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수

1. 진단받지 못한 이유: 여성
임상심리전문가로서, ADHD 환자 당사자로서 ADHD가 있는 여성이 진단에서 누락되거나 오진되어 온 이유를 탐색하는 책을 한 권 썼다. 정신장애를 공부한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나 자신에게서 ADHD를 발견하거나 의심조차 하지 못한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병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이면 ADHD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물며 그게 직업인 내가 서른이 다 되어서야 내 병명을 알다니. 그 원인을 파헤칠수록 모든 답이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라는 사실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상황을 태연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다 커서야, 즉 정작 치료가 가장 절실했던 시절을 아무런 도움 없이 허망하게 지나보내고서야 내가 가진 고통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더없이 원망스러웠으므로 나와 같은 여성들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했다.
여성이 ADHD 진단에서 누락되거나 오진되는 꽤나 많은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대중매체에서 남자아이의 증상만을 조명하고 반복 재생산해왔다던가, 그 어떤 가치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도록 길러진 여자아이들이 주변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분투해왔고, 그 결과 심한 손상에도 불구하고 증상을 숨기는데 성공하는 바람에 발견되기가 어려웠다던가, 과격하고 파괴적이고 남들을 괴롭히거나 귀찮게 하는 남자아이들의 증상 특성에 비해 여자아이들은 주로 눈에 띄지 않는 부주의 증상을 위주로 ADHD가 표현된다던가 하는 사실이 그 일부다.
2. 성별이 정신장애 진단에 미치는 영향
그 외 나머지 진단 누락, 오진의 책임은 임상 현장에 존재하는 젠더 편향에 의해서였다. 이를테면 심리평가에서 ADHD 증상을 감별하기 위한 진단도구와 진단기준의 개발은 백인 남자 아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스러운 결과로, 여자아이들이 보이는 ADHD 증상 특성은 진단기준에도, 진단도구에도 반영되기 어려웠다. 전문가가 눈 앞에 앉아있는 여자 환아에게서 ADHD와 관련한 문제를 발견하고 진단을 의심하더라도 이미 남자아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증상목록과 일치하는 바가 충분치 않아 치료가 시작되기 쉽지 않다. 물론 병의 경과나 치료 예후에 대한 연구도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져 여성 환자들은 약물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젠더 편향은 이런 공식적인 지점에만 존재하지 않았다. 개별적인 차원에서 임상가의 젠더 편향이 정신장애 진단과 치료에 막강한 영향을 미쳐온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수십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신건강전문가들은 여전히 자신의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즉, sex와 gender에 대한 임상가의 고정관념과 성 도식은 환자 앞에서도 활성화되어, 앞에 앉은 사람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따라 다른 진단을 내린다. 이를테면, 정확히 같은 증상을 호소하더라도 환자가 남성일때보다 여성일 때 우울장애로 진단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과정에는 많은 것이 작동되는데,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우울장애 유병률이 높다’는 사실은 하나의 근거가 되어 임상가로 하여금 눈앞의 여성 환자 역시 우울장애가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결과적으로 여성의 우울장애 유병률을 다시금 높여 고정관념을 공고히 하는 바람에 이후에 오는 여성에게서도 우울장애를 쉽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 때 실제로 우울 증상이 전무한 여성을 우울장애 환자로 오진하는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현실은 아닐 것이다. 다만 확실히 임상가는 여성에게 있어 사소한 우울 증상도 놓치지 않는(어쩌면 오해하는) 동시에 남성의 우울 증상은 무시하기 쉽다. 우울한 남성은 상대적으로 훨씬 드물다는 식이다. 또는 여성들의 다른 증상까지 우울 문제로 퉁치기 쉬워진다. 정신적인 고통만이 우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한 실질적인 신체 고통 마저도 여성 특유의 호소 방식, 즉 심리적 고통을 신체 통증으로 전환시켜 관심과 도움을 이끌어내려 한다거나 ‘기분탓’으로 여겨져 실제로 존재하는 질병에 대한 치료제 대신 항우울제가 처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통계 결과 항우울제는 정신과보다는 내과에 내원한 환자들에게 가장 자주 처방되어왔다.
