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

코로나19가 당연한 일상이 된 것처럼 보이는 현재, 백신 보급으로 코로나 걱정 없는 일상 회복을 기대하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 이 상황이 나아질 수 없다는 무력감은 한데 뒤엉켜 있다. “이제 코로나,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라는 말은 어느새 코로나19 이후의 일상을 꿈꾸는 말이 되거나 일일 확진자 수와 같은 코로나 관련 정보를 보고 싶지 않다는 중의적인 말이 되었다. 팬데믹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와 관계없이 자기 삶의 맥락에서 생존해야 했던 개인들에게 코로나19는 어떤 의미로, 어떤 존재로 연루되어있을까? 코로나19는 어느새 자연스러운 현실이 된 것일까? 혹은 부정하고 싶은 방해물, 모르고 싶은 어떤 것이 된 것일까?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19 이후 코로나19로 발생한 불평등에 관한 다양한 담론이 등장했던 현실 다른 한편에는, ‘공정’ 담론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다. 재난 이후의 담론에서 불평등을 중심으로 한 기조는 그 세를 잃고, 오히려 ‘생존’, ‘경쟁’, ‘공정’ 담론이 확장되고, 공고해졌다. 또한, ‘생존’과 ‘공정’이라는 탈은 안티페미니즘, 능력주의 등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그 파급력을 행사한다. 필진 싱두의 ‘펜데믹 시대의 주식투자 광풍이 가리는 것들’에서 드러나듯이, 주식 시장의 주체로서 개인의 “큰돈을 쉽게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 대한 주목은 쉼 없는 노동으로 인한 죽음, 돌봄 노동, 돈이 되지 않는 일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부재한 현실에서 ‘생존’은 ‘연대’를 통한 회복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짓밟고, 주변의 문제들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가능하다. 모두가 ‘어려움’과 ‘피해자 정체성’을 논의하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어떤 존재의 어려움과 서사는 다시 한번 배제된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코로나19’라는 이야기가 쉽게 ‘말하지 못한 자’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가야트리 스피박의 유구한 물음은 유효하다. 예컨대, 코로나19 상황에서 비인간 동물,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과 도시 빈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기보다 목소리를 경청할 사람들이 줄었다”(조문영, 2020: 28). 이들의 서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분석되고 전달되는 대신 자극적인 보도로 나타나거나, 과로사 혹은 화재로 인한 죽음으로 드러나거나, 혹은 발화되지 못한다. 이때 짓밟히는 존재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도 힘들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지 못한다’는 20대 남성 약자론의 논의는 평평한 논의의 구도 속에 비가시화된 존재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시금 위계화한다. 자연과 인간의 질서라는 “계급 시스템 안에서 인간이 무방한 관조자”가 된다는 필진 허주영의 글에서처럼, “모른다”, “힘들다”는 언어는 “낮고 낮은 것들”을 감추어내고, 은폐한다. 즉 누구의 목소리가 선택적으로 들리고, 들리지 않는 상황은 어떤 권력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지를 다시금 드러낸다.
Fwd의 다섯 번째 기획이 “‘포스트 코로나’ 다시 쓰기”였던 것은 이전과 다른 세계를 새롭게 상상하고, 기존의 코로나와 포스트 코로나 담론에 균열을 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코로나19가 드러내고, 가시화한 문제들을 통해 이전 논의들의 구멍들을 짚어내고, 코로나 이후의 삶을 새롭게 상상하자는 희망이기도 하다. 필진 김보영이 ‘코로나19와 나이 든 사람의 죽음’에서 언급했듯 “코로나가 두려운 이유 중 하나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일을 멈추도록” 만들 때, 새로운 상상을 멈추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그저 낙관적으로 “충분히 괜찮았다”라고 판단하지 않도록, 코로나로 드러난 불평등을 성찰하고, 그에 따라 다른 ‘포스트 코로나’의 모습을 그리는 작업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필진들은 자본세, 인류세, 툴루세라는 틀 안팎에서 서로가 서 있는 현실과 관심 속에서 외면받는 존재들을 들여다보고자 하였다. 택배기사가 죽어도 배송은 완료되는 현실 속에서의 로지스틱스, 모르는 것에 개입하기를 요청하는 문학, 시설사회와 늙는다는 것에 관한 고찰, 비대면 상황에서 포괄적 성교육의 가능성, 주식투자 광풍이 가리는 자본주의의 문법과 비가시화된 노동 등에 관한 논의는 ‘포스트 코로나’를 새롭게 상상하는 하나의 언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비가시화된 존재들을 드러내고, 정치화하는 페미니즘의 문법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간 페미니즘은 마음/몸, 이성/감성, 안/바깥, 자아/타자, 실재/현상, 남성/여성 등을 나누는 사고뿐만 아니라 인간 동물/비인간 동물, 자연/문화라는 이항적인 양극화를 비판해 왔다. 이러한 지점에서 코로나19를 분석하고, 바라보는 이분화된 관점의 한계에서 벗어나 사물, 자본, 인간동물, 비인간동물 등이 서로 연루되어있음을 밝히는 기획의 시도 자체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다양한 존재들을 상호연결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즉 존재들의 연루됨과 얽힘에 관한 인식이 코로나19에서 개인들의 경험을 평면화하거나 누군가의 고통이나 불평등한 상황을 타자화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까? 이 기획에서 착취, 억압과 차별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겉보기에 무관한 억압들이 서로 연루되어 있음을 밝히는 과정은 그 대안과 해방의 길 또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장애와 동물 해방을 교차하는, 슈나우저 테일러의 책 『짐을 끄는 짐승들』(2020)을 인용하며, 다섯 번째 기획을 닫고자 한다. 테일러는 고통과 취약성을 인정하는 것, 즉 취약성, 약함이나 상호의존과 같은 경험의 가치나 자연스러움을 인정할 것을 제안한다. 테일러의 설명처럼, 취약하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들이 서툴고 불완전하지만, 서로를 돌보는 관계들 속에서 ‘포스트 코로나’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 자본주의의 촘촘한 연결망, 비인간/인간 동물의 위계, 시설사회 속에서 Fwd 필진들이 상상한 ‘포스트 코로나’가 고통과 취약성의 개념을 확장하고 재해석하는 작업으로 다가왔기를 바란다. 동시에 새로운 개입, 연루됨을 통해 다른 정치와 실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하나의 작은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여전히 코로나19가 언제 종결될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미지수지만, 그 알 수 없는 미래와 불안감 속에서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업들에 함께할 것을 제안하며, 이 기획을 닫는다.
참고문헌
- Taylor, S. (2017). Beasts of Burden: Animal and Disability Liberation. 이마즈 유리 역. (2020). 짐을 끄는 짐승들: 동물해방과 장애해방. 서울: 오월의봄.
- 조문영 (2020). 한국사회 코로나 불평등의 위계. 황해문화, 1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