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년배(contemporaries)의 여성서사 운동

👩‍💻허주영

1. 우리는 모두 엄격하게 각자의 자리를 지켰지

새로운 영화가 스크린에 오르면, 온라인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수많은 것을 발화하기 시작한다. 여성 인물이 주연이었는지, 대도시에 사는지, 전문직인지, 결혼을 했는지, 중산층인지 또는 그 반대인지 부터 감독의 성별은 무엇이었는지, 작업 환경은 어땠는지, 고용과 임금이 평등한지,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시했는지 등 실시간으로 발화한다. 여성이라는 기표에 엉켜 붙어 있는 혐오의 수사들이 실제 여성의 삶을 어떻게 왜곡하고 동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발화하는 과정은 온라인 페미니즘에 참여하는 동년배들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만들어냈다. 여성서사 운동은 이러한 공통감각을 기반으로 실제 여성들의 삶의 재현을 요청하며 시작되었지만, 서사의 문제뿐만 아니라 서사를 생산하는 구조의 문제를 발견하고 확대하면서 주요한 페미니즘 무브먼트로 자리 잡았다.

온라인 페미니즘에서 개인들의 참여는 의제를 결집하고 새로운 운동을 구성한다.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촉진되는 발화의 장은 정치적 공동체의 성격과 의제 설정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산하는 개인들의 힘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성되는 공통감각은 각기 다른 시간대와 공간을 하나의 타임라인에 섞어 놓는다. 온라인에서 발화되는 경험들은 기존의 주류 매체가 드러내는 상투적 여성 이미지의 문제점들을 제기하며 새로운 여성서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기반이 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여성서사를 요청하는 목소리는 온라인 페미니즘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공통된 감각을 서사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서사로 인정하거나 또는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련의 조건들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영화를 팔아줘야 하는지 불매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엄격하지만 유연하게 세워진 윤리적 기준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건과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가까운 과거에 올바른 여성서사의 기준으로 자주 호명되고 쉽게 비판받았던 백델 테스트(Bechdel test)는 더 이상 흥미를 유발하는 좋은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고, 이제는 오히려 가부장제로 귀결되지 않는 여성들의 관계와 더 나은 긍정적인 삶의 모델을 요청한다.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을 동년배(contemporaries)로 호명하려는 시도는 세대론적 구분짓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영영페미, 메갈세대 페미니스트 등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을 호명하려는, 꽤 출처가 분명한 움직임은 동년배들의 각기 다른 경험과 공통감각을 설명하기에 부족하거나 지나치다. 동시대 페미니즘에 참여하고 발화하는 자들이 공유하는 공통감각은 사건에 따라 높고 낮은 물결을 생성하며,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동시대의 서사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서사 운동은 ‘나’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여성 인물을 보고, 읽고, 쓰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즉시 고정적이거나 초역사적인 여성 인물 재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성서사 운동은 대문자 여성이나 시대의 대표성이 아닌, 동시대를 체현한 인물의 재현에 대한 요청에 가깝다. 이는 동년배들이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을 보는 관점이 모두 통합된 단 하나의 서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건들이 만들어낸 동시대적 감각은 비-고정적이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동시대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주체를 요구한다. 더 많은 여성서사를 원하는 주체들은 서사의 소비자이자 구매자로서 서사를 생산하는 매체들에 긍정적인 응답을 이끌어내며, 주요 미디어 서사의 흐름에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기존 주류매체의 서사들이 “여성”을 남성의 반대항으로서 타자의 자리에 여전히 머무르게 했다면, 여성서사 운동이 추구하는 것은 타자의 자리가 아닌, 주류의 장의 주체이자 대문자 자본의 자리이다.

2. 소비자의 자리

온라인 페미니즘에서의 여성서사 운동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관계와 위치 그리고 일상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어벤져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 2019)> 속 여성 히어로의 모습에 임파워먼트(empowerment)를 얻기도 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이 모든 것은 소비를 증명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소비의 증명은 온라인에서, 주로 SNS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영화표, 책 표지, 굿즈 등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거나, 다량의 표를 구매하는 ‘영혼 보내기(영혼 관람)’와 같은 실천을 인증하는 행위는 여성서사를 사고파는 하나의 동시대적 연대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 여성이 만들고 참여한 작업이자 여성서사가 될 수 있는 일련의 조건을 통과한 창작물은 무조건 팔아줘야 한다는 흐름이 만든 현상들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여성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더 나아가 주류 매체가 여성들이 원하는 더 많은 콘텐츠를 생산하게 함으로써 여성혐오적 콘텐츠 생산을 막는다. “잘 안/팔리는” 또는 “내가 안/구매할” 콘텐츠의 조건에서 ‘생물학적 여성’은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작동하고, 자본 시장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와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소비를 통해 찾은 것이다. 즉 여성서사 운동에서 제시하는 일련의 규칙과 조건들을 소비자로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여성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을 위한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한 개인의 요구들은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분출되고 동년배 페미니스트이자 소비자들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서사를 만들기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각자 개인의 요구들이 투영된 단 하나의 서사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복잡한 동시대적 감각들을 통한 요구들은 여성서사를 말하면 말할수록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다. 분명한 형태로 빠르게 전달되어야 하는 온라인 공론장에 남게 되는 것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지갑을 열고 닫는 소비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단순하고 납작한 조건들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플로우에서 모두 흘러 떠내려가고 역사의 기록 방식처럼 타임라인에 남는 것은 다양한 서사가 아니라 단순하지만 엄격한 소비자일 수도 있다.

