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혼란을 마주하기: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과 만나며

지수

* 이 글은 필자의 석사학위논문 <페미니즘 알기의 의미: 10-20대 여성들의 ‘TERF’ 지지 입장을 중심으로> 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서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은 함께 경험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강화길, <다정한 유전>

1. 들어가며

2020년 1월 트랜스젠더 여성 A씨는 숙명여대 법과대학에 합격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자 A씨의 여대 입학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입학 반대 측 주장의 요지는 트랜스젠더 여성 A씨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기에 여성이 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A씨의 여대 입학이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한국에서 대두된 “TERF(트랜스젠더 배제 페미니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젠더 공부를 하는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입학 반대 측 주장보다는 입학 반대 측이 지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는 입장인, TERF 입장에 대한 비판을 먼저 접했다. 이들이 젠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여성이 구성되는 범주임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들이었다. 처음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런 것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서, 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 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해내고 싶다는 것. 그러한 설명을 통해 나는 그들과는 다른, 젠더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던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욕구에서부터 연구주제에 대한 관심이 시작되었다.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을 디지털 공간에서 찾아보았다. 디지털 공간을 통해 본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은 ‘생물학적 여성’만을 설명하는 지식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려는 목적을 나름대로 잘 달성하는 듯해 보였다. 그러한 지식을 통해 자신이 겪은 차별적인 경험들을 설명하는 것에 확신이 있어 보였고, 자신이 택한 입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같았다. 정리하자면, 디지털 공간에서 이 여성들은 하나의 입장을 택하여, ‘생물학적 여성’의 경험을 일관된 하나의 논리로 설명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동시에, 나는 디지털 공간에서 유독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의 입장이 명확해 보이는 것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내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해당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의 입장은 디지털에서 본 것처럼 명확하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은 혼란과 고민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고민들을 나에게 말하기도 했다. 자신들이 페미니스트가 맞는 것인지, 너는 어떻게 그러한 혼란들을 마주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일도 가끔 있었다. 정리하자면, 내가 만나고 있는 이들의 경험과 디지털 공간에서 본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왜 이들은 디지털 공간 밖에서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나? 트위터에서 보이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입장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이들에게 페미니즘을 ‘안다(knowing)’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공간 밖에서 여성들을 만나야 했다.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 어떤 경험들을 하며 페미니즘을 접하고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듣고 보기 위해서는 디지털 공간은 제약이 많았다. 디지털 공간이 담지 못하는 여성들의 경험들과 이야기들을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 연구는 같은 시기에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서도,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과 나를 구분 지으려 했던 내게는 더 이상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된 친구들에게 다시 말을 걸어보려는 시도이자, 그럼으로써 그들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였다.

2. ‘중립충’이 되기 싫은 페미니스트

이 글에서는 내가 만난 효진과 지원[1]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두 여성 모두 SNS를 통해 (효진은 트위터, 지원은 인스타그램) TERF 입장을 지지 표명하고 있었으며, 그 활동도 활발했다. 그러나 그 입장을 지지하게 된 계기와 유지하게 된 계기는 각기 달랐다. 

[1] 이 글에서 인용된 여성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효진은 트위터로 페미니즘을 처음 접한 10대 페미니스트이며, 현재는 ‘래디컬 라인(추후 인터뷰에서 효진이 말하는 ‘래디컬 라인’의 계정이 TERF 입장을 지지하는 계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의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고 있다. 효진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어떤 페미니즘이 맞는 것인지, 혹은 책을 읽고자 하는데 어떤 ‘라인을 타야’ 맞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녀가 디지털 공간에서 만난 페미니스트들은 그녀에게 하나의 단일한 입장을 노정하고, 그 입장의 규칙을 따를 것을 요구했다. 그 사례로, 그녀는 트위터에서 ‘래디컬 라인’의 주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표현한 사건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당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는 요지의 사이버불링(일명,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후 효진은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어떤 것이 ‘라인에 맞는’ 생각인지 찾아보고, ‘라인에 맞는’ 책도 읽으며 자신이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트위터에 게시하기도 했다. 책을 찾는 와중에도 ‘래디컬 라인’에서 제시하는 ‘답’과 맞는 것인지 비교하며 읽었다. 그렇게 조심하지만, 효진은 여전히 자신이 하고 있는 활동이 틀린 답을 제시하는 것일까 불안하다고 말한다.

