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와 가족의 낭만화

🎨윤소이

어째서 사람들은 더 이상 기존질서가 지속불가능할정도로 ‘망해버린’ 세계관에 환호하게 된걸까?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중 연상호 감독의 <반도>와 조성희 감독의 <승리호>는 각각 다른 이유로 ‘망해버린’ 세계를 그려내는데, 두 영화는 모두 웹툰원작을 각색하여 재탄생한 작품으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어 개봉과 동시에 화제성과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두 작품은 21세기 한국의 대중문화 담론에서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의 장르적 문법이 만들어지는데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란 종말(apocalypse; 파멸, 대재앙)이 찾아온 ‘이후(post)’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낸 이야기이다. 문화평론가 문형준(2018)에 따르면, 하나의 ‘장르’로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가 ‘재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일이다. 21세기에 이르러 발생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경제위기나 대규모 전염병의 창궐,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자행된 이슬람에 대한 공격들, 그리고 무엇보다 전지구적 기후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은 ‘도래할 미래’로서 지구의 종말과 인간종의 소멸을 상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형준이 보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는 21세기의 인간문명의 지속가능성에 관한 (불안, 두려움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반성과 성찰이 반영된 “정치적-생태적-철학적 사고실험”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도>와 <승리호>의 세계관은 과연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고실험을 통해서 ‘인류’의 생존과 소멸을 문제화 하고자 했는가? 그리고 두 작품의 이 같은 사고실험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인간다움의 한계를 규정하는 지식, 신념, 믿음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있을까? 

1. 살아남은 ‘죄’와 실패한 가부장들 

<반도> 와 <승리호>의 세계관 속 재난은 각각 ‘좀비 바이러스’와 ‘쓰레기장’이 된 우주이다. 두 영화 모두에서 재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재난을 가능케한 ‘환경’으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없는 욕망이나 이기주의라는 사회병폐적 현상 등이 암시된다. 그리고 두 영화에는 이러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인간-생존자들’의 공동체가 세계관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등장한다. 

먼저 <반도>에서는 ‘631 부대’라는 군사화된 조직체계를 통해 생존자원이 분배된다. ‘631 부대’의 구성원들은 오직 한국남성들만으로 구성된 호모소셜리티로, 부대 바깥의 생존자들의 식량을 탈취하고 그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존재들로 등장한다. 이들은 부대 바깥의 좀비들보다 ‘무서운’ 생명체로서, 추악함과 잔인함, 폭력성, 말하자면 ‘파괴력’ 그 자체만이 남은 것처럼 재현된다. ‘631 부대’가 주기적으로 생존자들과 좀비떼를 한 공간에 풀어놓고 격투를 시키는 장면은 과거에 노예와 맹수를 싸우게 만들었던 원형극장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이런 장면을 통해 극대화되는 지점은 ‘631 부대’의 ‘광기’와 ‘악함’ 그 자체이다. 

한편 <승리호>의 경우, ‘스페이스 콜로니’를 만드는 초국가적 기업체(UTS:Utopia above The Sky)에 의해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자원이 생산되고 재분배된다. <반도>의 세계관 속 ‘631 부대’의 ‘야만적인’ 폭력성과 달리, <승리호>의 UTS는 기술과학을 독점한 자본가의 기업체를 통해 지구에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을 ‘선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631 부대’의 폭력성이 타인의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상해 입히기나 ‘죽게 만들기’를 통해 드러난다면, UTS의 폭력성은 (미셸 푸코가 말한 생명권력의 층위인)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기’에 가깝다. 기술과학과 거대한 자본력을 통해서 특정한 신체들을 계속해서 살게 만들고, 그들의 생명을 계속해서 연장시키는 동안, 어떤 신체들은 그냥 지구에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런데, <반도>와 <승리호>의 주인공 – ‘정석(강동원 역)’과 ‘태호(송중기 역)’-들은 위에서 살펴본 생존자 공동체의 ‘바깥’에 거주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이들은 재앙이 휩쓸고 간 세계에서 우연하게 살아남았지만, 폭력을 일삼는 생존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두 인물의 삶이 ‘떳떳한’ 인생으로 그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단한 ‘악인’도 아니지만 디스토피아 사회의 ‘떳떳한’ 인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두 인물의 정체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두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과거’와 관련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주인공들의 ‘과거’란 한마디로 ‘가족을 지키지 못한 죄’이다. 

