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권 시위와 출퇴근의 정치

🎨윤소이

장애인 이동권시위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는 2001년 오이도역 참사를 보도하는 뉴스의 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오이도역 참사는 70대 장애인 부부가 탑승한 장애인 리프트가 추락하여 아내가 사망하고 남편은 중상을 입은 사건이었다. 참사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오이도역의 장애인 리프트는 이전부터 잦은 고장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장애인 리프트는 ‘승강기’로 분류되지 않아 전문기관의 검사를 강제하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2001년의 오이도역 참사를 계기로 모든 지하철 역사 내 ‘안전한’ 승강기의 설치와 저상버스의 도입을 요구해온 장애인이동권 투쟁은 20여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는데, 오랜 투쟁의 결과로 지난 2021년 12월 31일에는 드디어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의 개정안이 통과된 바 있다. 하지만 법을 실제로 집행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안’은 여전히 확보되지 못하였기에,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의 개정안의 통과 이후에도 장애인이동권시위의 투쟁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지난 12월에는 이동권시위를 앞두고 혜화역 엘리베이터의 운행이 임시 중단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혜화역은 지난 1999년에 휠체어 이동용 리프트 사고가 발생했던 곳으로, 이동권시위대는 2021년 겨울에도 혜화역에서 집회를 신고하였으나 서울교통공사는 다수 시민을 이동권시위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시위대가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SNS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었으나, 서울교통공사 측은 “출근길 시민들의 큰 불편”이 ‘우려’되어 어쩔 수 없었다는 ‘해명’을 하면서 끝내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다수 시민의 불편함’을 근거로 한 이동권시위대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이준석 대표의 발언(“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다”)으로 정점을 기록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장연의 시위를 조직적으로 막고자 한 교통공사 측의 내부 문건이 공개되어 언론보도가 이뤄지기도 했으나 여전히 공식적인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장연의 박경석 대표가 SNS를 통해 ‘출근길에 불편을 겪은 다수 시민’에게 사과문을 게시하는 일이 있었다. 본고는 이렇게 사과받아야 하는 사람과 사과해야 하는 사람을 뒤바꾸는 한국 사회의 현실과 관련하여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자 한다. 도대체 오늘날 ‘다수 시민의 출근길’이 단 몇 분이라도 멈추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출근길’이 상징하는 특권이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만들어진 걸까?