기존의 여성혐오적 재현은 맥락이 아니라 그 재현 자체로서 평가받게 되고, 몇 개의 조건이 적힌 체크 리스트를 손에 쥔 여성서사의 수호자 또는 검열자들은 소비자로서 클레임을 걸거나 “고나리” 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해 왔다. 또 이것은 소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비를 온라인 공간에 전시하고 영업하는 것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온라인 공간은 새로 만들어진 콘텐츠가 진짜 여성서사인지 또는 여성서사에 준하는지 또는 기존의 구조를 반복하는 것인지 평가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여성이 만들고 참여하는 콘텐츠의 성공과 시장을 확장하는데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서사를 소비하는 단순한 구매자가 아니라 자본 투자자로서 클레임을 걸고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시장에 영향을 주는 소비 주체가 되는 것이다.

3. 대문자 자본을 획득하기

한국에서는 소설 『82년생 김지영』, 『다른 사람』, 『현남오빠에게』 영화 <걸캅스>, <미쓰백>,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등 여성 소비자에게 호응을 얻은 작업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분명 엔터테인먼트로서 훌륭하고 더 나아가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등 여성서사를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임파워먼트를 얻는다. 그러나 자이슬러(Andi Zeisler)는 시장주의 문화가 페미니즘을 ‘브랜드화’ 시켰다고 명명하고, 브랜드를 더 매력적인 것으로 ‘재구축(rebrand)’ 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이 하나의 이미지 또는 몇 마디의 말로 환원되어 복잡하고 불편한 요소들, 즉 매력적이지 않은 요소들을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지적했다. 소비 행위는 여성을 ‘인간’으로 대접하면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매력적인 이미지들은 오히려 정치적인 목소리를 주변화시키고, 정치 사회적 문제들은 단순히 나열되어 뼈대 없이 플로우 위에서 점멸하게 된다.

예컨대 영화 <걸캅스>가 개봉되고 트위터에서 <걸캅스>가 ‘찐’여성서사인지 아닌지 판별이 시작되었는데, 약에 취해 무력화된 여성의 신체를 훑듯이 전시한 카메라 워킹을 들어 ‘역시 남성 감독의 시각, 여성서사 탈락’ 판결을 내거나 평소 여성이 맡아온 주부 역할을 성 반전해 비하하는 것이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느냐는 비판, 그리고 ‘남성 중심 오락영화와 비교했을 때, 그 정도는 봐줘야 한다’는 반론이 타임라인에 등장했다. <걸캅스>는 여자경찰들이 범인을 유쾌하게 잡는 서사 안에서,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예컨대 ‘디지털 성범죄 정말 심각한 문제’, ‘여성 경찰은 남성 경찰보다 여성 문제에 더욱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는 역량있음’ 등 트위터에서 허구한 날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적거나 나열하는 식으로 장면을 만들었다. 이는 오락영화로서 충분히 웃겼지만, 웃음 뒤에 남는 공허함은, 그래서 <걸캅스>는 ‘여성 경찰’과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대해 무슨말을 했는가 질문을 던진다.

