judith Butler. (1993b). ‘Critically Queer’. GLQ: A Journal of Lesbians and Gay Studies 1(1). pp.17-32.
  • Elizabeth Grosz. (1994). Volatile Bodies: Toward a Corporeal Feminism. 임옥희 옮김(2001). 『뫼비우스의 띠로서 몸』, 서울: 도서출판 여이연
  • Sheila Jeffreys. (2014). Gender Hurts: A feminist analysis of the politics of transgenderism. NY: Routledge. 유혜담 옮김(2019). 『젠더는 해롭다 :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본 트랜스젠더리즘』. 인천: 열다북스.
  • Chantal Mouffe (2013). Agonistics: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 NY:  W W Norton & Co Inc.
  • 권명아(2019).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서울: 갈무리.
  • 김지혜(2011). “페미니즘,레즈비언/퀴어이론,트랜스젠더리즘 사이의 긴장과 중첩” 『영미문학페미니 즘』. 제19집 2호. 53 -77쪽.
  • 인천여성의전화(2019). “[젠더박살 프로젝트]를 열면서”. 게시일 2019년 8월 30일. https://www.facebook.com/IWHL1993/posts/1335297106628644.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 출간에 부쳐”의 8개의 생각

  1.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생각해봤음 합니다.

    (쓰까의 발버둥이다 뭐다 댓글 수준은
    읽지도 않고 단 댓글이라고 스스로도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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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정말 꼼꼼하게 제프리스의 입장을 분석하고, 다각도에서 이를 비판하신 것 같습니다. 이 글 덕분에 꽤 많은 고민이 해소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아요

  3. 와아 잘 읽었습니다.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글에 궁금함이 많이 풀렸고, 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데에 용기와 힘을 얻고 갑니다. 이 같은 글처럼 진지하고 숙고할 만한 논의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글쓴이 표기가 없는 것은 어떤 이유나 의미가 있을까요? fwd도, 이러한 글의 공동 필자든 대표 필자든도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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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번 글은 Fwd의 구성원 여럿이 공동으로 집필하였으며, 시사 비평은 Fwd의 입장문이기도 하기에 별도의 필자를 표기하지 않습니다. 신문의 사설에 빗대어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듯합니다! 주의 깊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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