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1. 말해지지 않은 것
지난 6월,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열린 <드랙x남장신사>의 마지막 회차 공연을 관람했다. 무대를 바라보며 줄줄 울었다. 마스크 안쪽으로 콧물 눈물범벅이 되었을 때, 좌석 곳곳에서도 코 훌쩍이는 소리, 어깨가 들썩이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극에 대해 허윤은 무대가 그간 대문자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퀴어의 개인사를 공공역사로 직조해냈다고 쓴다. 관객들은 “보통 사람들의 개인사를 마주하면서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감각”하며, “우리의 삶은 기록될 자리를 확보한다”(허윤, 2022). 여기에 깊이 동의하면서, 나는 조금 다른 이유로도 울었다고 느낀다.
공연장을 나와 신촌역 쪽으로 향하는 인파에 섞여 걸었다. 곧 어떤 몸, 얼굴이 공연장에 함께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자긍심의 달(pride month)의 어느 날 ‘이쪽’ 티를 내며 공연장으로 모여들어 서로를 확인하던 사람들이 식별 불가능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선가 무엇인가로 패싱되고 또 실패하면서도(리타(2022)의 말대로 끊임없는 실패와 오인의 경험이야말로 퀴어의 감각이기도 하므로) 이들이 제각각의 시간을 비밀스럽게 품에 안고 흩어진다는 사실은 허무하기보다 경이로웠다.
2. 오해
실컷 울고 난 후 찾아온 생각들을 쓴다. 대체 무엇에 정동되어 우는지 스스로 물어보다가 아르바이트 중에 앨런 긴즈버그의 시 「닐의 재에 대하여(On Neal’s Ashes)」를 읽고 울던 기억을 겹쳐 보게 되었다.
시를 알게 된 건 진은영 시인의 한 인터뷰에서였다. 그는 “긴즈버그가 스무 살도 안 된 청년이었던 애인이 죽은 이후에, 그 죽음을 슬퍼하면서 그의 육체의 부분들을 다 호명하는 시를 썼”고, “시인이 같은 육체를 가진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 느낌이 강렬”했다고 말했다(진은영, 2019). 그러나 시의 주인공 닐 캐서디를 구글링하며 정작 내가 발견한 것은 그가 42살 생일을 앞둔 1968년 어느 날 멕시코의 한 결혼 파티에 참여해 술을 진탕 마시고 걸어가던 길 위에서, 명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채 혼수상태로 발견되어 응급실에 실려간 후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캐서디는 비트 문학의 상징인 잭 케루악의 소설 『길 위에서』의 ‘딘 모리아티’ 캐릭터의 모델이기도 했으며, 긴즈버그의 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십 대 때부터 소년원과 교도소를 전전했으며, 두 번의 이혼을 겪고 여러 차례의 불륜 관계를 맺었는데, 약 20년간 긴즈버그와 지속한 느슨한 동성애적 관계도 그 일부였다. 그는 자유의 극단적인 화신이었고 생(living)에 미쳐있었던, 미국 비트 세대의 뮤즈였다. 몇몇 웹 페이지들이 말해 주는 이 모든 이야기는 얼마나 정확하고, 그건 또 어떻게 얼마나 중요할까?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긴즈버그의 시에서 “스무 살도 안 된 청년 애인”의 몸과 중년의 늙어가는 캐서디의 육체가 맞바꿔지는 그 지점에 붙들린다.
Delicate eyes that blinded blue Rockies, all ash
Allen Ginsberg, On Neal’s Ashes, July, 1968
Nipples, ribs touched w/my thumb are ash
Mouth my tongue touched once or twice all ash
bony cheeks soft on my belly are Cinder, ash
earlobes & eyelids, youthful cock-tip, curly pubis
breast warmth, man palm, high school thigh,
baseball biceps arm, asshole anneal’d to
silken skin all ashes, all ashes again.
