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현(불꽃페미액션)

나에게는 이런 탈코르셋 이야기가 필요했다
탈코르셋 운동이 등장한 뒤, 여러 가지 한계와 비판지점들이 등장했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에게 지적을 받았던 부분은 짧은 머리와 화장을 하지 않는 것, 헐렁한 바지와 티셔츠를 입는 것만이 코르셋을 벗는 것으로 여겨지는 획일화된 탈코르셋 기준이었다. 탈코르셋 운동은 각자 다른 환경과 다른 몸을 가진 사람들이 다르게 받는 억압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맥락적이거나 입체적이지 않고 ‘납작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탈코르셋 운동은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한 ‘납작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꾸밈에 대한 압박 정도와 각기 다른 생각과 환경, 다른 계기와 다른 계급의 여성들이 어떻게 탈코르셋을 만나고 실천해 나가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얼음물로 샤워를 하면서도 옷은 꼭 샀다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며, 탈코르셋으로 화장품과 옷을 살 돈을 아껴서 저축하고 미래의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을 보면서, 탈코르셋은 결코 특정 계층의 여성들에게서만 터져 나오는 운동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게 만들고 후대 여성들은 태어난 그대로 신체를 느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여성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
여성들이 여성복을 불편하게 느끼는 이유는 재질이나 디자인보다도 상당 부분이 평면성에서 기인한다. 이 평면성을 기준으로 하면 옷이 입체적 인체에 착용 된다는 생각은 옷을 만들 때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164쪽
저자의 말처럼 여성들이 ‘평면’으로 몸을 인식하다가 탈코르셋 이후 드디어 ‘입체’로서의 몸을 자각하게 되는 일과 비슷하게, 탈코르셋에 동참한 여성 개개인의 서사를 읽는 것은 ‘납작하게’ 여겨지던 탈코르셋 서사를 ‘입체적으로’ 인식하게 해주었다. 온라인의 언어들 뒤에 개인이 어떤 맥락과 서사 속에서 탈코르셋을 통해 해방을 경험하고 있는지 느껴졌고, 익명의 아이디가 아닌, 감정을 가지고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탈코르셋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이 드러났다. 나에게는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다.
책에는 친구나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탈코르셋을 알게 되거나 결심하는 여성들이 등장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탈코르셋 해시태그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꾸미기를 수행하는 많은 친구 사이에서 혼자 짧은 머리에 통 큰 바지,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함께 사진을 찍은 한 여성을 본 적이 있다. 꾸미기를 수행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이 여성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분을 보며 친구들에게 페미니즘 책을 추천하고, 친구들이 물어오는 탈코르셋 운동을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일상의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한 페미니스트 여성이 보였다. 탈코일기에서 뱀희가 로아에게 그랬듯이, 때로는 서로를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알아가고 있을까? 그런 점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게 되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개입할 수 있을 만큼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준다는 점이 대단하기도 했다. 타인을 신뢰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것은 내게는 그리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때로는 탈코르셋을 주장하는 어떤 말에 상처도 받고 거부감도 든다. 그렇지만 책 속의 여성들은 나와 같이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여러 말들에 상처받지만, 탈코르셋이 필요한 이유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 말이다. 덕분에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기분이었다.
탈코르셋은 개인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따라서 자신이 꺼내든 새로운 선택지가 각자의 현실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하거나 작동하지 않는지 직접 실험해볼 수 있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63쪽
꾸미지 않은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하루 날을 잡고 꾸며보면, 이때까지 내가 누렸던 일상적 편안함이 꾸미지 않음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편안함이라는 것은 단지 몸의 편안함 뿐이 아니다. 이제는 치마를 입고 거리를 나가면 신경이 곤두선다. 자리에 앉을 때는 다리를 벌릴 수 없어서 허벅지는 항상 긴장 상태이다. 맨살이 드러난 부분은 민감해진다. 어쩌다 타인의 시선이 스치면 적의가 생겨난다. 몸을 넓게 쓸 수 없다. 꾸몄을 뿐인데 활동 공간을 작고 좁게 쓴다. 마치 내 몸이 사라질 것처럼. 지하철을 타고 내리며 타인의 몸과 내 몸이 스칠 때는 꾸미지 않았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굉장한 불쾌감이 느껴진다. 꾸미는 즉시 나 자신도 나의 몸을 ‘성적인 몸’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타인이 내 몸을 성적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것일까 봐 불쾌하다. 만 3년 동안 브래지어를 하지 않다가 하루는 결혼식 같은 곳에 가야 해서 브래지어를 착용했다가 현관문도 나서지 못하고 벗어던졌다. 너무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걸 어떻게 차고 다녔는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탈코르셋은 죽어있던 감각을 다르게 만든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당연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했던 몸이 고통에 민감해진다.
우리에게도 ‘탈코르셋’ 계보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허정숙 같은 모던걸들의 단발 운동과 현재의 탈코르셋 운동 사이의 여성들의 실천이 궁금해졌다. 일제강점기와 지금까지 약 100년 사이 많은 여성이 해왔던 여성성 탈피를 위한 개인의 변화와 투쟁의 맥락이 이어지면 어떨까. 민주화운동이 치열하던 시절, 꾸밈은 한가하고 ‘머리 빈’ 여대생들이나 하는 유흥거리라고 간주하는 분위기와 모름지기 의식 있는 여대생이라면 꾸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상이었다. ‘진보적’ 가부장제가 강요한 여성성 탈피이자 ‘개념녀’였던 것이다. 저자는 통념을 깨기 위해 되려 여성성을 수행하는 일이 소모적이라고 말한다. 현재 꾸미기에 대한 담론은 과거보다 꾸미기 압박이 심해진 만큼 논의 또한 진전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담론에 따르면 ‘진보적’ 가부장제에 저항하고자 했던 여성들의 서사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민주화 운동을 하며 외모를 꾸미지 않았던 그 여성들은 ‘개념녀’였을까?
