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페미니즘을 알고 있나요?”

☁️ 미현

 * 이 글은 연구자의 석사학위 청구논문 “총여학생회 폐지를 통해 본 대학 내 분열들의 주체와 경합의 정치학” 연구 이후의 생각을 담은 글이다. 

안다(knowing)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 무언가를 안다고 말하는가, 혹은 말할 수 있는가? 무엇인가 화제가 되면 관련해서 수많은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한다. 2015년 혹은 2016년 이후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어나고 많은 곳들에서 페미니즘을 접하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의 집회 장면이 9시 뉴스에 실리고 많은 페미니즘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성혐오, 탈코르셋과 같은 용어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다.

정말 알게 된 것일까? 여성학을 배우면 자신의 아내를 ‘여성스럽게’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나에게 질문했던 한 남성은 얼마 후에 ‘너도 탈코르셋을 하는 것이냐’고 질문했다. 여성학을 ‘신부수업’ 정도로 여기던 것에 비하면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러한 앎은 그 사람의 삶에 어떤 파장을 만들어 냈을까.

출처: ‘이오후’ 페이스북 게시물

한 대학 커뮤니티에는 이런 질문과 이어지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게시글의 작성자는 성적 대상화, 젠더감수성 등의 최신 용어들을 나열할 수 있을만큼 페미니즘의 개념들을 잘 알지만, 작성자의 앎은 지식(knowledge)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 이전에도 페미니스트에 대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에게,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필터링 리스트에 키워드를 추가하는 행위에 가깝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요청하는 “모르면 책을 읽으세요”라는 표현까지도 말이다. 이른바 ‘메갈 세대’라 불리는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의 대중화는 기존의 세계를 흔드는 물결이었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의 언어는 ‘키워드’ 추가를 위한 정보값에 불과하다. 

위 게시물이 올라온 대학은 2018년 총여학생회가 폐지된 곳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2018년 총여학생회 폐지 과정을 목격하고 이듬해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양 극단으로 구성된 스펙트럼 상에 놓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흥미로운 지점은 총여학생회 폐지에 찬성했던 학생들도 최근의 페미니즘 이슈들에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탈코르셋이나 반성폭력의 필요성에 공감하기도 했고, 퀴어 이슈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 학생회가 그러한 이슈에 관심을 지니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총여학생회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순간에 이들의 언어는 매우 선명해졌다.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것을 남성의 탓으로 돌리는 극단성을 지니고 있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다 백래시라고 치부한다고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어디서 그러한 정보를 읽었느냐고 물으면 오세라비의 이름이 나오기도 했고 주변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그렇게 느꼈다고도 말했다. 총여학생회에 대해 질문했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날선 답변이 돌아왔다. 어떤 순간에 축구경기의 심판이 떠올랐다. 페미니즘 운동의 테두리에서 초록색, 노란색, 빨간색 카드를 들고 있다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카드를 드는 모습. ‘나는 그린카드도 가지고 있어. 그러니 나는 페미니즘 자체에 적대적인건 아니야. 그렇지만 그 페미니즘 잘못됐어.’ 같은 이미지가 오래 남았다. (그리고 연구참여자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이 아닌지 괴로워하곤 했다.) 

사실, 이러한 공격은 (특히 한국에서) 새로운 방식이 아니다. 과거의 페미니즘 운동이나 서구의 페미니즘 운동을 대척점으로 삼고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은 ‘중산층 엘리트 중심적이기 때문에’ 혹은 ‘무뇌아적’이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 속에서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은 ‘꼴페미’, ‘페미나치’와 같은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최근에는 페미니즘이 ‘젠더갈등’과 ‘남성혐오’를 조장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되며 ‘메갈’, ‘워마드’로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상상해낸다. 페미니즘 운동을 하나로 압축하여 재단하고 윤리적인 판단을 하지만, 판결을 내리는 사람은 페미니즘 운동을 필요로 하는 구조적 문제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페미니즘 내부의 논쟁은 ‘여자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캣 파이트, catfight)’으로 격하된다. 

내가 할말을 쟤네가 하네? 근데 결론이 다른거죠.

“저는 약간 언어를 좀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커요. 제가 하는 것들을 쟤네가 하고 있네? 정체성, 소수자 이런 것들 있잖아요. 흔히 쓰는 언어들. 언어들을 그들이 이미 다 배우기 시작해서, 싸움이 안 되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약간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될지 모르겠다. 내가 할말을 쟤네가 하네, 근데 결론이 다른 거죠. 어떻게 해야 되지? 라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었던 것 같아요.  – A대 총여학생회 전 임원” 