3. 관계의 시간
화자는 ‘그’의 신체 부위를 하나 하나 호명한다. 블루 록키처럼 섬세한 눈동자, ‘나’의 엄지가 닿았던 젖꼭지, ‘나’의 혀가 한두 번 만졌던 그 입, ‘나’의 배에 부드럽게 닿았던 두 뺨, 귓불과 눈꺼풀, 앳된 귀두, 둥그런 치골, 남자다운 손바닥, 고등학생 같은 허벅지, 야구로 다져진 이두박근, 실크 같은 피부에 달궈진 항문······. 화자에게 호명되는 이가 젊은 동성의 연인일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 시의 독특함은 단지 시인이 같은 성性의 육체를 가진 연인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도 너무, 너무 있지만.) 독특성은 사실 ‘그’가 ‘나’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물리적이며 ‘사실’적인 시간선에서 비껴나가 존재한다는 데에도 숨어있다. 시 말미에 명시된 표지인 1968년, 중년의 캐서디가 여전히 ‘실크 같은 피부’를 가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시는 선형적 궤적을 따라 ‘그’가 죽은 현재 시점의 ‘사실’적인 ‘그’의 모습을 그리기보다 과거로 향하고 있다.
설사 시를 긴즈버그와 캐서디의 구체성으로부터 떼어놓는다 할지라도, 화자는 자신의 몸에 닿았던 생생한 ‘너’인 육체와 ‘너’라는 잿가루가 드러내는 이해하기 힘든 동일성을–‘너’를 여전히 곱씹는다. 화자는 몸의 부분 부분들이 잿가루로 ‘변했다(became/transformed/reduced to)’고 쓰지 않는다. 다만 몸이 재라고(are Cinder, ash) 쓴다. 육체라는 기억의 이미지는 한 줌의 재라는 현재의 이미지와 이어지면서 충돌한다.
퀴어한 애도는 이 충돌을 단지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시는 ‘너’의 두 존재 양식이(과거의 육체와 현재의 재) 충돌하면서도 연결되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사태 안에 남는다. 이성과 논리를 거스르면서 어떤 사태는 손쓸 새 없이 밀려온다.
애도 행위는 끊임없이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가속화 사회의 시간선으로부터 애도하는 이들을 ‘뒤처지게’ 만들기 때문에, 그럼으로써 그들이 다른 시간성을 창조하게 하기 때문에 퀴어 시간성(queer temporality)[1]과 맞닿아있다. 과거에 ‘집착’하는 애도 행위는 오랫동안 ‘여성적인’, ‘비생산적’이며 한심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행위로 폄하되어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이성애규범이 구획한 시간적 궤도에서 이탈해 ‘우리’를 돌보는 시간–퀴어 시간에는 분명 어떤 힘이 잠재해 있다.
‘우리’의 퀴어한 시간은 그렇게 확보된다. 긴즈버그의 시가 퀴어하다면 그 이유는 여기에도 분명히 있다. ‘현재’에 양립 불가능한 ‘너’의 두 존재 양식을 생성하며 퀴어의 자리와 시간을 창조하기 때문에. 김경태가 쓰듯, 관계를 돌보기 위해 현재를 쓸 때 “퀴어를 위한 시간이 출현”하고 퀴어가 “무엇보다 현재의 시간을 관계에서 느리게 향유하는 정체성”(김경태, 2020: 13)이라면 긴즈버그의 시는 시간과 맺는 관계, 그리고 모순된 시간 안에서 마치 너무 소중하고 내밀해 더 말해줄 수는 없다는 듯 오직 암시되기만 하는, ‘너’와의 접촉으로 감각되는 (‘나’의 엄지가 닿았던/‘나’의 혀가 한 두 번 만졌던/‘나’의 배에 부드럽게 닿았던/···) 이 축축한 관계성 때문에 퀴어하다.
40대의 캐서디가 긴즈버그와 몇 번 자지도 않았다는 ‘카더라’에 나는 그래서 더 매혹된다. ‘사실’을 혼동했거나 ‘잘못’ 기억했을 진은영의 감상을 붙잡고 과잉 반응한다. 긴즈버그의 애도 시에서 소환된 과거가, 1968년의 시점에서 적어도 20년은 되었을 과거일지 모르고, 긴즈버그가 그 시간, 그 관계를 쉽게 놓아주지 못했으리라는(아마 캐서디의 생전에도) 상상에 휩싸인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잘못’ 이해되거나 상상됨으로써 긴즈버그와 캐서디의 관계가 더 비밀스럽게 보존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매혹된다.