<반도>의 ‘정석’은 ‘631 부대’의 한국남성들처럼 인간성이 파괴된 남성으로 그려지진 않으나, 그는 아직 ‘영웅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소시민으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용기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승리호>의 ‘태호’의 경우 가족을 위한 자기희생 대신에 자기이익을 위해 선택했던 행위가 강조된다. ‘정석’이 자신의 생명을 우선시하여, 누나와 조카를 죽게 내버려두고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인들을 외면했던 행위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태호’는 ‘돈’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딸을 위험한 환경에 방치했던 행위에 계속적으로 죄책감을 갖고 사는 인물로 그려진다. 따라서, 두 주인공의 생존은 그 자체로 떳떳한 삶 일 수가 없는 ‘실패한 가부장의 삶’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2. 폐허 속에서 생명을 구하는 ‘가족’들 

한편, <반도>와 <승리호>의 세계관에는 앞서 살펴본 ‘생존자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실패한 가부장’의 남성성을 공유하지도 않는 전혀 다른 주체들도 등장한다. 이 주체들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 속 ‘희망’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존재로서,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성인남성들의 특징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망해가고 침몰하는 세계 속 희망 그 자체로 묘사되는 소녀들의 세계라는 것은 언제나 이미 ‘가족’이라는 관계망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재현된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눈여겨봐야 한다. 

예를들어 <반도>의 ‘준’과 ‘유진’ 자매는 강인한 가모장인 ‘민정(이정현 역)’의 딸들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치매노인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631 부대’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살아간다. ‘준’과 ‘유진’ 자매는 웬만한 어른들의 실력을 능가하는 운전실력과 전투력을 보유한 소녀들로, 좀비떼에 쫓기다가 ‘631 부대’에 의해 생포될 뻔한 ‘정석’을 구해낸다. 그리고 이 공동체에서 ‘준’이라는 소녀는 ‘민정’을 대신하여 ‘유진’과 치매노인을 돌보고 보살피는 ‘K-장녀’로서의 성역할 수행을 통해 주체성이 형성된다. 요컨대, <반도> 세계관 속 한줄기 ‘희망’으로서 소녀가 주체화 되는 조건은 다름아닌 ‘가족을 지키는 맏딸-되기’인 것이다. 

이러한 소녀가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민정’(어머니)과의 관계로 제시되는데, 이때 딸들을 위해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을 감당하는 민정의 모성애는 ‘631 부대’로 대표되는 폭력적 남성성의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 ‘외부’로 위치하게 된다. 한마디로, <반도> 세계관 속 모성애의 의미는 디스토피아 시대의 ‘나쁜 인간(종)’의 속성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바깥’이자, 도덕적 선함의 원천으로 재현된다.  

<승리호> 세계관 속 ‘꽃님이(도로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준’과 ‘유진’ 자매의 경우와 달리, ‘꽃님이’는 아버지와의 애착관계가 매우 중요한 소녀로 등장한다. ‘꽃님이’의 아버지인 강박사는 <반도> 속 헌신적이고 ‘도덕적인’ 한남으로서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가부장으로 등장 한다. ‘꽃님이’는 이러한 강박사의 ‘부성애’와 의학기술의 결합을 통해 재탄생한 일종의 증강신체이자 ‘트랜스-휴먼’으로, 죽어가는 생명체들의 세포를 재생시키는 치유능력을 발휘하는 소녀이다. 

그리고 ‘꽃님이’의 이러한 초능력은 오로지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얽혀서 서로를 속이고 ‘등쳐먹기’에 바빴던 ‘승리호’ 선원들의 관계를 재구성해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렇게 ‘꽃님이’의 존재를 통해서 재구성된 선원들의 정체성은 ‘꽃님이’의 언니(‘업동이 언니’)와 삼촌(‘타이거 삼촌’)이라는, 친인척 관계이다. ‘꽃님이’에게 유일하게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불리던 ‘태호’ 역시 강박사의 죽음 이후에 강박사의 자리와 역할(‘꽃님이’의 초능력을 노리는 악당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을 대체하게 되면서 ‘꽃님이’의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이처럼, 두 영화에서 유일한 희망으로 등장하는 소녀들이 수호하는 공동체로서 ‘가족’은 폭력적 남성들의 호모소셜리티로서 군대(‘631 부대’)나 악덕자본가의 초국적 기업(‘UTS’)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착취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공간으로 전제된다. 공동체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적영역’, ‘공공성’이 더이상 지속불가능한 것으로 보일때, 그것에 대한 해법으로 ‘사적인 것’이 낭만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적영역의 낭만화를 통해 복원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가부장들’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반도>와 <승리호> 세계관 속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실패한 가부장’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고해성사’와 ‘부활’의 계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정석’과 ‘태호’는 소녀들의 가족으로 통합됨으로써 책임감 있는 ‘아버지’로서의 성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두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두 인물은 과거로부터 ‘속죄’를 마치고, 진정한 ‘인간성’을 지닌 주체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3. ‘무해한’ 인간성과 생명중심주의

