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비연애(2): ‘솔로=홀로’라는 정상 각본 뜯어보기

도우리

0.

우리는 사실 ‘비연애=비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에게는 연인 외에도 다양한 관계들이 있다. 친구, 가족, 친척, 동료, 선후배, SNS 친구, 반려 동물 등 말이다. 또 같이 친구라 부르더라도 그 관계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 아주 친한 친구와 둘이서 보기에는 어색한 친구, 돌봄을 주로 나누는 친구와 사유를 주로 나누는 친구 등 같은 관계 범주 내에서도 친밀함의 다양한 결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왜 나는 무당에게 ‘3년 뒤에야 연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연애하지 않기에 3년은 너무 길다고, 바꿔 말해 ‘비연애=홀로됨’이라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왜 비연애를 말할 때 ‘혼자라도 괜찮다’라고 하는 것일까?

지난 글에서는 3년의 비연애가 길다는 시간 감각을 정상 연애와 정상-시간성의 관계로 살펴봤다. 이번 글에서는 연애 외의 다른 관계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물러나게(혹은 상상하게) 하는 정상 연애의 ‘정상-관계 각본’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

2010년대 이어졌던 여성들의 비연애 선언 중에는 ‘포기’의 맥락 외에도 여성들이 삶의 중심을 ‘나’로 두겠다는 결심이 있었다. 미국 사회학자 제시 버나드(Bernard, 1982)가 모든 결혼은 두 개의 결혼, ‘남편의 결혼과 아내의 결혼’으로 이뤄진다고 지적했던 것처럼, 정상 연애에 ‘남성의 연애와 여성의 연애’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눈치챈 여성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연애’는 남성에게 사랑받고 보호받는 역할이면서, 남성다움을 인정하며 섹슈얼리티를 조절하고 외모를 관리하는 쪽이었다. 데이트 폭력과 이별 폭력은 어떠한가. 여성들은 연애를 통해 사랑과 주체성이 양립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 그래서 “혼자라도 괜찮아”라는 구호는, ‘우리는 남성과 관계 맺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임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홀로됨’을 어떻게 마주하고 다뤄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은 적은 편이다. 꾸미고 연애할 시간에 스펙 쌓자는 자기계발 서사나 혼자서도 시간을 잘 보낼 취미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솔로=홀로’라는 등식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논의가 많았다. ‘솔로 아니면 커플’이라는 양자택일 전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솔로는 외롭고 불행하다’라는 정상 연애의 협박과, 각종 로맨스 드라마와 커플 이미지 마케팅 등의 정상 연애의 ‘선전물’ 폭격에 온전히 영향받지 않기란 어렵다.

외로움이라는 이성애-연애 중심주의의 무기를 구체적으로 뜯어보자: “연애하지 않을 때, 우리 여성들은 무엇을 외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갈망하는가?”, “외로움만 두려운가? 그 외로움은 어떤 종류의 외로움인가?”, “연애하고 싶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을 원하고 어떤 관계를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솔로와 연인의 양자택일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

2.

먼저 막연한 외로움을 뜯어보자. 연애는 왜 외로움을 해결할 좋은 수단으로 여겨질까? 우리는 연애하면서도 외롭기도, 아니 연애 중이었기에 더욱 지독했던 외로움을 털어놓으면서도 말이다. 주변에 왜 연애가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았던 답변은 “주말에 같이 예쁜 카페 가고, 영화 보고, 나의 일상을 공유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리고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바꿔 말해 전자는 친구는 아무 때나 불러내거나 시시콜콜 일상과 기분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뜻이고, 후자는 친구도 나를 좋아하지만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종합하면 연애가 높은 정도의 친밀함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러한 연애 관계의 특수성은 ‘최우선 관계’, 그러니까 (이성애) 사랑과 우정의 이분법-위계에서 온다. 그 이분법은 ‘성애’가 친밀함을 이루는 절대적이고 최우선적인 방식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번에는 관계 각본을 헤쳐 보자.

3.

“키스한다는 상상을 해 봐.”

상대에 대한 감정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헷갈릴 때  쓰이는 유명한 척도(?)다. 하지만 키스는 은유일 뿐, 노골적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에서 친구와 연인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섹스 여부다. 이렇게 섹스가 어떤 관계를 연인으로 결정한다면, 섹스는 성적 쾌락과 별개로 그 자체로 막대한 상징성을 띠게 된다. 그러니까 섹스는 관계들을 범주화하고 위계화한다.

