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코르셋을 하는 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이가현(불꽃페미액션)

탈코르셋을 하는 나는 괜찮지 않습니다

저는 92년생, 올해 한국나이로 29살이 된 페미니스트 활동가 이가현입니다. 저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주요한 관심사로 활동하면서 단체에서 성교육, 겨털대회나 삭발, 찌찌해방같은 실천들을 하고 있었기에 2018년을 강타한 위력적인 탈코르셋 운동이 신기하고 반가웠습니다. 탈코르셋의 정당성을 피력하는 글들 중 제 마음에 가장 와닿은 것은 어린 여성들이 성인 여성의 꾸밈을 보고 따라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예쁜 외모, 화장, 옷 등을 선망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성성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과정들, 그리고 예뻐지느라 포기한 음식들과 운동, 그럼으로써 점차 취약해지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인형이 되어가는 여성의 성장과정은 여성억압의 재생산 그 자체로 인식되었습니다. 

『탈코르셋:도래한 상상』의 저자 이민경 작가의 또래인 저는 작가가 책 말미에 밝혔던 삶의 맥락을 동일하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청소년기 때까지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소녀로서 존재하기를 강요받고, 또 화장이 여성의 대중적인 규범으로 자리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꾸미기가 곧 이상적인 어린 여성의 상에 대한 저항이 될 수 있었던 시기를 살았습니다. ‘꾸미지 않을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탈코르셋 운동은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맥락이 아니라 어린 여성으로서 일상적인 꾸미기노동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문화적 맥락에서 발생했습니다. 온라인 환경에서 수많은 뷰티정보에 둘러싸여 살아온 여성들에게 꾸미기가 여성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여성들을 약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여성들이 남성에게 종속되기 쉽게 만든다는 각성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당연하게 요구받는 제모에 대해 저항하고자 2016년 천하제일겨털대회를 하고,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었던 삭발을 여자 다섯명이 모여서 했던 2017년 여름까지만 해도 탈코르셋이라는 논의의 흐름을 포착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18년 화장품을 부수어 탈코르셋이라는 글씨를 쓰고 머리를 투블럭으로 자르거나 삭발한 사진과 #탈코르셋_인증 해시태그를 보면서 본격적으로 탈코르셋 운동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꾸미기와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운동이구나’ 많은 여성들이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꽃페미액션에서 해 왔던 몇가지 액션들도 이제는 탈코르셋이라는 넓은 이름에 포함시켜서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탈코르셋 인증으로 겨털인증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탈코르셋 운동이 있었기에 불꽃페미액션도 ‘가슴해방운동’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브래지어 불태우기, 상의탈의하고 농구하기 등 가슴해방 액션에 대한 아이디어는 여러 차례 나온 적이 있었지만 과연 사회에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서 직접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탈코르셋이라는 실천이 기사에 나고 대중화되면서 이제는 가슴을 드러내보이는 운동을 해도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탈코르셋 실천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 희망이 2018년 여름 첫 가슴해방액션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불꽃페미액션의 몸 해방 실천들은 ‘자기 몸 긍정주의’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여성성을 버리자는 뚜렷한 목표의식보다는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겨털을 보이기도 했고, 삭발을 한 상태에서 화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편견을 깨기 때문에 묘하게 이상해 보이는, 통일되지 않은 이미지들을 겹쳐쓰고 ‘여성인 우리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 ‘남자는 되고 여자는 왜 안 되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며 가능성의 영역을 넓히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여성에게도 넓은 스펙트럼의 외모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꽃페미액션의 몸 해방 액션들이 여성성을 버림으로써 ‘젠더’를 해체하고자[1] 하는 탈코르셋 운동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던 몸을 쟁취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탈코르셋 운동의 목적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지만 꾸미기 자체는 자기표현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것이 탈코르셋 운동과의 차이점이었습니다. 

