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비연애: 정상 연애의 시간성에 대하여

도우리

0.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용하다는 무당에게 신점을 보러 갔다. 소녀와 소년의 경계에 있는 얼굴이 나를 맞이했다. 그에게 절박해서 뻔한 질문들을 던졌다. 배곯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글을 계속 써도 될까요, 가족들은 무탈할까요 등등. 대감의 혼령에게 신내림을 받았다는 그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다정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전반적으로 괜찮을 거라는 답변을 해 주었다. 그제야 먹고사는 문제 다음의 일들을 물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제 연애는 어떨까요. 무당은 대뜸 내게 선고(?)했다.

“언니는 3년 뒤에야 오래 갈 인연을 만날 수 있어.”

그가 덧붙이기를, 그 중간에도 인연들이 있지만 스쳐 지나갈 이들이니 굳이 만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당장 연애할 생각은 없었지만 왠지 아쉬운 답변이었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기에 3년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기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1년 후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2년도 아니고 3년 후에야 인연을 만난다고? 그래도 5년 후라고 듣지 않은 게 어디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스스로 우스웠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이후부터 비연애를 긍정했다(게다가 나는 탈연애 선언의 장본인이 아닌가). 하지만 ‘3년의 비연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주변 친구들도 연애하지 않기에 3년은 너무 길다는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들과 비연애를 이야기할 때에는 비혼, 비출산처럼 ‘평생’을 전제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았다.

대체 3년의 비연애가 길다는 시간 감각에는 어떤 틀거리들이 얽혀 있는 것일까?

1.

기본적인 것부터 짚어보자. 비연애란 무엇인가? 우선 비연애를 좁은 의미로, ‘단지 연애하지 않는 상태’라고만 볼 때는 놓치는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비연애는 페미니즘 및 퀴어 운동의 의제로만 상상된다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정상 연애에서도 비연애를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은 잘 이야기되지 않는다. 여전히 정상 연애가 정상 가족을 이루기 위한 ‘이전 단계’로 여겨지는 우리 사회에서, 정상 연애 이력은 정상 결혼에 편입되기 위한 ‘스펙’이 된다. 결혼 적령기 이전, 20대~30대 초반까지 대략 3~5회 정도의 정상 연애를 해 주면 무난히 정상 가족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정상 생애 주기가 짜여져 있다. 그리고 그 3~5회의 정상 연애에서 중요한 것이 ‘비연애 구간’이다. 그 비연애 구간이 중간중간 적절히 있어야 진정성 있는 연애로 평가받기 때문이다(그 현상 중 하나가 ‘환승 이별’에 대한 비난이다). 비연애 구간은 보통 이전 연애에 대한 애도, 그러니까 ‘마음’의 문제로 여겨지지만 우정 관계에서는 다른 관계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증명하는 일이 드물다는 점에서 결국 섹슈얼리티 통제 여부와 맞닿아 있다. 연애를 하지 않을 때에도 정상 섹슈얼리티의 규율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정상 연애에서 비연애 구간, 아니 그 틈도 비치지 않는 것이 청춘의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도 공존한다. 얼마 전 방영된 넷플릭스 스탠딩 코미디 쇼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에서 박나래는 자신이 ‘쉼 없이 연애를 할 수 있었던 노하우’라며 ‘자신감 있게 들이대기’, ‘수지 스킬’ 등을 소개한다. 2000년대를 휩쓴 가수 이효리도 방송에서 결혼 전 연애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던 썰을 종종 풀었는데, MC나 다른 출연자가 나의 마음을 대변하듯 “비결이 뭐냐”라고 묻던 장면들도 생각이 난다. ‘매력 증명 척도’로서의 비연애 맥락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더 많은 수요란 더 많은 매력’으로 치환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현대 연애의 맥락과 닿아 있다. 그래서 자칭 ‘칭기즈 칸’ 박나래는 세상의 남자를 ‘나랑 잔 남자와 앞으로 잘 남자’로 분류하거나, “아끼면 똥 된다”라며 비연애 구간과 선택(소비)하지 못할 남자들을 ‘낭비’로 전유하는 코미디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상 연애에 ‘지고지순한’ 비연애의 맥락, ‘매력의 빈틈’으로서의 비연애의 맥락은 얼핏 모순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여성이 군대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고무신 문화’에서도 발견되는데, 여성이 기다리지 못하고 이별을 통보하면 ‘나쁜 년’이 되면서도 전역 때까지 기다리면 ‘얼마나 매력이 없었으면 지금까지 혼자냐’라며 오히려 이별을 통보받는다는 일화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중적인 반응 모두 정상 섹슈얼리티, 특히 여성에게 요구되는 전통적 섹슈얼리티 덕목으로 통합된다. ‘섹시하되 청순하라’는 모순율 말이다. 하지만 다다익선, 남성성의 증명으로 여겨지는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이에 비해 훨씬 자유롭다. 정상 연애 내에서의 비연애는 이렇듯 여성에게, 지고지순과 생애주기의 낭비 사이를 줄타는 감각이다. 그 줄의 끝은 정상 가족과 정상 국가라는 씨줄과 날줄에 이어져 있다.

2.