‘강제적 건강함’을 체현한 ‘K-직장인’의 출근길 

한국 사회에서 출근길의 시간이 상징하는 바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출근길의 신체들이 대중적으로 재현되어온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재현은 ‘존경’이라는 정동과 관련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화제가 되었던 ‘1990년 시민들의 출근길 풍경’과 관련한 대중들의 반응은 이 같은 ‘존경’의 정동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국에 집중폭우 피해가 심각했던 2020년 여름에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지금보다 비가 더 많이 내렸던 90년대 시민들의 출근길”이라는 제목의 움짤이 화제가 된 적 있다. 1990년 당시 ‘서울 대홍수’로 불렸던 상황을 담고 있는 자료화면 속 인물들은 허리 위 까지 물이 차오르는 와중에도 넥타이 정장을 입고 출근을 하고 있다. 오전 ‘9시 9분’의 시간이 함께 기록되어있는 자료화면 속 인물들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방을 껴안고선 노량진역 부근을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이다. 2020년의 한국 사회에서 이 같은 30년 전 자료화면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K-직장인’의 역사를 ‘고증’하는 ‘움짤’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1990 서울 대홍수 출근길 풍경’을 둘러싼 반응은 ‘충격’과 동시에 ‘리스펙’이라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예를 들어 해당 자료 화면이 공개된 유튜브 영상(페이지 보기)의 댓글란에는 ‘어떻게 재난 상황에서도 저럴 수 있나?’라는 의문과 물음과 동시에 ‘저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만들어졌다’라는 ‘인정’과 ‘찬양’의 표현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처럼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하는 직장인과 그의 ‘공로’를 찬양하는 대중적 담론 속에서 주목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강인한’ 직장인의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면 쉬는 게 아니라, 아파도 쉬지 않고, 심지어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출근을 할 수 있는 직장인의 ‘강인함’은 오늘날의 ‘국가’를 만들어낸 ‘국민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한국 사회에서 매일 아침 9시까지 회사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다시 다음 날 아침 9시에 출근하러 가는 ‘K-직장인’의 신체는 인간이 아니라 ‘좀비’로 비유되면서 ‘퇴사’만을 기다리는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상상되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출근과 퇴근을 ‘빠짐없이’ 반복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언제나 이미 ‘강인한 국민성(“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의 관계 속에서 재현되어왔다. 즉, 한국 사회에서 ‘아침 출근길’이라는 시간이 재현되는 방식은 ‘강제적 건강함’을 체현한 정상 신체들을 생산해내는 기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강제적 건강함’이라는 개념은 미국의 퀴어장애학자인 로버트 맥루어와 애비 윌커슨(2003)이 제안한 것으로, 이들은 미국 사회에서 ‘강제적 이성애’라는 규범만큼이나 강력하게 작동하는 ‘강제적 건강함(혹은 ‘건실함’) compulsory able-bodiedness​’의 문제에 도전하고자 했다. 맥루어와 윌커슨이 보기에 포스트-911이라는 국면에서 ‘훌륭한 미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던 프로젝트는 성소수자들이나 장애인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해냈는데, 장애에도 ‘불구하고’ 쌍둥이 빌딩을 탈출한 사람의 ‘강인함’을 찬양하는 ‘장애 극복 서사’가 대표적이었다. 쌍둥이빌딩의 붕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생존자들을 ‘강인한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듦으로써 사회적인 트라우마를 봉합했던 미국의 내셔널리즘은 ‘건강한 신체’와 ‘아프고 약한 몸’이라는 이분법을 ‘시민과 비시민’의 이분법과 일치시키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911 이후에 미국이 전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경제적인 지배로서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군사적인 지배로서 세계 곳곳에 미군을 파견하는 ‘국제 정치’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건강한 신체를 강제하는 ‘미국인 정체성의 재편’을 통한 내셔널리즘의 강화라는 역사적인 맥락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맥루어와 윌커슨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그리고 군사주의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새로운 민족주의’에 관한 포괄적인 비판 보다 ‘장애’에 관한 이론을 그 중심으로 이동시키기를 제안한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강인한 직장인’의 신체가 ‘한국인’의 국민성으로 통합되고 있는 현실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신체’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해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유급병가가 가능한 직장은 여전히 60퍼센트 수준이며, 비정규직의 경우 20퍼센트 미만에 불과한 현실(2020년 7월 기준)(기사 보기)을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를 계기로, 국가가 먼저 나서서 노동자들에게 “아프면 일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라.”는 ‘연설’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휴식’을 당연한 권리로서 보장하고 있는 직장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는 계속해서 ‘아프면 쉴 권리’에 관한 논의들이 꾸준히 제기(기사 보기)되고 있으나(기사 보기), 지난 2021년에 처음으로 시범사업이 시작된 ‘상병수당제도’는 여전히 그 실효성의 측면에서 사각지대가 비판받는 중이다(기사 보기). 정부에서 시범사업으로 내놓은 ‘한국형 상병수당’은 하루에 4만 원에 불과한 금액만을 지급하고 있으며, 플랫폼 노동자 등 고용 형태 등과 관련하여 취업 사실을 증빙하지 못하여 차별이 발생할 가능성이 문제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질병과 함께 살아가는 신체’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를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둘러싼 풍경과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면, 시위대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해지는 다수 시민의 사회적 ‘특권’은 ‘강제적 건강함’을 체현한 노동자의 신체를 생산해온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출근길의 ‘다수 시민’이 느꼈을 ‘찰나의’ 불편함이 그토록 ‘커다란’ 문제로서 특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강인한 직장인’의 신체를 기준으로 하여 공적공간의 구조를 설계해왔음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페미니스트 철학자 사라 아메드는 ‘시민권’의 개념을 특정한 공간에 ‘어떤 신체의 행복을 가장 먼저 오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술(technology)’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Ahmed, 2014: 225)한 바 있다. 특정한 장소에 어떤 신체들의 느낌들은 ‘자연스럽게’ 흐르고, 특정한 신체들의 느낌들은 흐르지 못한 채 가로막히는 문제는 그 장소를 어떤 신체들을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화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술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불행할 의지와 장애를 욕망하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2022년 한국 사회에서 지하철이라는 공간에 ‘건강한 신체’의 행복을 가장 먼저 오게 하도록 결정하는 기술은 다름 아닌 ‘최대 다수 최대행복’의 원칙에 의해 지지받고, 정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에 이준석 대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향해 “최대 다수의 불행과 불편을 야기해야 본인들의 주장이 관철된다는 비문명적 관점으로 불법 시위를 지속하고 있다”는 SNS 글을 게시하였는데, 이러한 주장 속에서 다수 시민의 ‘행복’을 위협하는 행위자는 그 자체로 ‘비문명’과 동일시되면서 ‘비시민화’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발언을 통해 ‘증폭’되고 유통되는 것은 ‘다수 시민’의 신체가 느낀 아주 ‘찰나’의 불편함이며, 시위대가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물리적인 위협과 협박, 폭력 피해 등 정말로 심각한 수준의 생존 가능성의 문제는 ‘소수의 고통’이라는 이유로 매끄럽게 ‘사소화’ 되어버린다.   