[1] 퀴어들이 시간의 선형적 흐름을 거슬러 비규범적 관계 안에서 다른 삶을 갈망한다는 점에 착안해, 김경태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정동적 수행으로부터 탄생하는 시간성을 ‘퀴어 시간성’이라고 명명한다(김경태, 2020: 4).
4. 자기-재연과 빈자리
퀴어 시간성은 <드랙x남장신사> 퍼포머들의 자기-재연(self-reenactment)을 거쳐 공연장에, 그리고 퍼포머들의 신체에서 계속 생성되기도 했다. 관객들은 ‘현재’의 윤김명우, 색자, 나비, 레오가 관계를 다시 살아내고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남인영에 의하면 재연은 아카이브 영상자료가 부족한 때에 전문 배우가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다큐멘터리에서 자주 쓰이는데, 이와 달리 실존 인물의 자기-재연은 자신의 삶을 보다 ‘진실되게’ 드러낼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이 수행이 늘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남인영, 2012: 150). 이 독특한 전략은 생애사 기반의 다큐멘터리 극을 표방하는 <드랙x남장신사>에서 빛을 발한다. “연기와 비연기의 연속체(continuum)”(남인영, 2012: 151)에서 유동하는 퍼포머들의 불확정적인 상태는 ‘킹’과 ‘퀸’,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무는 드랙의 시각 예술 형식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낯설게 공존하게 하는 퀴어 시간성에 뒤섞인다.
재연은 보통 신체의 가시적인 수행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드랙x남장신사>의 공연은 종종 퍼포머들이 자리를 비운 공간에 핀포인트 조명을 비추고, 녹음된 음성을 재생하며 관계를 재연했다. 조명 아래 선명한 부재의 자리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윤김명우가 혈연 관계를 떠나 사업을 하고, 혈연 가족에게 또다시 상처를 입고, 그럼에도 퀴어 친족들과 의지하며 살아 온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누군가에게 상처 입혔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관객을 ‘딸들아’라고 부르는 색자가 친어머니와 맺은 관계, 어머니가 꾸었던 색자의 태몽에 대해서도.
무대 위 텅 빈 공간은 바로 그 ‘없음’을 통해 두 퍼포머가 과거의 어디에선가 이루어 왔을 삶의 복잡한 문양을 불완전하게나마 짐작하도록 한다. 빈 공간을 바라보며 나는 구술 채록자 앞에서 증언(또다른 자기-재연)했을 윤김명우와 색자를 상상한다. 관계를 애도하려 ‘현재’의 흐름을 정지하는 얼굴을 상상한다. 이 상상은 빈자리를 헤매다 목소리의 떨림, 숨소리, 말 사이의 간격 같은 것들의 힘에 압도되어 어떠한 ‘답’으로도 귀결되지 못한다.
5. 비밀의 시간
텅 빈 공간은 곧이어 퍼포머들에 의해 채워졌지만, 그 자체로도 남아있다. 막이 오르기 전, 관객석을 마주 보는 무대 위에 세 개의 빈 의자가 놓여 있던 그 장면[2]이 내게 아직 남아있듯이 말이다. 빈 의자는 공연의 첫 장을 여는 권은혜, 이리, 이효진 배우의 자리였다. 이들은 역할을 바꿔가며(이리는 젊은 윤김명우 역을 맡아 그와 나란히 서기도 했다) 명동 다방에서 처음 레즈비언 문화를 접했던 어린 윤김명우의 동료로, 그가 신촌 레스보스를 개업했을 때 손님으로 찾아온 선후배로, 또 색자가 이태원 클럽에서 일하며 ‘풍기 문란’으로 경찰에 연행될 때 함께 끌려갔던 동료로도, ‘부치 박스’로 고뇌하는 논바이너리로, 나비의 동료로, 레오와 케이팝 커버댄스를 추는 퀴어 친구들으로 계속 계속 나타났다. 그래서 빈 의자, 무대 위 공백을 쬐던 조명은 ‘당사자’ 퍼포머들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그들을 구성해 온 관계의 자리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리는 또한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마련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관객석에서 훌쩍거리고 환호했던 퀴어들과의 자리바꿈을 상상한다. 공연장 바깥을 돌아다니는 익명의 퀴어와의 자리바꿈도 상상한다. 그 상상 속에서 무엇이 당신을 뒤흔드냐고, 울고 웃게 하냐고 묻고 싶다. 퍼포머들이 그랬듯 몇몇은 삶의 조각을 보여줄지도 모른다. 서로 마주 보고 그걸 나눌 수도 있다. 그 사이사이 다른 조각은 말줄임표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에 자신을 내어주면서 후회하거나 울고, 비웃거나 누워서 비밀스럽게 상처를 음미할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은 말하지 않기로 강제되는 것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후자를 폭로하는 것이 정치라고 여겨지곤 한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만의 연약한 ‘세계-만들기’에 함께 해준 이들, 비밀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을 떠올리며 전자의 가치에 대해서 중얼거리고만 싶어진다. <드랙x남장신사> 속 비언어적인 수행과 자기-재연, 「닐의 재에 대하여」의 행간에서 암시될 뿐 낱낱이 고백되지는 않는 관계적 세계-만들기에 대해서도.