[1] 누군가는 탈코르셋 운동을 통해 젠더를 해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꾸미기에 투자할 시간과 비용을 자기개발이나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의 젠더 해체는 학계에서 합의된 개념의 젠더가 아닌, 성별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질 정도의 성평등을 이룩해 성별 구분을 무화하자는 의미와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또 불꽃페미액션에서는 2017년부터 ‘코르셋 빨래하기’라는 성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코르셋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버릴 코르셋은 버리고, 포기하기 어렵거나 장점으로 여겨지는 것은 나의 개성으로 받아들이자고 말해왔습니다. 어떤 것들이 여성에 대한 억압인지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페미니즘의 실천으로 한 단계 나아갔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접근하는 방식을 추구했기에 진짜 페미와 가짜 페미를 나누거나 페미니스트들끼리 상대방의 실천을 평가하는 일도 자제해 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 앞선 실천을 한 사람이 존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미안해 하거나 부끄러워 하는 탈코르셋 운동의 문화와는 다른 부분이 또 존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화장을 하지 않고 짧은 머리를 하고 편한 옷을 입는 것으로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함께하고 싶고 함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삭발을 하고 머리가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떤 머리를 할 것인가 고민하던 차였고, 좀 더 일상적으로 획일화된 여성들의 외모에 균열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에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키가 작다는 콤플렉스로 20대 초반에 샀던 하이힐들을 모두 버렸습니다. 전남자친구로부터 선물받았던 호피무늬 하이힐을 볼 때에는, ‘얘는 이걸 무슨 생각으로 사줬을까, 잘 걷지도 못했는데’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이힐을 신고 대학 행사를 마무리했을 때에는 발이 너무 아파서 친구가 부축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내리막길을 걸어갈 수 없었던 스스로가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인형으로 존재했고, 예쁘고 잘 꾸미면서 옷도 잘 입는 여자를 대하는 남성들의 조심스러운 언행을 즐겼던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정말 아득한 시절이지만 멀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하이힐을 버리면서 한 생각은 ‘더 이상 발목이 꺾이고 발뒷꿈치가 까지고 발뼈에 무리가 가는 일은 없겠구나’ 였습니다. 하이힐을 신었을 때의 고통이 떠올랐습니다. 고통과 작별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기도 하면서 속이 시원했습니다.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투블럭으로 자르고, 3개월마다 한 번씩 미용실에서 투블럭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6개월에 한번씩 미용실을 가도 상관이 없었는데 요새는 3개월만 되어도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냐’는 말을 듣습니다. 남성들은 1개월에 한번씩 미용실을 간다는 것을 최근에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남성이 내는 비용보다 2천원에서 5천원 더 비싼 ‘여성요금’을 내고 머리를 자릅니다. 그럴 때에는 여성용품에는 더 낮은 질이거나 같은 질이면 더 비싼 요금을 매긴다는 ‘핑크택스(pink tax)’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탈코르셋이 일깨워주는 진실의 한 단면입니다.

탈코르셋을 한 이후 직장이었던 영어학원과 대안학교에서 일하면서 꾸미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매 순간 매 공간에서 긴장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남자에요, 여자에요?”
“이 형아는 몇살이에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을 받으며 제가 아이들의 머릿속에 이제 막 형성되어 가는 성별이분법에 균열을 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찌보면 저에게 탈코르셋은 쉽고 간단한 실천이었지만, 탈코르셋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어렵고 힘든 실천을 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실천이겠지만 말입니다.

뚱뚱한 여자의 꾸미기와 탈코르셋

탈코르셋 논의가 시작된 초기에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활발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탈코르셋은 화장이나 긴 머리와 같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외모나 애교있는 말투, 행동 등 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을 거부함으로써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좀 더 나아가서는 ‘젠더’ 해체로 나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외모에 대해 사람마다 느끼는 억압이 다르고 누군가에게 꾸밈이나 노출은 저항이 될 수 있다는 맥락이 삭제된다는 우려가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들은 화장을 하거나 힐을 신은 여성 유아들의 사진, 성인 여성의 섹시한 모습을 따라하는 어린이들의 영상들을 곳곳에 공유하며 꾸밈과 노출은 저항이 될 수 없으며 뒷세대가 받는 억압을 재생산한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저 또한 ‘주체적 섹시’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심하며 결국 여성해방은 꾸미지 않음으로써 더 가까이 온다는 견해를 견고히 해 왔습니다. 

지난해 외모다양성을 주제로 한 제5회 다다름필름파티에서는 <The fat body (in)visible>이라는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뚱뚱하다는 이유만으로 없는 존재로 취급되던 여성들이 자신만의 꾸미기와 스타일링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영화가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에  게스트로 참여한 잡지 <66100> 김지양 편집장님께 질문했습니다.

“왜 항상 뚱뚱한 여성들의 해방은 꾸미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되나요?”