효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디지털 공간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고 있는 여성들은 하나의 페미니즘 입장(효진의 언어로는, ‘라인’)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입장에 맞다고 생각되는 페미니즘 실천만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디지털 공간에서 페미니즘을 말하고자 하는 이들은 뚜렷한 입장이 없거나, 그 입장을 따르는 실천을 하지 않을 시 ‘중립충’, 혹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지가 없는 페미니스트들로 여겨지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계정들은 사이버불링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소셜미디어의 즉시성은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상황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보장하지만, 페미니즘 활동에는 반드시 신속한 대응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감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체임벌린, 2021). 이와 같은 위협을 피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을 말하기 이전에 어떤 입장에서 목소리를 낼 것인지, 어떤 실천을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은 하나의 필수적 과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효진은 페미니스트로서 ‘중립충’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중립충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래디컬 라인’의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용이했기에, 효진은 트위터에서 TERF 입장을 취해 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명확한 입장 표명과 그에 맞는 실천을 요구받는 상황 속에서, ‘생물학적 여성’의 단일 억압을 말하는 TERF 입장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용이하다. ‘생물학적 성별’ 외에는 여성들의 다른 구체적 조건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기에, 성차별적인 현실에 대한 간명한 문제 진단을 하는 것처럼 보이며, 문제 진단에 따르는 명확한 실천 방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3. 나 홀로 ‘참전’하기와 ‘답’ 찾기 

지원은 대학에서의 백래시와 페미니스트 낙인에 대항할 언어로서, 간명한 하나의 페미니즘 ‘논리’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지원은 남녀공학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이다. 인스타그램으로 페미니즘을 접했으며, 페미니스트로 정체화를 하고 난 이후에는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페미니즘 관련 게시글을 종종 공유하기도 한다. 지원은 SNS에 페미니즘 관련 게시글을 올리며, 학과 친구들과 인스타그램을 통해 언쟁도 해보았다. 친구들 또한 N번방, 메갈리아 등 여성 관련 이슈에 관심이 있고, 그와 관련한 글을 올리나, 대부분 여성혐오적 관점에서 작성된 글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친구들은 SNS에서 ‘N번방 사건은 젠더갈등이 원인’ 이라거나,‘‘메갈’이나 ‘일베’나 모두 똑같은 혐오집단이다’라는 주장들을 하고 있었다. 지원은 페미니스트로서 이러한 글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난다. 비록 이러한 말들에 대응하는 사람이 나 혼자이더라도, 여성혐오적인 게시물에 반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친구들의 생각이 조금이나마 바뀌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들을 인스타그램에서 빠르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복잡다단한 현실을 하나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메갈이나 일베나 다 똑같다’ 주장하는 친구들에게 성차별의 구조적 이해를 기대하기란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어려운 학술적 지식을 가져와 봤자 그들이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도, 희망도 없다. 지원은 페미니즘에 무지한 학교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지식이, 즉각적으로 반박하고 자신의 입장을 빠르게 재조직할 언어가 필요했다. 

지원의 사례처럼, 디지털 공간에서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은 여성혐오적 지식에 반박할만할 답을 찾는 것으로 여겨진다. 틀린 답을 제시하면 여성혐오자로 낙인찍히거나, 논리가 부족한 ‘메갈’로 공격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과 논쟁하는 상대를 이길 수 있는 간명한 지식이 되고, 고민과 복잡한 사유는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해 간명한 지식을 요구하게 되며, ‘생물학적 여성’의 단일 억압을 주장하는 TERF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동시에 지원은 ‘(생물학적) 여성 우선’ 페미니즘에 확신이 있다. 지원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로는 남성중심적 대학 공간에서 혼자 외로이 싸워야만 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기도 하다. 지원은 대학 입학 이후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했을 정도로, 대학 공간에 만연한 여성혐오적 문화에 신물이 난다. 그녀를 포함한 여학우들을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남성 학우들에 대한 분노는 지원을 페미니스트로 만들었다. 지원의 대학에서는 외모 평가뿐 아니라 성희롱, 성폭력 사건도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학교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논의할 상황은 되지 못한다. 주변 친구들과 부당함을 토로하거나 개인 SNS 계정을 통해 문제적인 언행을 한 남학생을 ‘저격’하는 게 다이다.