그렇다면, 이렇게 디스토피아적 미래에서도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소녀들’과 ‘정의로운 가족’의 판타지는 과연 어떠한 철학적 토대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페미니스트 철학자 클레어 콜브룩의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콜브룩은 Death of the Post Human이라는 저서를 통해 21세기에 개봉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데, 콜브룩이 보기에 21세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가 제시하는 인간다움은 서양근대철학의 생명중심주의적 도덕관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콜브룩이 보기에 오늘날 도덕철학의 역사에서 ‘옳음과 그름’을 판단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어떤 행위자의 행위함(혹은 행위하지 않음)이 ‘누군가의 생명을 얼마나 파괴하는지’의 여부와 직결되어왔다. 왜냐하면, 도덕철학의 논의에서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고 소중한 제1의 가치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논리는 동어반복의 오류(‘생명은 존엄하다. 왜냐하면 생명은 생명이기 때문이다’)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도덕철학의 세 갈래(결과주의와 덕윤리 그리고 의무론)를 모두 관통하는 이 같은 ‘생명중심주의’는 다른 모든 가치들에 대해서 ‘생명 보존’이 가장 최고의 우위를 점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 보존’이라는 덕목을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는 행위들은 그 자체로 의문의 여지 없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행위로 판명되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콜브룩에 따르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에는 어떠한 폭력성이나 파괴를 할 자유로부터 보호/지도 받아야 하는 존재로서 인간주체를 재현하는 은밀한 관습이 있다. ‘기후 변화’라는 현실을 ‘인류가 만들어낸 전지구적 위기’로 재현해내는 오늘날, 인간내면의 ‘악’에 대한 경고와 그러한 소재를 다루는 내러티브는 (인간과 인간의 대결이라는 정치서사가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인간의 파괴력에 대한 내러티브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콜브룩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속 ‘정의로운’ 인간주체란, 결국 ‘무해함’을 증명할 때 가장 올바른 행위자가 되는 모델이라고 이해한다. ‘나’가 ‘남’에게 어떠한 해악(harmness)도 가하지 않을 때, 어떠한 해로운(harmful) 행위도 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가장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모델인 셈이다. 

하지만 콜브룩이 보기에 인간이 (어떠한 질량도 무게도 없는 ‘영혼’이 아닌) 구체적인 ‘물질’로 존재하는 이상, 자기자신이 아닌 것을 ‘소비’하면서 오염시키고 오염당하는 행위는 생명유지활동의 일부이자 ‘보편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어떠한 파괴나 오염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누구도 ‘착취’하지 않는 자기충족적인 생명유지 모델이야말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일종의 ‘신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를 통해서 지속되는 것은 자연환경을 ‘올바르게’ 이용하는 ‘선한 관리자’와 그렇지 않은 ‘악한 포식자’라는 이분법에 기반한 또다른 인간중심주의라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콜브룩이 이 같은 주장을 펼치는 맥락은 21세기의 ‘기후 위기’를 촉발시킨 초국가적 자본의 힘과 근대적 인간중심주의에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 아니다.  “생명은 파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라는 문장이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담론’으로 위치지어지고 분석될 수 있을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포스트-휴머니즘’이 가능하다고 전망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콜브룩은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논의를 빌려와 인간이라는 존재를 ‘기식자(le parasite)’로 사유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인간의 ‘운명’이란 내가 아닌 타자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소비하지 않고선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생명유지를 목적으로한 기식자의 소비행위란 행위자의 ‘자유의지’나 ‘선택’의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조건이며, 그러한 존재조건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와 관련한 사회적-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는 ‘무해한’ 인간성에 관한 도덕적 신화를 재생산 해낸다. 그리고 콜브룩이 보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속 생명중심주의적인 근대철학의 도덕관은 자기자신이 아닌 타자의 생명력을 소비하며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기식자’의 운명을 ‘도덕적으로 정당화 할 수 없는 죄’로 재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애도와 죄책감이라는 정동에 길을 터주었다.

4. 인간혐오와 인간숭배라는 동전의 양면

콜브룩에 따르면, 이렇게 죄책감과 애도를 생산해내는 휴머니즘적 생명중심주의에 기반한 도덕관이 견딜 수 없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삶의 무의미함이다. 콜브룩은 니체의 논의를 통과해서 이러한 주장을 전개하는데, 휴머니즘적인 생명중심주의가 계속해서 되살아나는 이유는, ‘삶’과 생명의 ‘존엄’에 너무나 큰 가치를 두는 이유는 그것의 무의미함-허무를 도저히 견딜수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 없음, 기생하고 기생당할 뿐인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폭력이 일어나고 고통을 반복적으로 겪게되는 삶의 무의미함(가치의 부재)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근대인’들은 차라리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려 설명하면, 위와 같은 선택의 결과가 바로 ‘노예의 도덕’이 탄생하는 계기로,  스스로를 죄책감과 애도의 노예로 만드는 도덕적 주체의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콜브룩은 여기서 더 나아가, 생명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를 차단하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에서는 죄책감과 애도만 생산되는게 아니라, 어떤 노스텔지어들, ‘이데아’의 형상들이 동시적으로 복원되고 (어쩌면 존재한적도 없었을지 모르는) 과거를 낭만화 한다고 분석한다. 이것은 콜브룩이 같은 책(Death of the PostHuman)에서 논의한 ‘포스트휴먼-인간성(post human-humanities)’의 내용과 일치하는 문제의식이다. 콜브룩에 따르면, 오늘날 ‘포스트-휴먼’ 담론에서 거부되는 것은 다름아닌 데카르트적 관점에서의 합리성-이성주의에 기반한 주체개념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환영받는 것은 그것의 대립항으로 간주되어온  비-이성(신체, 동물, 자연, 여성 등등)의 범주이다. 