저는 김지양님께서 플러스사이즈 모델로서 활동하면서 탈코르셋 운동과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고, 그럼에도 간혹 트위터에서 ‘꾸밈을 전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그 분의 생각이 궁금했습니다. 언젠가는 이런 질문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며 김지양님은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 인간이라는 범주가 있습니다.
뚱뚱한 여자는 사회적으로 모든 인간범주의 바깥에 있습니다.
인간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에너지가 쌓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성으로 존재를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함으로써 (꾸미기로써)
에너지를 채우고 그 에너지로 다음 단계인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탈코르셋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맥락이 있습니다.”[2]

[2] 당시 들은 내용을 복기하여 적은 것이므로 실제 말씀하신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김지양님은 본인도 화장을 하지 않고 편한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가는 일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예쁘지 않습니다』라는 책을 펴내신 유튜버 배리나님 또한 위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계시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꾸미기가 한 인간의 생에서 종착역이 아니라 더 나은 상태로 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뻐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여성혐오 사회에서 단 한번도 예뻐지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왜 사회는 여성성을 수행해야만 그 존재를 인식하는지 다시금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탈코르셋이 자기혐오가 되지 않으려면

논의가 좀 더 진전되자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코르셋을 찬 개인 말고 코르셋을 차게 하는 사회구조를 비판해라’고 항변하는 여성들에게 ‘구조를 패고 싶으니 그 구조에서 나와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체적 꾸밈’을 실천하는 여성들을 비웃는 글과 영상들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빠르게 회자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꾸미기를 했던 자신의 사진을 ‘흑역사’로 전시하고 비웃는 모습을 보며 우에노 치즈코가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치즈코는 ‘성별이원적 구조에서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여성에게 여성혐오는 자신을 혐오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합니다. 탈코르셋 운동이 없었을 때 여성들은 예쁘지 않은 자신을 혐오했지만, 탈코르셋 운동에서는 꾸미기를 수행하거나 수행했던 자신과 타인을 혐오하기 시작했습니다. 

탈코르셋을 하지 않는 친구에게 화가 난다며 온라인에 쓰여진 글은 대부분 이런 같은 흐름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안해? 탈코르셋이 이렇게 정당한데도 왜 계속해서 외모를 꾸미는 거야? 너는 결국 남자를 못 버린거야. 그럼 그냥 계속 그렇게 살아.’  물론 (일부는 마치 모든 탈코르셋한 사람들이 저런 말을 한 것처럼 악마화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쉽지 않은 탈코르셋의 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내 마음처럼 바뀌지 않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 답답한 나머지 누군가는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너는 도태될 것이다’라는 저주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될까요?

이런 칼날같은 말 속에서 탈코르셋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여성들의 마음은 괜찮을까요? 저는 괜찮지 않습니다. 꾸미는 사람을 단정짓고 비난하는 말들은 탈코르셋을 실천하고 있는 저에게도 내상을 입힙니다. 페미니즘은 일상적으로 저를 옥죄었던 남성중심사회의 평가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여성들을 평가하는 말들이 ‘과하다’고 느낍니다.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것은 끊임없는 협상의 과정이기에 어느 영역은 타협해 나가고 또 어느 영역은 타협하지 않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탈코르셋과 관련해 작은 타협조차 허용하지 않는 말들에는 숨이 막힙니다. 저는 무섭습니다. 꾸밈을 했던 지난 날의 스스로를 비웃고, 또 꾸미기를 수행하는 다른 여성들을 조롱하는 글과 영상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것을 보면서 나 또한 어떤 이유로든 비난받고 조롱받을까봐 불안합니다. 

코르셋을 벗는 것은 옳지만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탈코르셋 운동이 옳다는 것이 ‘탈코르셋’하지 않는 여성들이 틀리다는 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꾸미는 여성들을 ‘백래셔’라고 부른다고 탈코르셋 운동이 더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탈코르셋 운동은 그 자체로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운동이며,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개인을 비난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닌 열 사람의 한 걸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스스로가 탈코르셋 주체로서 존재함과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이 탈코르셋을 경험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길거리에서 꾸미지 않는다고 여성을 멸시하거나 차별, 조롱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여성의 상의탈의만 음란물로 간주해 삭제하는 성차별적 소셜미디어 규정을 수정해야 합니다. ‘용모단정’ 따위로 외모를 평가하겠다는 메시지를 대놓고 드러내는 차별적인 채용 규정을, 꾸밈노동을 강제하는 근무조건을 철폐해야 합니다. 여성의 표준적인 외모를 설정하고 그에 벗어나는 외모들을 열등하거나 못난 것으로 규정하여 변형하고 훼손할 것을 주문하는 성형광고, 각종 다이어트 보조제나 다이어트 보조기구 광고를 삭제해야 합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외모평가에 ‘이 또한 여성혐오’라고 맞서야 합니다. 앞선 실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길을 넓히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아닐까요? 

결국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속도의 차이가 있음을 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사람의 열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변화의 밑바탕이 될 테니 말입니다. 또, 사람으로서 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돌아보고, 인형이었던 과거의 내 모습을 미워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고된 과정을 지나 온 스스로를 격려하고 다독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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