지원의 성평등을 위한 시도가 개인적 차원의 부당함 공유에 그치는 이유는 그녀가 있는 대학에서 함께 싸울 이들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여학생회나 단과대 차원에서 윤리 위원회 등을 통해 성폭력을 공론화하거나 차별적 발언 등을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내규상 명시된 규칙일 뿐, 실질적으로 기구가 작동하지는 않고 있다. 대학 공간에서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페미니즘 지식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고, 학내 페미니즘 소모임과 동아리 또한 급증하고 있는 반면, 이에 대한 백래시 또한 강화되고 있다. 백래시와 포스트 페미니즘의 물결이 대학가를 강타하며, 총여학생회 등과 같은 공식적 자치기구는 매년 존폐 위기에 부딪히고, 여성주의 의제 생산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김민정, 2020). 이러한 상황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고, 여성들 간 위치의 차이를 만드는 구조를 논의하고 사유할 기회 자체를 제약하고 있었다. 성차별에 공동체적으로 대응할 대학 내 기구나 적절한 조직 차원의 제도를 찾기 어려운 상황(유현미, 2022)에서 여성들은 성차별에 개인적으로 대응하며, 고립되기 쉬운 환경에 놓여있는 것이다. 명확한 입장 표명과 그에 맞는 실천을 요구받는 상황 속에서, 페미니즘 논쟁에서 빠르게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 싸우기가 기대되지 않는 상황에서, 디지털 공간에서 접하는 TERF 입장은 이들이 선택 가능한 유일한 입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페미니즘 실천은 개별적 운동으로 제한되며, 페미니즘 지식은 ‘생물학적 여성’의 경험만 설명하면 되는 것이 되고, ‘생물학적 여성’이외의 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연동되기 힘든 것이 된다.

4. ‘제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요?’: TERF 입장을 통해서 발화될 수 없는 욕망과 경험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지털 공간에서 페미니즘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발화 이전 입장 선택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단일한 입장으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과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들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 입장에 따른 실천 또한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여성들은 디지털상에서나 표면적으로는 입장을 확고하게 지키고, 고수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내가 디지털 밖 공간에서 실제로 만나 본 여성들은 그 규준을 접하며 완벽한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이라면 탈코르셋, 4B 등을 실천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내심의 솔직한 욕망과 경험들은 어디에서도 말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말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솔직히 말하자면’ 이라고 밝히며 자신의 경험과 지식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 ‘사회적 여성성’, 즉 꾸밈과 여성을 연결시키기에 TERF 입장을 지지한다고 말한 효진은, 페미니즘 실천의 필수적 요소로 탈코르셋을 꼽는다. 여성이 화장하지 않고 머리를 자르고 남자처럼 다닌다면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을 것이며, 성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범죄의 두려움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기 위해서는 탈코르셋만이 그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여성이 탈코르셋 실천을 해야 꾸밈과 여성이 연결되지 않는 사회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서 성평등이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효진은 지금까지 해 온 화장과 꾸밈을 포기할 수 없다. 화장하고 있으면서 그에 기쁨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에 ‘인지부조화’를 느끼기도 한다. 효진은 화장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는 또래집단의 문화를 이야기하며, 화장은 친구들을 사귀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화장이었으나, 지금은 그러한 또래 집단 내에 있지 않음에도 효진은 화장과 꾸밈을 지속하고 있고, 그것들에서 오는 즐거움을 시인하고 있다. 그냥 예쁘게 보이고 싶기도 한데, 그러한 꾸밈을 ‘놓지’못하는 자신과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모습에 ‘인지부조화’가 온다.

한편 그녀가 느끼고 있는 솔직한 생각들은 트위터에서 말해질 수 없다. 자신이 속한 입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면 조리돌림을 당한다는 것을 경험해 본 효진이기에, 절대 화장했다는 사실을 트위터에 알리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로서 비난받지 않고 안전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꾸민다는 사실을 숨겨야 하는 것이다. 트위터에서는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입장에 지지 의사를 표명하지만, 여전히 화장이 좋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다. 트위터상에서 자신이 화장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효진과 같이, 단일한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거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이 취하고 있는 TERF 입장과 맞지 않는 경험들을 발화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한 경험들은 발화되지 못함으로 인해 여성 개인의 모순과 혼란의 영역에 남아있게 된다. 

단일한 입장 고수의 문제와 더불어,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 또한 여성들의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디지털 공간을 통한 사회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즉각적 대응과 실천을 요구하며, 지금, 이 문제에 함께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체임벌린, 2021). 그러한 실천은 하나의 단일한 입장에 따른 답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특정 행위나 실천(탈코르셋, 4B 등)을 해야만 ‘진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원은 자신이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지원이 디지털 공간에서 본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탈코르셋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작 학교에서 탈코르셋을 한 페미니스트를 단 한 번도 실제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완벽한 페미니스트는 탈코르셋을 하고 이성애를 ‘버리는’ 그리고 채식하는 이들[2]로 생각되기에 왠지 그것을 따라야 할 것만 같다. 이러한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원의 ‘알기’의 과정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지원은 학교의 여성학회를 들어가고 싶어서 학회 SNS를 찾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SNS를 통해 본 여성학회의 회원들은 자신과 다르게, 완벽한 페미니스트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모두 탈코르셋을 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지원은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페미니스트들과 자신이 상반된다고 생각하며, 그들이 자신을 우습게 생각할까 봐 두렵다. 자신도 완벽하지 않은데 누구한테 여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할 것이며, 또 그런 자신이 말을 한다고 해서 설득력이 있을까 의문이다. 그러한 고민 끝에, 결국 지원은 여성학회에 들어가기를 포기했다. 