아메드의 경우, 이처럼 ‘다수의 쾌락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행복의 약속’이 어떻게 해서 소수자들의 고통을 억압해 왔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한 바 있다. 특히 아메드는 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인용하면서 “특정한 “우리”가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하는 구조”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어슐러 르귄이 집필한 초단편 소설로, 화려한 축제와 눈부신 과학기술과 온갖 즐거움이 매일같이 넘쳐흐르는 도시인 ‘오멜라스’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이다(페이지 보기). 여기서 말하는 ‘비밀’이란, 오멜라스의 휘황찬란한 공공건물 속 어느 지하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이 지하실에는 어느 ‘아이’ 한 명이 갇혀 있는데, 이 아이의 존재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음에도 결코 입 밖으로 말하지 않는 도시의 ‘유일한’ 불행을 상징한다. 이로써 소설 초반부에 묘사되었던 오멜라스의 ‘행복’을 지탱하는 ‘사회 계약’이란, 이렇게 ‘아이’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데에 ‘합의’한 시민들의 약속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아메드는 불행에 대한 무관심이 어떻게 해서 “텅 비어있는 행복의 기호에 몸담을 수 없는 사람들의 비참을 국지화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지 논한다.

“오멜라스에서 세상의 행복은 그 아이의 불행에 대한 무관심을 필수 전제로 한다. 아이의 불행이 도덕의 나침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모든 좋은 디스토피아들과 마찬가지로, 오멜라스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분명 존재하지 않는 이 이야기 속의 세계에서 우리 세계의 모습을 찾아보라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의 가능성을 찾아보라고 요청한다. 오멜라스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행복의 약속이 얼마나 고통의 국지화에 의존하는지 알 수 있다. 특정한 “우리”가 좋은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고독의 우물>>의 암시적 언어로 돌아가 보면, “모두”의 행복은 비참을 벽 안에 가둔다. 행복의 잘못은 그것이 분명 텅 비어있는 행복의 기호에 몸담을 수 없는 사람들(그 형태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의 비참을 국지화하고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그런 행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에 감화돼야 한다. 감화를 위해 꼭 타인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느낌을 비슷한 느낌으로 되돌려주는 공감은 거의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는 접촉방식이다. 행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저 무관심을 거부하고, 우리 자신이 변용된다 하더라도, 기꺼이 불행에 근접해 있겠다는 의욕만 있으면 된다(Ahmed, [2010]2021: 352). ”

물론, 공리주의가 약속하는 ‘행복의 극대화’에 대한 아메드의 비판은 ‘트롤리의 딜레마’와 같은 기존의 사고실험에서 질문되어온 ‘전통적인’ 도덕적 논쟁(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것은 정당한가?)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느껴지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메드의 이러한 비판은 단순히 공리주의가 정당한가 아닌가, 선로의 방향을 바꿀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하는 데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행복이라는 감정 자체가 어떻게 해서 고통과 불행, 불쾌의 영역을 삶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몰아내고 벽장 안에 가두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벽장이 어떻게 해서 어떤 신체들의 감정을 흐르지 못하게 만드는지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아메드가 보기에 공리주의가 정말로 ‘나쁜’ 이유는 쾌/불쾌라는 정동, 느낌의 문제를 선/악의 도덕적 문제와 일치시키고, 고통과 불행과 관련된 정동들, 그리고 그러한 정동들을 끌어내는 신체들을 ‘삶’과 ‘일상’의 바깥으로 추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메드는 이렇게 오멜라스의 세계 속 ‘무관심’을 거부하려면 고통에 기꺼이 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기꺼이 불행에 근접하고자 하는 의지를 실천하는 것이다. 아메드가 보기에 ‘오멜라스’를 떠나는 신체들이 되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려고 할 필요도 없고, 느낌을 그저 비슷한 느낌으로 되돌려 주려고 할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이 느끼는 불행이라는 느낌을 ‘선/악’이라는 이분법에 가두어서 삶의 ‘바깥’으로 몰아내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느낌에 기꺼이 근접해 있고자 하는 의지만으로도 괜찮다. 어떤 불행에 가까운 느낌에 대해서 ‘올바른’, ‘올바르지 못한’ 느낌이라는 판단을 중지하고, 그 느낌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신체들 간의 관계를 맺는 방식이 변화되는 중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메드의 제안(‘기꺼이 불행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은 앞서 잠시 살펴본 맥루어의 개념인 “장애를 욕망하기”와도 연결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해당 글에서 맥루어와 윌커슨이 관심을 두는 특히 사회적인 집단은 미국 사회에서 ‘HIV/AIDS’와 함께 사는 사람들(“a person living with AIDS”)인데, 이들의 삶 속에서 ‘퀴어’로서의 경험과 ‘장애인’으로서의 경험은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위 ‘만성질병’을 가졌다는 이유로 이상적인 ‘건강함’의 기준에 미달하는 비시민으로 타자화되는 동시에 비정상적인 성적 실천을 통해 질병을 옮기면서 ‘가정’을 파괴할 수도 있는 존재들로 묘사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애인으로서의 경험과 퀴어로서의 경험을 넘나들며 형성되는 사회적 집단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맥루어와 윌커슨이 고안해낸 개념이 바로 “퀴어 장애 의식(queer crip consciousness)”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은 단순히 ‘HIV/AIDS’와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당사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정체성이라기보다는, 보다 창조적이고 확장적이며 정의로운 공동체를 향한 대안적인 상상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욕망(desiring)의 문제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맥루어와 윌커슨은 비 착취적인 방식으로 다수의 육체성들이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현실화할 수 있는 실천이자, “자유의 실천​ (practices of freedom)”이라​ 는 의미에서 “장애를 욕망하기”를 제안한다. 요컨대, 근대 국민국가의 역사를 ‘크리핑(cripping)’ 혹은 ‘퀴어링(queering)’한다는 것은, 자연적이고 매끈하고 단일한 것으로 보이는 서사들과 ‘불화’하는 몸들을 읽어냄으로써 신자유주의나 세계화가 은폐해왔던 이데올로기들, ‘환상’을 폭로하는 정치에 다름 아니다.