얼마 전 한 성 상담 전문가가 섹스리스 부부를 ‘치료’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화제였다. 특히 그가 “섹스리스는 명확하게 사랑리스”라고 진단한 멘트가 ‘명언’으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회자됐다. 하지만 섹스리스를 의학적 관리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이성애 삽입) 섹스는 본능이자 사랑의 표지이며, 따라서 섹스리스는 결핍된 상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관념은 친밀함을 이루는 한 가지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실질적으로 그 관계의 친밀성을 좌우하는 다른 요소들을 지워버리는 것이 아닐까?

여성을 위한 섹스 지침서 『여자들의 섹스북』은 생식기와 성기 개념을 분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책의 저자인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한채윤은 “성기를 성행위를 하는 신체 기관이라고 정의하면, 성기는 몸 전체다. 온몸을 다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때 더 안전하고 즐거운 섹스를 상상할 수 있고, 자신을 온전한 성적 주체로 인식하기도 쉬워진다”라고 강조한다. 친밀함도 마찬가지다. 친밀함과 삽입 중심의 성애를 분리해야 보다 좋은 관계를 상상할 수 있고, 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욕을 일부러 억제해야 한다거나, 모두가 금욕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차원의 유대가 충분하다면 성적 유대가 지금처럼 절대적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술과 모임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술이 모임이나 만남을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술이 곧 좋은 대화 경험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권하는 문화는 낯선 사이 혹은 업무와 상하 관계라는 경직된 관계들을 한데 모아 급격한 친밀함을 만들려는 데서 온다. 술을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리는, 다음 날이면 어색해지거나 탈이 나는 낮은 수준의 친밀감을 형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술로 관계 맺기’ 방식이 모든 자리에서 절대적인 조건이 되고, 술이 없는 관계는 ‘그저 지인’이 되는 사회라면 어떨까? 관계에서 성애가 차지하는 위상도 마찬가지이다. 성애 중심 친밀성에 문제제기하는 것은 성애 자체라기보다 이 모델이 차지하는 ‘정상’의 지위를 향한 도전이다. 이 도전을 위해서는 소유와 성교 중심 섹스를 넘어선, 친밀함의 다른 모델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력이 요청된다.

4.

친밀함의 새로운 형식을 위해서는 친구와 애인이라는 범주로 묶이지 않으면서도, 이 범주들에 포함된 요소들을 조합한 관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요지는 ‘돌봄-헌신-감정-신념-스킨십-섹스’를 연애 혹은 결혼이라는 한 바구니에 담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 심리학자이자 여성주의 상담사인 마르시아 힐(Marcia Hill)은 먼저 기존에 가려졌던 관계들의 존재를 알아보고 재평가하자고 다음과 같이 제안한 바 있다.

“어떤 관계에서 헌신을 경험하는가? 가장 헌신적인 관계가 성적 상대하고 맺는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 성적인 느낌들이 정말로 성적 상대에게만 제한되는가? 관계에서 어떤 종류의, 어느 정도의 친밀함을 경험하고 있는가? (…) 당신에게는 관능적 요소가 있는 우정이 있는가? 헌신의 감정이 분명한 우정은? 간혹 성적인 사이가 되는 일도 있는 옛 애인은? 육체적으로는 친밀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친밀하지 않은 관계는? 육체적으로 친밀하면서도 성적으로는 친밀하지 않은 관계는? 각 관계의 이름보다는 실상이 말하게끔 하라.”

친밀함의 종류도 세별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 친밀함, 돌봄과 헌신의 친밀함, 업무적 친밀함, 신체적 친밀함, 성애적 친밀함, 낯익은 친밀함, 지적인 친밀함…….

나아가 이러한 친밀 관계들, 요소들의 위계를 바꿔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최우선 순위’를 애인과 친구가 공유할 수도, 혹은 애인이 친구의 우선순위보다 낮아 ‘그냥 애인’인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성애 중심성의 핵심은 친밀성을 좌우하는 것이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오르가슴(사정) 중심 섹스’라는 점이다. 오르가슴과 전희의 순서-위계를 뒤집는 일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술과 모임의 관계를 다시 쓸 수 있겠다. 술을 취기 자체나 만취를 목표로 마시는 것 보다, 향을 음미하며 안주와 대화에 곁들이는 방식이 더 다채로운 즐거움을 열어준다. 마찬가지로 오르가슴 말고도 이를 수 있는 여러 성적 친밀함의 샛길들을 발견하는 것. 섹스에서 오르가슴이 아닌, 성애적 놀이(전희)를 목표로 삼는 것. 성애적 놀이에서는 성기 접촉과 오르가슴은 부수적인 행위로 밀려나고, 접촉 그 자체와 남들 앞에서는 내보이기 어려운 행위나 감정적 내밀함들을 나누는 것이 핵심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성애 중심성의 친밀함의 언어들은 가부장-정상성과 공모할 수밖에 없다. 미국 인류학자 게일 루빈(Gayle S. Rubin)에 의하면 가부장제는 능동적이고 강한 남성성과 수동적이고 약한 여성성을 구성해내는데, 이러한 젠더 정체성은 ‘생물학적 성(염색체, 생식 기관, 성 호르몬 등)’에 기초해 섹스-젠더 체계를 조직한다. 이 생물학적 성을 결정짓는 요소들 역시 다양하고 논쟁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으로 상상되기에,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정상성’이란 섹스-젠더 체계에 들어맞는 젠더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섹스-젠더 체계를 교란시키는 정체성 및 행위 뿐 아니라, 그를 기반으로 한 친밀성 각본들 역시 부수적이거나 미숙하고 변태적인 것, 혹은 아예 가시화되지 않은 형태가 되어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된다.