기분의 문제도 아니라면, 성격 문제가 된다. 과거 외상(trauma) 피해가 존재하고, 감정 기복이 심하며 분노를 견디기 어려워하고 대인관계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내원했을 때 그가 남성이라면 PTSD로, 여성이라면 경계선 성격장애로 진단될 가능성이 높단 사실이 반복적으로 발견됐다. 두 장애 사이에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PTSD와 경계선 성격장애를 혼동하는 일이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다만 그 오해가 단지 성차 때문에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시사하는 바는 주목할만하다. PTSD는 심리적 고통이 개인 내부가 아니라 외부 사건으로 인한 것으로 여겨져 국가적, 제도적 지원과 사회적 지지, 최소한 연민과 동정에 기반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드물고 주요한 정신장애의 하나이다. 반면 경계선 성격장애의 경우 성격장애 특성 상 문제의 책임 소재가 환경과 타고난 기질이 상호작용하면서 굳어진 ‘성격’에 있다고 흔히 여겨지므로 당사자 개인 탓을 하기 쉬워진다. 더욱이 성격장애 중에서도 경계선 성격장애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을 괴롭히고 치료진마저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어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심지어 치료를 받는다고 나아진다는 희망도 희미한 환자군에 속하므로 도움도, 사소한 동정도 받기 어렵다. 유사한 고통과 증상에도 불구하고 PTSD 진단을 받는 일과는 매우 다른 결과가 초래되는 것이다.
ADHD도 마찬가지로 환자가 여성인데다 수다스럽고 활력이 넘치며 충동적이면 양극성장애로 오진, 자주 깜빡하고 멍해보이면 우울장애로 자주 오진된다. 오진된 여성들은 정작 ADHD 증상 감소가 없는 바람에 무수하고도 다양한 약을 복용하며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한다. 이렇듯 성별을 이유로 발생하는 진단의 차이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치명적일 수 있다.
3. 건강불평등과 여성
책을 쓰는 당시에는 미처 알지못했는데, 이 모든 현실을 다섯 글자로 요약해주는 단어가 있었다. ‘건강 불평등’. 건강 불평등이란 건강의 차이는 단순히 개인이나 집단의 선천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기 보다는 소득수준, 직업 계층, 재산, 교육수준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발생하는 건강 상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곧 ‘건강의 사회경제적 불평등(socioeconomic inequalities in health)’을 의미한다. 영국의 역학 전문가 화이트헤드(Margaret Whitehead)는 건강 불평등을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인 동시에 또한 극복 가능한 것’이라고 정의하였으나 현재 건강 불평등은 세계적으로 심화되는 추세다(건강불평등에 대한 정의).
건강 불평등에 기여하는 사회경제적 요인은 생각보다 더 다양하다. 인종이나 연령, 문화 너머 범죄자나 기후 난민, 기존에도 존재하던 신체 장애, 성 지향, 성 정체성 등 역시 건강에 상당한 차이를 유발한다. 물론 나는 성(sex and gender) 차이가 유발하는 불평등에 집중한다. (성(sex and gender)과 연관된 건강 불평등은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는데 기존의 연구들은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에 따른 차별을 구분해오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건강 불평등에서 젠더 편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gender blindness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K. Hamberg 2008). 두 번째는 gender stereotypes로 존재하지 않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모두 개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보다 주요한 이슈는 전자, 즉 gender blindness로 보인다. 우리는 몇 년간 심장내과적 질병에서 여성과 남성의 증상차를 발견하지 못해 많은 죽음을 예방하지 못한 사실이나, 약물이 임신중인 여성의 몸에 미치는 영향 등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gender blindness에 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이 건강 영역에서 불공정하고 취약한 위치에 처한 사실이 알려진 건 수십년 전의 일이지만 변화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고 개선 속도는 무척이나 더뎠다. 이에1993년 미국 국립 보건원(NIH)은 NIH가 지원하는 임상시험에서 여성을 포함시켜야 하는 법안(NIH Revitalization Act)을 통과시켰으나, 이후 1997-2000년 판매 중지된 10개의 의약품 중 8개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부작용이 더 흔했으며, 이 중 4가지 의약품은 남녀의 생리적 차이가 원인이라는 사실이 다시금 밝혀졌다. 이런 현상은 의약품 전임상 연구과정에서 성별을 고려하지 않은 연구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앞선 법안이 무색해보일 지경이었다. 이에 2014년 NIH는 전임상 연구단계에서 성차를 고려한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물실험뿐만 아닌 세포를 이용하는 모든 전임상연구에서 성비 균형을 맞추거나,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성별에 차이를 두는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최근의 연구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연구자들은 가장 대규모인 동시에 최근에 시행된 주요 주제 중 하나인 COVID-19 관련 임상 연구들에서 성(sex and gender)의 배제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2020년 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등록된 4420편의 연구 중 21%만이 참가자 모집 단계에서 성별을 기입하게 했고, 4%만이 성별을 주요 변인 중 하나로 포함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여전히 우리의 기대와는 확연히 다른 수치이다.