이를 위해 맥루어와 윌커슨이 주목하는 담론은 ‘질병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특히 질병과 장애와 함께 사는 퀴어들의 이야기는 ‘질병 서사’라는 글쓰기 장르조차 독점해온 건강한-백인-이성애자들의 특권을 뒤흔들면서 근본적으로 질병에 관한 사유 자체를 다르게 만들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건강한-백인-이성애자들에게 있어서 질병 경험이란 ‘평범한 삶’을 방해하고 가로막는 것으로 재현되면서, 결과적으로 질병 경험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거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특별한 선물’로 의미화될 뿐이다. 하지만, 퀴어들의 질병 서사의 경우 삶에 있어서 질병이나 장애는 (특별하고 일시적인 사건이라기보단) 다른 종류의 위기나 갈등 상황 그리고 도전들과의 계속된 뒤섞임으로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통해 구성된 서사는 앞서 살펴보았던 “자유의 실천”이라는 맥락에서 대안적인 공동체를 향한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하는 기획과도 만날 수 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신체들이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공동체의 ‘약속’으로서 ‘장애를 욕망하기’가 갖는 의미를 모색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가며

사실 처음에 이 글을 기획할 때만 하더라도 출근길 시위를 둘러싼 담론이 이렇게까지 매일매일 다른 국면에 접어들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기획 초기에만 하더라도 이준석 대표가 정말로 차기 ‘여당’의 대표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들을 접할 때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글을 시작해야 하는 걸지 고민이 점점 불어났다. 이러한 막막함이 커져갈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다큐멘터리가 <버스를 타자!>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2017년에 별세한 故 박종필 감독의 작품으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의 초기상황이 기록된 영상이다(기사 보기). 이 영상 속 20년 전 서울에는 ‘저상 버스’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20년이 지난 지금도 ‘저상 버스’의 도입률은 아직 60퍼센트 수준이다(기사 보기). 현실이 변화하는 속도라는 게 정말로 더디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상을 끝까지 보고 나면, 오히려 궁금해지는 것은 다음 10년, 20년, 30년이다. 그리고 그렇게 앞으로를 궁금해하는 마음으로 글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뀌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을 섣불리 비관하지 않으면서 무조건적인 낙관을 하지도 않는 힘. 그런 힘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우리’들은 불행에 기꺼이 근접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 김미영(2020년 7월 3일). “[차별받는 ‘아프면 쉴 권리’] 유급병가 정규직 60%, 비정규직 19%만 적용”. 매일노동뉴스.
  • 다슬(2021년 10월 30일). “우리는 왜 아파도 쉴 수 없나?”. 프레시안.
  • 박준용(2022년 1월 18일). “하루 4만4천원 ‘한국형 상병수당’…아플 때 맘편히 쉴 수 있을까?”. 한겨레.
  • 비마이너(2022년 4월 4일). “고 박종필 감독 다큐 ‘버스를 타자’ 무료 공개”. 비마이너.
  • 예병정(2021년 7월 12일). “[이슈분석]서울시 장애인 저상버스 도입률 65%…2025년 100%달성 가능할까”. 파이낸셜뉴스.
  • 원종욱(2021년 8월 19일). “[기고] 아프면 쉴 권리”. 세계일보.
  • Ahmed, Sara(2010). The Promise of Happiness, Duke University Press, 성정혜·이경란 옮김(2021),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서울: 후마니타스.
  • Ahmed, Sara(201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 
  • Robert McRuer, Abby L. Wilkerson(2003). “Introduction”, GLQ: A Journal of Lesbian and Gay Studies, 9(1-2), pp.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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