힐을 다시 인용하면, “모든 정치분석의 기초가 되는 질문,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는 여기서도 잘 통한다. 현재 상태에서 가장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관계 곧 이성애 결혼이 가장 득을 보는 것이다. 또한 많은 조사에서 밝혀졌듯 그 관계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득을 보는 사람이 남성이다. 더 따져보자. 성적 맥락 바깥에서 헌신을 하지 않음으로써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무성애적인 친밀함의 가치를 평가할 능력이 제한됨으로써 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언어가 친밀함을 설명하기에는 빈곤한 덕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약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바탕으로 관계를 정의한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친밀함을 설명하려 하고, 어떤 것을 가치 있게 여길까? 어떤 종류의 헌신 약속을 하고, 어떤 것을 지킬까?”

위 질문들을 통해 ‘자연스러운 것, 본능적인 것, 정상적인 것’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허술한, 일방적인 가부장 섹스-젠더 체계로 구성된 관념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색 중에 우리가 ‘진실’이거나 ‘정상’이라고 전제한 여타의 관계들도 단순히 가부장제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발견과 이어질 것이다. 

5.

무당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제 나는 그가 일러준 3년의 시간을 은유로 풀이하고 싶다. ‘3년의 비연애’가 길게, 홀로 느껴지는 감각으로부터 이탈되기. 어쩌다 찾아올 ‘연애’ 역시 탈 정상-시간성, 그러니까 직선적 생애 주기의 궤도를 이탈하며 정상 가치 체계를 함께 재배치하는 사이이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다른 탈 정상-시간성의 주체들과 연결되기를.

나는 상상해본다. 소년과 소녀의 표정의 그가, 연애와 우정의 경계에 있는 관계들의 인연을 말해주는 것으로. 어쩌면 연인보다, 가족보다도 친밀할 인연들. 성적인 잣대로 연애운을 말하는 것이라면 헌신과 돌봄의 잣대로 오래 갈, 동료의 잣대로 오래 갈, 지적인 관심사와 신념으로 오래 갈, 종을 넘어 오래 갈 인연운들 말이다. 또 익숙한 가족이나 친구 관계였어도 아예 관계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갈 운은? 나 자신과의 관계는 또한 어떤가. 

내가 관심 있고 앞으로의 삶에서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새롭거나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라 낯설고 다층적인 ‘친밀성’이다. 기존 관계의 범주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친밀함의 선택지를 늘리고 싶다. 이번엔 당신에게 궁금하다. ‘정상 각본’으로 규정할수 없는, 당신만의 친밀함  각본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가?


참고 문헌

  • Jessie Bernard(1982), The future of marriage,New Haven:Yale University Press.
  • Rothblum, E. D., & Brehony, K. A.(1993). Boston Marriages: Romantic but Asexual Relationships Among Contemproary Lesbians, Amherst: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알.알 옮김(2012), 『보스턴 결혼』, 서울:이매진.
  • Rosemarie Putnam Tong, Tina Fernandes Botts(2017). Feminist Thought: A More Comprehensive Introduction, Boulder:Westview Press, 김동진 옮김(2019),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서울:학이시습.
  • Ulrich Beck, Elisabeth Beck-Gernsheim(2005). Das ganz normale Chaos der Liebe, Berlin:Suhrkamp, 배은경·권기돈·강수영 옮김(1999),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서울:새물결.
  • 전희경, 『고독사 이외의 삶을 상상하기』, 서울: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에서 주관한 ‘잘 살고 잘 죽기 프로젝트’에서 발표한 강의 내용임. 2019년 10월 10일.
  • 한채윤(2019). 『여자들의 섹스북』, 서울:이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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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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