코흐랜(Kira Cochrane)은 제4물결 페미니즘에서 언어적 전략의 변화로서 유머는 중요하지만, 대중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무해한 페미니즘을 창출하고 여성들의 삶과 권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의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더 문제적인 것은 다면적인 해석이 필요한 문제들을 마주하는 페미니즘의 손쉬운 측면만을 보여주고, 탈정치화시키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또는 숨기는 방식으로 호소한다는 점이다. 영화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여성 히어로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장면이 돌연 앵글에 등장할 때, 이러한 장면은 미학적으로 옳지만, 소비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해방의 이미지’를 무맥락적으로 만들어 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시장 페미니즘(marketplace feminism)의 ‘해방의 이미지’는 ‘해방의 이론’의 구조와 헤게모니에는 전혀 관심 없는 방식으로 어쨌든 유머러스하고 힙하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게 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페미니즘으로 카테고리화되는 서사는 파는 자의 잘못인가, 사는 자의 잘못인가. 정답은 다음과 같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자본은 모두에게 환영적이고, 무엇보다 앞서나간다. 동년배 페미니스트는 대문자 자본이야말로 여성적인 것들을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승인하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도덕적으로 자본에 힘에 포섭되고 여파성을 획득하는 것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동년배들의 페미니즘 운동은 대문자 자본을 통해 세계의 다른 운동들과 필연적으로 만나며 변화하고 변이할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성격이 만드는 엄격한 조건들, 예컨대 여성이 쓰고, 여성이 만들고, 여성이 등장하고, 여성이 주체성을 획득해야 ‘팔아준다’는 조건은 섹스의 기호로 여성을 재기입하기 때문에 차이들을 탈각시킨다는 비판을 쉽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질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여성서사 운동에서 섹스의 기호를 놓치지 못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성별에 가치를 두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다. 즉 여성이라는 섹스의 기호는 여성서사 운동의 동력이며, 동년배의 상상력을 자극한 주요한 쟁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러한 운동의 양상을 분리주의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것, 더 나아가 폭력적인 것으로 단언한다면, (제가 그걸 모를까요?🤷‍♀️) 그것은 이미 유행이 지나버린 말장난을 지나친 진지함으로 받아들이거나 확대해석하는 퇴행적 반응에 불과하다.

4. 동년배 페미니스트들의 공통감각: ‘여성’이라는 기표를 절대 놓치지 않고

소비자의 위치를 점하는 여성서사 운동은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문학, 영화, 연극, 광고계의 여성 창작자들의 작품에 힘을 실어주면서, 차기작으로 창작활동을 이어나갈 기회들을 제공하고 접근 가능한 시장의 영역을 더욱 폭넓게 열어 놓을 수 있다. 여성 친화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많은 여성 창작자들의 작업을 도모하지만, 지속가능성에 도움을 주는가에 대해서 비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작업의 지속가능성은 여성서사 운동의 지속가능성과 맞닿아있다. 여성서사 운동은 여성 창작자들의 작업을 비판없이 무조건적으로 팔아준다는 아주 잘못된 오해를 받고 있는 듯하다. 동년배들은 여성작가들의 작업을 모두 ‘팔아주기’하지 않는다. 운동의 초기에는 그러한 오해를 받는 것이 분위기와 정체성을 획득하고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운동이 지속될수록 사실 여성서사 운동의 수혜작(?) 또는 성공한 작업들은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즉 여성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잘 팔린 것이 아니라 여성적 글쓰기가 무엇인지, 여성적 시선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던 동년배들의 요청에 절절히 응답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 작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을 기회를 박탈하고, 여성이라는 기호 안에 가두어두기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여성과 여성적인 것을 여전히 부차적으로 위치시키는 외부의 해석과 비평이다.

‘여성’ 작가로 호명될 때, 창작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떠올려야 할 때, 그것은 초맥락적으로 불공정한 것이 될까. 그렇다면 이제 ‘여성’이라는 기표, 즉 이미 오염된 땅을 버리고 밖으로 나가야 할까? 어떻게 젠더를 말하지 않으면서 여성적인 것들을 모색할 수 있을까? 여성서사 운동의 소비가 여성작가들의 창작환경을 제한하는 효과를 불러온다는 단순한 비판들을 여기에 늘여놓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여성’이라는 기호가 여전히 열등한 것 또는 보호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창작자는 자신의 성별을 통과하지 않는 방식으로 평가받아 마땅하겠다. 하지만 여성 창작자들을 생물학적 성별에서 벗어나 활동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가두어두는 것은 ‘여성’이라는 기호를 버리고 싶어 하는 남성의미경제의 욕망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여성”,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하여 따로 기록하게 했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여성 창작자가 작업을 계속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 팔아주기’를 비판하기보다 여성 창작자들이 자신의 성별을 인식하지 않고도, 자신의 필드에서 성장할 수 있는 윤리적인 해석과 비평일 것이다.

‘여성’의 기표에 쓰인 오염의 맥락을 살피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동년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라는 기호를 다시 재검토하는 움직임들은 (의도와 목적이 어찌 되었든 간에)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사고 싶은 것을 사는 동년배들의 소비는 평가를 책임질 수 없을뿐더러,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던 동년배는 영화 <벌새>와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를 보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n차 찍는다. 만약 동년배의 소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팔아주기’로 한정 짓고 여전히 운동의 한계를 묻고 따진다면, 그것은 소비하는 동년배 페미니즘의 실패가 아닌 여성적인 것에 가치 둘 수 없게 되어버린 해석의 실패다.