또 하나. <드랙x남장신사>가 전하는 ‘당사자’ 퍼포머들의 서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폭력의 경험이다. 그들도, 관객도 살아있는 한 폭력에서부터 생존한 생존자이며, 폭력을 삶에서 완전히 도려낼 방도 없이 살아가는 생존자다. 폭력 한 가운데에서 퀴어의 사랑, 욕망, 흉터, 상실이 ‘공공역사’로서도, 동시에 ‘사적’인 방식으로도(Young, 2017)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면······. <드랙x남장신사>는 그 가능성을 밝혀 보이는 것만 같고, 그 절실한 아름다움이 나를 흔든다.
이 글을 쓰고 나서 호세 에스테반 무뇨즈의 『화장실을 크루징하기(Cruising the Toilet)』를 읽는다. 무뇨즈는 자신의 퀴어한 과거를 부정하고 수치스러워했던 흑인 극작가 리로이 존스/아미리 바라카의 극 <화장실(The Toilet)> 결말에 대해 쓴다. 주인공들의 비밀스러운 몸짓에 “아직-여기에-없는”, 도래하지 않은 미래성이 움튼다는 것인데, 이는 <드랙x남장신사> 퍼포머들의 몸짓, 표정은 물론 마지막 넘버의 가사(“죽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도 않아” / “무사히 어른이 될 수 있을까”)를 떠올리게 한다.
“동성애혐오 폭력의 내외부적인 광분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두들겨 맞고, 멍든 이 전투적인 연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입은 인정의 순간에 함께 한다. 이 인정의 순간은 지금-여기에 단지 고통으로 가득한 젊음의 순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로 무언가가 부재하다는 것을 넌지시 말하고 있다. [극중 연인들의] 몸짓은, 블로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기-아직-없는 것을 가리킨다. (…) 자신이 배신한 연인의 머리를 감싸안는 몸짓은 그러므로 폭력을 누그러뜨리는 속죄의 몸짓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토피아의 씨앗이자 예측하는 깨달음인 ‘현재 안의 미래’다. 그것은 미래성 안의, 미래성을 향하는, 미래성을 위한 존재다.”
José Esteban Muñoz,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pp.90-91.
[2] 아래 이미지 참조. 이 세 개의 의자 외에도 이지구와 안마루의 연주 공간과 함께 그들을 위한 두 개의 빈 의자가 더 있었다. 무대 가장 오른쪽에는 수어 통역사들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참고문헌
- 김경태(2020). “동시대 한국 퀴어 영화의 정동적 수행과 퀴어 시간성 – <벌새>, <아워 바디>, <윤희에게>를 중심으로”, 『횡단인문학』, 제6호, 1-25쪽.
- 남인영(2012). “지표성의 탐구: 다큐드라마로서 <달빛 길어올리기>”, 『영상예술연구』, 제21호, 129-158쪽.
- 리타(2022년 6월 11일). “성소수자들의 사랑에 자리를 내주지 않는 세상”, 한국일보.
- 신나리, 진은영(2019년 1월 4일). “시인 진은영: 아름답고 정치적인 페미니스트 (상)”, 핀치.
- 허윤(2022년 6월 17일). “시끄럽고 요란하게… 역사적인 것이 온다”, 한국일보.
- Muñoz, José Esteban(2009). Cruising Utopia: The Then and There of Queer Futurity, New York University Press. pp.83-96.
- Young, Iris M.(1990). 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김도균·조국 옮김(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서울: 모티브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