비연애는 연애하지 않는 상태 자체보다도 그 맥락이 중요하다. 다시 돌아와서, 3년의 비연애가 길게 느껴졌던 것은 앞서 이야기한 정상 연애 내 비연애의 맥락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비연애란 연애 구간 사이사이, 다음 연애나 결혼을 위한 ‘임시적’인 상태로만 상상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3년의 임시성, 어딘가 익숙한 리듬이다. ‘3년의 휴학, 3년의 백수, 3년의 휴직’이라고 할 때의 감각 말이다. 반면 ‘3년의 재학, 3년의 재직, 3년의 경력’은 어떤가. 부모님이나 명절날 친척 어른들 앞에서 어깨를 펼 수 있는 감각이다. ‘정상 시민’에 가까워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3년의 비연애가 길게 느껴지는 것은 앞서 지적했듯 정상 생애주기에서 3년의 시간성을 낭비하는, 손실의 시간이라는 공기가 ‘비연애’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질문을 되돌려 주고 싶다. 진정 손실의 시간은 어느 쪽인가?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에서 정상 생애주기를 훌륭히 수행하던 주인공 김지영은 ‘미쳐’ 버린다. 똑딱똑딱 시간을 분절하는 생애주기의 시침에 잘려 나가는 실존적 시간성).

다시 강조하면, 정상 연애란 ‘정상 생애주기’, 정상성과 쓸모의 시간성에 있다. 이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이며 발전적인 근대의 시간성이기도 하다. 생애 주기의 눈금자인 나이만 해도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관용구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나이, 시간성을 먹어 치우는 주체라는 함의다. 요리 코스처럼 공교육-대학교-(병역)-취직-결혼-출산이라는 정상 생애주기의 눈금의 지표들을 빠짐없이 먹어 치우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생애주기 과업이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여 규격에 맞춰 조립되는 포디즘(Fordism)적 시간. 눈금의 이빨로 먹어 치우며 근대적 주체를 확장하는  공리주의적 시간성이다. 또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지연 시간’은 나태와 게으름이라는 ‘윤리적 죄악’으로까지 여겨진다(휴식조차 재생산에 복무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관념은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꺼내지 않더라도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시간을 셈하고 계획하며 약속하는 우리들은 스스로 시간을 통제하는 주체로 여기기 쉽지만, 시간성은 항상 그러한 환상을 허문다. 합리성과 동일성의 외피를 입은 자아에 상흔을 입히고, 타자들로 인한 감염으로 몰아붙여 주체의 경계를 시시각각 허물기 때문이다. 이 시간성은 계산적이기보다 몰가치적이며, 목표가 있기보다 반(反)목적적이다.

그래서 시간이 언제 어디서나 균등하게, 직선적으로 흐른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나는 초혼 연령이 대표적 사례다. 대도시일수록 초혼 연령이 증가한다(2018년 기준, 시도별 남녀 평균 가장 늦은 초혼 연령(서울특별시, 32.4세)과 가장 빠른 초혼 연령(충청북도, 31.1세)의 시간 차이는 1.3년이다. 서울 내에서 가장 늦은 초혼 연령을 기록한 지역은 강남구(32.9세)다). 시간성은 불변하는 본질이라기보다 권력적이고 관계적이다.

따라서 정상-시간성은 일부에게만 허락된다. 근대 서구인, 이성애, 비장애인, 중산층을 주체로 상정한 시간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 사회에서 3년의 비연애가 길지 않을 거라고 여겨지는, 아니 연애의 주체로도 잘 상상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청소년, 트랜스젠더, 노인, 장애인, 난민… 이들(우리들)이 정상 국가를 위한, 재생산에 기여하기 어려운 존재들로 낙인찍힌다는 점을 감안하면 ‘자유연애’라고도 불리는 지금의 정상 연애는 ‘생산성, 정상성’의 맥락과 상통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3.

페미니즘 담론의 비연애 논의들도 정상-시간성의 관점으로 읽어볼 수 있다. 연애할 시간에 자기 계발하자는 ‘야망 서사적 비연애’는 생산성과 정상성에 공모하기 쉽다. 성공을 위해 자아를 관리하는 기획은 지금의 생산 시스템을 승인하고 그 규칙을 따르는 과정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사실 페미니즘 담론에서 촉발된 비연애 선언들은 연애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연애 관계 내에서의 남녀 간 기울어진 운동장 및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환멸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성애 관계에서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 맺기의 체념으로서 ‘혼자라도 괜찮은’ 상태로서의 비연애, 혹은 ‘톨앤머슬 영앤리치 빅앤핸섬’이라는 구호로 집약되는 ‘남성 대상화’로서의 비연애를 지향하기도 한다. 특히 ‘남성을 대상화하는’ 연애는 여성들의 관계에 대한 통제 및 보상 욕망이 투영된 방식으로, 이러한 대상 소비적인 관계 맺기는 자기 소외를 겪고 실패로 돌아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의 ‘비연애’로 볼 수 있다.그런데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 관계는 아닌데도, 왜 ‘비연애=홀로됨’이라고 여겨질까? 비연애의 시간성을 제대로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연애라는 개념을 ‘관계성’의 차원에서 천착할 필요가 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 Erich Fromm(2006). The Art of Loving, New York:HarperCollins, 황문수 옮김(2019), 『사랑의 기술』, 서울:문예출판사.
  • Eva Illouz(2012). Warum Liebe weh tut, Berlin:Suhrkamp,김희상 옮김(2013), 『사랑은 왜 아픈가』, 파주:돌베게.
  • 김성도(2018). 『호모 모빌리쿠스』, 서울: 삼성경제연구소.
  • 이진경(2002).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파주:푸른숲.
  • KOSIS(통계청, 인구동향조사), 2019.12.05.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3년의 비연애: 정상 연애의 시간성에 대하여”의 2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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