참고문헌

  • Chamberlain, Prudence(2017). The Feminist Fourth Wave, London: Palgrave Macmillan.
  • Zeisler, Andi(2016). We Were Feminist Once, N.Y.:Public Affairs, 안진이 옮김(2018), 『페미니즘을 팝니다』, 서울:세종서적.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동년배(contemporaries)의 여성서사 운동”의 5개의 생각

  1. 고민하던 주제였는데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잘 읽었습니다!
    글 읽던 중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 질문 드려도 될까요?

    *
    ‘제가 그걸 모를까요?’ 의 ‘제가’는 글쓴이로서의 화자인가요,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동년배 페미니스트인가요?

    *
    3.의 단락중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지만~’ 이 문단의 몇몇 문장이 읽기가 좀 힘든데요,
    변화하고 -> 변화시키고
    자본에 -> 자본의
    의 오타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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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허주영입니다. ‘제가’는 글쓴이로서 화자이자 동년배 맞습니다. 제가 스스로 동년배라고 고백한 것이 되어버리네요. 하하… 그리고 두 번째 문장 지적하신 부분에서는 말씀하신 맥락으로 읽어도 무방합니다.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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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제 인생작 중 하나인데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의 영화평들을 훑어 읽다가 제가 느끼지 못했던 사실에 깜짝 놀란적이 있어요.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로서 영화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남성 캐릭터가 없다는 사실이었죠. (만약 남성판 백델 테스트가 있다면 ‘타여초’는 불합격이었을 겁니다ㅋㅋㅋ) 어쨋든 영화를 보면서는 남성이 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지를 봤다는게 신기했어요. 평소에 영화를 보면 여성서사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 보는데, 이 작품의 남성서사의 의도적인 배제는 전혀 눈치를 못 챈거죠. 어떤 여성서사 중심 영화들이 형편없는 남성인물 묘사를 이유로 비판받기도 하기 때문에 ‘타여초’의 ‘남성배제’가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습니다.

    그렇다면 왜 ‘타여초’가 남성서사를 무시하고도 남성을 배제했다는 혐의(?)를 받지 않을까요? 첫번째 이유는 물론 남성서사의 부족을 느껴야 할 필요가 없을정도로 여성서사만으로 영화를 꽉 채웠기 때문이겠죠. 귀족과 화가라는 두 주인공의 관계만을 깊고 밀도있게 그려내었기 때문에 다른 남성인물과 부차적인 관계가 추가된다면 영화의 스크린타임만 좀내는 사족에 불과할 겁니다. 영화에 필요하지 않는 서사이기 때문에 남성서사의 배제가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죠. 두번째 이유는 ‘타여초’가 굳이 남성을 악역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죠. 주인공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내적 혼란과 갈등만 그려내도 충분히 영화가 의미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가부장제 사회구조와 치환되어 여성에게 억압을 주는 남성인물을 더하지 않았던 것이죠.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걸캅스’는 ‘타여초’가 보여준 위의 두 특성과 반대의 길을 갔습니다. ‘엔드게임’의 최종 전투장면에서 여성인물이 도열하고 협력하는 장면은 충분히 멋진 장면이지만, 남성서사만으로도 충분한(블랙위도우를 제외하고) 영화에서 맥락이 충분치 않은 여성서사를 넣었던 장면이라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걸캅스’에서 보이는 ‘모지리’와 ‘변태’ 캐릭터로 희화화되는 남성인물은 코미디 영화로서 어울리는 풍자와 유머로 작용하지만, 관람객이 ‘남성에 비해 여성은 똑똑하고 도덕적이다’라는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기 쉽게 유도하기도 합니다. 두 영화의 유의미한 여성서사는 괄목할 만하지만, ‘여성서사’에게 영화의 작품성을 해쳤다는 혐의를 받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올바른 여성서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성 감독도 훌륭한 여성서사가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고, 여성인물의 등장이 적어도 여성주의적 가치가 잘 드러내는 영화도 있습니다. 다만 여성서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사적인 완결성을 차치하고 높은 의미를 부여한다면, 성기고 재미없는 여성서사도 상업적인 성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붉은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액션을 하는 ‘언니’같은 영화가 ‘걸크러시’라는 이름으로 소비되는 괴상한 사태도 없어지겠죠. (이시영 배우를 왜 그런 대접을 받는 건지ㅠ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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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여성서사’가 영화의 작품성을 해쳤다는 혐의를 받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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