[2] 디지털 공간에서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흔히 채식 등의 실천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동물권이나 다른 타자에 대한 권리보다는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를 최우선으로 한다고 보여진다. 한편, 디지털 공간 밖에서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하나의 단일한 실천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청년 여성들의 페미니즘 실천은 한 진영이나 노선으로 단일하지 않으며(오혜진, 2019), 개인에 따라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이라도 채식을 하는 것이 완벽한 페미니스트 규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이예진, 2022). 이처럼 여성들의 실천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 이러한 실천과 생각은 개인이 처한 사회적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화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해 이 글에서는 트랜스젠더 배제 페미니즘(TERF)를 하나의 입장으로 보고, ‘TERF’, ‘TERF 진영’등의 표현을 지양하고 ‘TERF 입장을 지지하는 여성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했다. 

지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여성들은 학내 백래시나 낙인의 두려움, 개별화된 운동방식과 완벽한 페미니스트 규준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페미니즘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고립되기 쉬운 환경에 놓여 있다. 이처럼 다른 여성들의 경험을 듣지 못하고 고립되는 것은 자신의 입장을 벗어나 사고하는 것을 더욱더 어렵게 한다.

5. ‘답답함’을 넘어서기 위해

페미니스트 입문의 과정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을 독해할 언어를 찾게 되고,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하고 설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페미니스트 입문의 과정을 되새겨보자면, 성차별적 경험을 하고, 경험을 설명할 지식을 찾고, 그 지식으로 자신이 겪었던 것이 성차별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은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는 중에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과정이며, 경험과 지식을 오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페미니즘을 알아간다.

이와 같은 ‘알기(knowing)’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하딩의 개념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딩(2009)은 어떻게 성차별적인 이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한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차별받았던 여성의 입장에서 사고하면 된다. 그러나 이 입장은 자연히 ‘생물학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여성들의 입장(women’s standpoint)이 아닌 페미니스트 입장(feminist standpoint)을 의미한다. 페미니스트 입장에 있는 이들은 주류 사회 질서로부터 배제되었던 타인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이들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설명할 지식을 만드는 데 있어, 타자의 관점을 경유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경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위치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여성의 관점을 통해서는 더 잘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알기’란 타인을 경유해서 내 위치를 사유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알기’의 과정은 늘 선형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우리는 종종 그 과정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어느 것이 나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인지 가늠해보는 과정 중에서 혼란에 빠지기도 하고, 그 지식에 맞지 않았던 나의 경험과 욕망이 뭔가 ‘틀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경험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옳은 지식, 틀린 지식이란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지원과 효진이 찾으려 했던 ‘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확실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선택한 이상, 우리는 늘 질문하고,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헤맬수밖에 없다. 안다는 것은 기존의 나의 세계를 깨는 것이기에 언제나 불확실하고, 고통스럽다.

다만,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며 덜 고통스럽고, 덜 불안하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같이 헤매고 이야기하는 과정 중에서 나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할 지식, 그래서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실마리가 될 지식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경험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경험도 보며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왜 여성들이 그 지식에 닿지 못하는지, ‘알기’의 과정이 어떻게 가로막히는지에 대한 조건들을 질문해야 한다. 왜 서로에게 말을 아끼고 혼자서 혼란에 빠지게 되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부끄럽지만, 내가 이 연구주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 즉 ‘알지 못하는’ 너와 꾸준히 공부하는 나는 다르다는 구분짓기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다. 어차피 당신의 지식이 틀렸다고 선언하는 말들은 상대에게 가닿지도 않을 것이다. 선언과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같이 헤매는 것은 어떨까. 서로의 혼란을 마주 보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가 시작해야 할 지점은 너의 지식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의 혼란을 다정하게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그러한 고민들을 만드는 상황과 조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자. 너와 내가 어떤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렇게 서로의 경험들과 조건들을 들여다보게 되면,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우리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게 될 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 김민정(2020).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대학 내 ‘성(性)’ 강의 지형 탐색”, 『한국여성철학』, 33, 143-181쪽.
  • 유현미(2022). “대학성폭력의 지속과 성별화된 능력주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 이예진(2022). “페미니스트 실천으로서의 비거니즘 : 고통과 억압에 대한 청년 여성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 Chamberlain, Prudence. (2017). The Feminist Fourth Wave: Affective Temporality, London: Palgrave macmillan, 김은주·강은교·김상애·허주영 옮김(2021), 『제 4물결 페미니즘: 정동적 시간성』, 에디투스.
  • Harding, Sandra. (1991). Whose Science? Whose Knowledge?: Thinking from Women’s Lives, Ithaca,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조주현 옮김(2009).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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