이왕 COVID-19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은 알다시피 여성에게서 더 치명적이었다. 즉 더 많은 여성이 직업을 잃고, 더 많은 여성이 학교 폐쇄로 인해 양육에 책임을 떠안고, 여성의 경제적 손실이 더 크고, 여성의 가정폭력 피해가 증가했음이 확인됐다. 이 와중에도 권고된 방역수칙을 더 잘 지키고, 감염 위험에 덜 노출되는데 노력을 기울인 건 여성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팬데믹 연구에서 또다시 배제된 것도 여성이다.
4. 질문합시다. “여성에서 다른가요?”
건강 영역의 전문가들이 두 손 두 발 다 놓은 채로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건강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지속될 것이고,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다가 먼 미래에는 격차를 줄일 것으로 믿는다. 다만 여성 당사자로서, 또는 모든 인간이 이미 발전된 현대 의학과 과학의 혜택을 누릴 자격을 동등하게 갖는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여성의 건강을 운에 맡기는 것은 그만두고, 질문하는 일이다. 의사, 약사를 비롯한 전문가에게 질문하자. “이 병의 증세와 치료법이 여성에서 다른가요?”. 그들은 아마 ‘그렇다’고 답하거나 ‘성별에 따라 결코 다르지 않다’, 또는 ‘모른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받는 경험이 반복되면 모르던 그들은 알려고 들 것이다. 여성과 남성에서 차이가 존재하는지, 그렇다면 어떤 차이인지, 그것을 감별하기 위한 방법이나 도구가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고 정보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최근까지 여성 ADHD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무관심하던 정신건강 전문가들이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적지 않게 들려오고 있다. 여성들이 자꾸만 진료실에 찾아가 질문하기 때문이다. “ADHD 증상이 여성에서는 다른가요?”, “약물이 여성에게도 충분히 안전하다고 밝혀진게 맞나요?”, “부작용이 여성에게서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나요?”. 우리는 질문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것을 변화시켜왔다. 이제 여성의 건강에 대해 질문할 차례다(M. Carnes, 2017).
참고문헌
- 신지수(2021).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휴머니스트
- Hamberg, K. (2008). Gender bias in medicine. Women’s health, 4(3), 237-243.
- Carnes, M., Johnson, P., Klein, W., Jenkins, M., & Bairey Merz, C. N. (2017). Advancing Women’s Health and Women’s Leadership With Endowed Chairs in Women’s Health. Academic medicine: journal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Medical Colleges, 92(2), 167–174
- Brady, E., Nielsen, M. W., Andersen, J. P., & Oertelt-Prigione, S. (2021). Lack of consideration of sex and gender in COVID-19 clinical studies. Nature Communications, 12(1), 1-6.
안녕하세요 임상심리전문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는 여성 ADHD 환자입니다. 진단을 받기 전까지 의아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을 명확하게 전달해주셔서 제 생각 정리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최근에는 과잉진단이라는 이슈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안에서도 분명 성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연구해주셔서 감사하고 저 또한 질문하면서 인식 바꾸는 데에 동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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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유용한 글이군요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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