뿐만 아니라, 폐지 과정은 여성주의 집단을 폐기하기 위해 여성주의 언어가 전유되는 양상을 보여줬다. 총여학생회를 폐지하자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반성폭력 운동과 퀴어이론의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페미니즘의 개념이 다시금 총여학생회 폐지의 근거가 되었다. 예컨대 한 대학에서는 지난 총여학생회의 기조를 인용하며 “총여학생회의 설립 목적이자 가장 주요한 활동이 ‘반성폭력’과 ‘반성차별’ 인데 ‘성폭력’과 ‘성차별’은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사항이므로 ‘총여학생회’의 명칭을 ‘학생위원회’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로, 이후 해당 대학은 총여학생회가 폐지된 이후 ‘성폭력담당위원회’가 제시되어 설립되었다. 또 다른 대학에서는 “총여학생회의 존폐를 성별 따라 결정한다면 남, 녀가 아닌 제 3 의 성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학우들의 의견이 묵살” 될 것이기 때문에 총여학생회의 필요성에 대해 학생총투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이 등장했다. 

퀴어/페미니즘 이론의 어떤 단어나 표현들을 도려내어 이런 논리를 세운다는 것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첫 번째로는, 폐지 측에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총여학생회를 페미니즘이 성별이분법을 강요하고 ‘남성혐오’를 조장하는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만난 총여학생회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던 연구참여자들은 지금의 총여학생회가 지나치게 과격하며, 그러한 ‘노선’에 반대하기 때문에, 혹은 지금의 총여학생회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총여학생회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실제로 총여학생회 폐지 측은 자신들이 ‘성별 이분법을 강조하는’ 총여학생회에 반대하는 ‘인권운동’이자 바른 ‘여성운동’의 일환이라고 역설했다.

총여학생회 폐지 과정이나 이른바 ‘남성혐오’ 담론은 페미니즘을 비롯한 소수자 정치의 용어들이 본격적으로 차용되었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진일보(?)한 셈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을 공격하는 도구로서 여성주의 언어들이 남용될 때, 총여학생회 활동을 했던 연구참여자가 말했듯이 “언어를 빼앗긴 것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페미니즘 개념을 필터링을 위한 ‘키워드’로 처리하는 것과 관점을 탈각한 채 언어를 차용하는 것은 다른 현상 같지만 같은 이해관계 속에서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폐지 측은 ‘제 3의 성’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퀴어 동아리가 총여학생회 폐지에 반대하며 입장문을 게시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폐지 측이 대화 혹은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에 그들이 말한 ‘제3의 성’은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쪽에서는 페미니스트들을 ‘거르기’ 위해 페미니즘의 언어를 학습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페미니스트를 ‘배제’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언어를 사용한다. 

페미니즘 지식이 쉽게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나아가 여성에 대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발견했듯이 근대사에서 여성에 대한 책은 대부분 “여성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무 자격이 없는(울프, 2017/1929: 44)” 남성들이 썼다. 여성의 삶을 겪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다는 태도, 여성학은 세상의 일부를 다루기 때문에 ‘보편’에 대한 자신의 배움에 기반해 알 수 있다는 입장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이러한 ‘전통적’인 태도가 페미니즘 대중화 파동에도 꺾이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모른다.  

폐지에 찬성표를 던졌던 한 연구참여자가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곱씹는다. 그는 여성혐오(misogyny)에 대한 페미니스트 지인과 논쟁한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도 나름 알기 위해 노력하고, 나름 공부를 했다는 대학의 학생인데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대중 남성’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해당 연구참여자가 특별히 무례하거나, 특별히 거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친숙해졌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가 우려된다. 충분히 페미니즘에 대해 듣고 알게 되었으니 (혹은 그렇지만 납득할 수 없으니) ‘그만’ 하자는 정서가 팽배해지게 되는 것은, 혹은 이미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대중화의 사전적 뜻은 “대중 사이에 널리 퍼져 친숙해지는 것. 또는, 그리 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은 ‘널리 퍼져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친숙한 것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우치다 다쓰루는 타인의 말을 듣고, 스스로의 내면을 응시하고, 신체의 반응을 겪는 ‘앎의 쇄신’이 지성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무지란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지식이 포화되어 미지의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다. 하지만 시공간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지식도 이에 따라 갱신되고, 되어야 하기 때문에 지식의 ‘포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지식이 충분하다’는 믿음이 있을 뿐이다. 

친구들과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니 오히려 페미니즘을 더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실이기도 하다.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를 제외시키는 행위이며, 항상 변화는 그 제외된 공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쉬운 일반화가 ‘그 페미니즘’ 따위의 호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모른다. 알기 위해,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뿐. 


참고문헌

  • 김수아 (2018). 젠더정치의 미디어 프레임, ‘그 페미니즘’. 황해문화, 18-34.
  • 우치다 타쓰루 (2015), 김경원 옮김(2016).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이마.
  • Wolf, Virginia(1929), A Room of One’s Own, 박혜원 옮김(2017). 『자기만의 방』, 더스토리.

글쓴이

Fwd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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