과거에 어떤 저항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훈장이 되면 새로운 필요에 맞서 새롭게 일어난 저항에 참여할 필요를 쉽게 면제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러니 지나간 저항과 지금의 저항이 명백히 다른 맥락 위에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끊임없이 주지해야만 한다. 한편 서로 다른 맥락 위에서 저항하는 여성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사만 변주될 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또 다른 자명한 사실도 강조되어야 한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289쪽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여성들 또한, 여성성을 탈피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을 겸했다. ‘나는 레이스를 좋아했는데, 절대 드러낼 수 없었다’던 한 윗세대 페미니스트의 말을 나는 기억한다. ‘나는 여자들끼리 화장실 가는 거 정말 이해 못 하고 화냈었다’라고 말하는 또 다른 90년대 학번 페미니스트의 말도 기억한다. 분명, ‘탈코르셋’이라고 명명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흐름이 반복되고 있는데 우리는 왜 항상 같은 자리를 맴돌며 서로 상처받고 또 비슷한 논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일까? 여성성과 꾸밈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논의와 운동이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지금의 시대까지 흘러온 이유는 무엇인지, 탈코르셋 운동은 과연 이 지난한 논의의 결론을 맺게 하여 모든 세대의 여성들이 공감하는 저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하면서, 선배 여성들의 기록을 찾기가 어려워서 참 막막했다. 기록이 남아있었더라면 같은 고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나아간 생각과 논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항상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익명의 여성들이 생활에서 고군분투하는 탈코르셋 운동을 여성들의 언어로 기록한 저자의 작업이 후대 여성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이후에도 탈코르셋 운동이 등장하며 온라인에서 오갔던 수많은 논의가 기록으로 남기를 바란다. 탈코르셋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에 대해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아지자, 일각에서는 ‘탈코무새’라며 그들을 비하하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는 탈코르셋+앵무새의 신조어로 탈코르셋만 반복해서 이야기한다는 뜻이다. 원래의 단어는 ‘군무새’라며 성평등을 이야기하면 군대 이야기만 반복하며 여성이 겪는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세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든 용어였는데 ‘탈코무새’는 역으로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탈코르셋을 실천하지 않는 여성들이나, 꾸미지 않을 자유를 꾸밀 자유와 동일 선상에 놓고 ‘선택의 자유’로 탈코르셋 운동을 해석하는 사람들을 두고는 ‘백래셔’라는 말이 등장했다. 페미니즘 물결에 대한 반격(백래시)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맥락들이 오가면서 발생한 불꽃 같은, 하지만 한편으로 상대방을 쉽게 특정한 편견에 가두는 말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이 기록으로 남는다면 이 운동에 대한 사람들의 뜨거운 반응과 시대적 맥락들이 담길 수 있지 않을까?
더 다양한 사람들의 탈코르셋 실천을 위하여
또한 여성들이 특정한 외모 표현으로 자아를 드러내는 것, 탈코르셋, 꾸미기 사이의 관계가 면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여성들과 레즈비언 중 부치로 불리는 여성들의 차이가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부치’의 외모 가꾸기는 탈코르셋인가 아닌가? 탈코르셋을 하면서도 모든 외모 표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은 방식으로 ‘멋있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은 부치의 욕망이나 닿아있지 않은가? 성적지향에 따라 탈코르셋은 어떻게 평가되는가? 많은 페미니스트가 재밌어하고 또 궁금해할 주제이다.
그 외에도 노동 현장에서의 탈코르셋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등 탈코르셋을 더 많은 여성이 실천할 수 있도록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또한, ‘뚱뚱한’ 여자들의 탈코르셋은 ‘뚱뚱하지 않은 여자는 여자도 아니니 꾸미지 마라’는 여성혐오와 만났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비슷한 의미로 꾸미지 않을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노인 여성과 지체장애여성의 탈코르셋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인간으로 기능하기 전에 여성으로 먼저 기능하기를 가르치고 그것을 원하게 만드는 구조에 대해서 개인 실천 이상의 변화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또한 계속해서 논의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페미니즘은 탈코르셋 운동을 특정 세대의 좁은 맥락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맥락을 대입하며 풍부한 스토리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탈코르셋 운동이 젊은 비장애 여성 이외에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납작한 해석보다 구체적으로 노인, 장애인, 종교인, 비만 여성들의 탈코르셋을 조명하며 ‘사람대접’과 ‘여자 대접’의 차이를 드러내고, 사람대접을 받고 싶은 여성들의 탈코르셋에 대한 입체적인 해석이 나왔으면 한다. <탈코르셋:도래한 상상>이 그 문을 열었으니 이제는 모두가 탈코르셋에 대해 말하고 또 토론하면서 여성성을 거부하는 여성들의 계보를 이어나가기를, 다양한 세대, 계층, 성적 지향을 가진 여성들이 연결되기를 바란다.
(두 번째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