그리고 이런 ‘특수’, ‘비이성’으로 간주되어온 것들의 회귀는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적이항대립의 위계적 이분법을 전도시킴으로써 근대적 이항대립을 (해체하기 보다는 오히려) 반복한다. 이제, 신체가 정신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특수한것으로 가정되어온 대립항들이 그 반대항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정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콜브룩이 보기에, 이러한 우월-열등 관계로 맺어진 위계적 이분법을 계속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이 바로 ‘니힐리즘(nihilism)’이다. 니힐리즘이란 ‘염세주의’, ‘허무주의’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니체의 논의에서 등장하는 니힐리즘이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현실세계(경험계)를 계속해서 부정하면서, 완전한 이상적 세계인 ‘이데아’를 찬양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니체의 관점에 따르면, 오늘날 인간에 대한 혐오와 인간에 대한 숭배는 언제나 이미 동전의 양면으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처럼, 콜브룩과 니체의 논의를 통과해서 다시 한번 <반도>와 <승리호>의 세계관을 들여다본다면, 몰락한 지구/한반도에 대한 ‘염증’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가족의 낭만화는 다름아닌 ‘니힐리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남성-가부장으로 대표되는 인간문명은 생태계에 대한 파괴를 일삼으며, 생존의 조건을 몰락시켰다. 하지만 그러한 몰락한 세계를 구원할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지구밖에서온 전혀 다른 외계생명체나 비인간행위자라기보단, 오히려  ‘새로운’ 인간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인간이란, 과거의 인류와 달리 지구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면서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무해한’ 인간성을 의미하며,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에 등장하는 모든 ‘종’(species)들 가운데 도덕적으로 가장 특권화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요컨대, 두 작품에서 ‘해로운’ 남성들과 실패한 가부장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구원할 주체는 여자-아이의 얼굴로 대표되는 젠더화된 ‘신인류’로 등장한다. 또한 이 같은 가치를 행동으로 옮기는 여성화된 주체들만이 포스트-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무해한’ 존재들로 재현된다. 하지만 이렇게 여성화된 주체들이 스크린을 통해 ‘신인류’로 재현되는 과정은 니체가 비판했던 니힐리즘(이데아/현실의 이분법)을 반복함으로써 ‘가족’이라는 이데아적 관계에 기반한 사랑과 헌신, 자기희생이라는 향수를 재생산해 낸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속 ‘해로운’ 아저씨들의 세계(이해관계와 폭력으로 얼룩진 군사조직과 자본의 세계)와 ‘무해한’ 소녀들의 세계(‘자기 희생의 가치를 실현하고 생명을 구하는 가족’)는 언제나 이미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대리보충의 관계로 재현되며, 이항대립적인 이분법의 사유를 넘어서기보단 그것에 의존하며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5. 나가며

문화평론가 문형준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가 인류세 시대를 문제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휴머니즘을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다시 휴머니즘으로 돌아오는 이 역설에서 벗어나는 것(문형준, 2018: 76)”에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가 이러한 역설에서 벗어날 경우 “인류세 시대의 ‘정치적 소설’(문형준, 2018:77)”이 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콜브룩과 니체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가 근대도덕철학의 생명중심주의에 기반한 인간중심주의와 니힐리즘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문형준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 중에서도 ‘좀비물’의 경우에는 휴머니즘의 역설에서 그나마 거리두기를 확보했다고 진단(문형준, 2018: 77)하지만, <반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그러한 역설은 ‘가족’이라는 사적영역의 낭만화를 통해 돌아오기도 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가 정말로 ‘급진적인’ 의미를 획득하기란, 어쩌면 혐오도 숭배도 아닌 관점에서 ‘인간성’을 사유할 수 있는 힘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 문형준(2017). “왜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은 인간을 살려두는가?: 인류세 시대 서사로서의 포스트아포칼립스 소설”. 영미문학연구회. 안과밖. Vol.0. No.43
  • ‘Why Saying ‘No’ to Life is Unacceptable?’ in Claire Colebrook, Death of the Post Human, Open Humanities Pres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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