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대담에서 예고한대로, 이번 모임에서는 2010년대 이후 듀나의 페미니스트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두 단편 「바쁜 꿀벌들의 나라」(2019)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2021)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바쁜 꿀벌들의 나라」는 퀴어를 주제로 한 큐큐퀴어단편선의 두 번째 책 『인생은 무너지기 언제나 일보 직전』에 실린 단편으로, 인류가 종의 재생산을 위해 더 이상 임신과 출산을 거치지 않을 수 있게 된 미래를 그립니다. 이제 인간을 분류하는 가장 기본적인 범주는 여성과 남성이 아닌 생식을 하는 자 ‘브리더’와 생식을 하지 않는 자 ‘워커’입니다. 듀나는 새로운 인류가 건설한 개척 행성 ‘해랑 4’에서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 미래에 불시착한 과거의 인간들이 저지른 강간살인과 1년에 한 번씩만 이루어지는 ‘재래식’ 출산을 교차시키면서, 인간성이라는 관념을 구성하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숙고합니다.
한편,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은 ‘촉법소년, 성 착취, 인공지능’이라는 세 가지 소재를 중심으로 꾸려진 선집 『낯익은 괴물들』의 성 착취 파트에 실린 단편입니다. 외계 행성을 정복한 한 무리의 지구인 남자들이 성 노예로 삼기 위해 토착 생물의 유전자를 조작해 만든 ‘닛-이실’인들은 지구인 압제자들을 몰아낸 후에도 여전히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이들은 ‘찢어진 종잇조각 교회’라는 종교를 만들어 닛-이실인들의 이데아를 희구합니다. 듀나는 닛-이실의 이웃 행성에서 닛-이실인 대사관 직원을 강간한 지구인 남성 ‘고화’를 닛-이실로 호송하기 위해 파견된 지구인 여성 소통관 ‘노의’의 시각에서 닛-이실인들의 사회와 종교를 묘사합니다. 이를 통해 피억압자의 정체성이라는 첨예한 문제를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벼려냅니다.
대담자 : 강은교(오온), 송유진, 이하영, 최가은, 허주영
‼️ 대담 내용은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
1. 「바쁜 꿀벌들의 나라」: 젠더 이분법 너머의 섹슈얼리티
오온: 두 번째 대담에도 함께해주셔서 감사하다. 먼저 「바쁜 꿀벌들의 나라」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을 선정한 이유는, 두 작품 모두 1970-80년대 미국 페미니즘 SF의 고전들을 참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SF 소설의 페미니즘적 가능성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논의에서 누락되다시피 한 듀나의 최근작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성서사’를 둘러싼 최근의 출판 시장 트렌드를 고려할 때, 두 작품 모두 특수한 국면에 기획된 흥미로운 선집에 실린 흥미로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유진: 듀나가 「바쁜 꿀벌들의 나라」가 실린 큐큐퀴어단편선이 출간되었을 때, 트위터에 출간 소식을 알리면서 남긴 코멘트가 인상적이었다. “저만 눈치없이 분위기 안 맞는 이야기를 썼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어요.” (트윗 보기) 그런데 읽어보니 정말이었다. (웃음)
오온: 정말이다. 단편집을 쭉 읽어보면 다들 한껏 진지한데 듀나 혼자 스웨그가 넘친다. 알아차리셨는지 모르겠지만 제목의 레퍼런스는 박근혜가 ‘바쁜 벌꿀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라고 잘못 인용한 바 있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이다. 소설 속 미래 세계는 재생산과 섹슈얼리티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젠더 이분법이 무용해진 꿀벌 인간들의 사회다. ‘퀴어’라는 테마가 주어졌을 때, 듀나는 1970년대의 고전적인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오마주하는 방식으로 접근한 거다. 이는 소설의 주제 의식, 그러니까 “개척 행성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부지런히 건설해나가고 있는 일벌들에게 ‘순수한’ 인간성에 대한 향수 어린 애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1]는 메시지와 곧장 연결된다. 문자 그대로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는 거다. 이렇게 제목의 ‘꿀벌’이 소설 속 세계의 형태, 소설의 주제 의식, 소설 밖 세계의 맥락이라는 세 개의 층위를 관통하고 있다. 선집의 퀴어 테마를 충실히 구현하는 동시에 같은 시대의 대한민국을 살았던 이들만 알아차릴 수 있는 펀치라인을 심는 재치가 대단한 것 같다.
[1] 강은교(2022). “페미니스트 세계만들기(worlding)로서 듀나의 SF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56쪽.
가은: 「바쁜 꿀벌들의 나라」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두 소설 모두 새로운 세계 질서에 과거의 질서가 침입하면서 갈등이 발생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두 소설 모두에서 신구가 맞부딪히는 결절 지점이 강간으로 설정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바쁜 꿀벌들의 나라」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해랑 4의 시민들은 강간을 낯설어 하는만큼 임신도 낯설어 한다는 점이었다. 이곳에서 섹스를 통해 만들어지는 가장 성스러운 결과물이 임신이라면, 가장 폭력적인 결과물은 강간으로 대비되는 것 같았달까. 그렇다면 이 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이해되는 걸까? 또, ‘잠동무’라는 관계는 정확히 어떤 관계일까? 하는 물음이 들었다.
주영: 나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다. 잠동무는 있지만 강간은 없다는 건 무슨 뜻일까? 섹슈얼리티와 욕망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되, 강간이 일어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사회라는 설정이 약간 모순되지 않나 싶었다.
유진: 해랑 4가 권력과 위계가 없는 사회여서가 아닐까? 강간은 섹슈얼리티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성별이나 직업에 따라 위계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이기에 잠동무는 있지만 강간은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온: 그런 것 같다. 듀나는 인류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 진화하는 테마를 작품에서 여러 번 다뤘는데, 이때 구인류의 특징으로 자주 제시되는 것이 강간으로 대표되는 남성적인 폭력성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자주 강간을 이야기하면서도 강간이라는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바쁜 꿀벌들의 나라」에서도 옛 지구인이 왜 강간살인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설명되지 않지 않나. 듀나에게서 강간은 공들여 묘사할 필요가 전혀 없는, 구인류의 하찮은 악행일 뿐인 거다.
유진: 결말부가 화룡점정이라고 생각했다. 해석의 어려움을 증폭시킨달까. 다예가 채이에게 “너는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존재가 같잖지?”(247)라고 물을 때, 여기에서 ‘우리’가 어디까지를 지칭하는 건지도 아리송했다. 해랑 4의 브리더들만을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해랑 4에 불시착한 ‘옛날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건지. 맥락 상 전자가 아닌가 싶다가도, 어쨌든 다예를 비롯한 브리더들은 생물학적으로는 ‘옛날 사람’에 속하지 않나. 그런데 채이는 다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하영: 그 대화 바로 전에 해랑 5에서는 브리더 없이 워커로만 사회를 건설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섹슈얼리티에서 폭력성만 깔끔하게 제거한 삶이 정말로 가능한가?’라는 주영의 물음이 앞으로 해랑 5에서 실험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결말부가 이 소설의 핵심인 이유도 이러한 점에서가 아닐까.
가은: 지난 대담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듀나는 아버지의 세계를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치부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삶을 다르게 이어나갈 것인지를 질문하는 듯하다. 채이의 입을 빌어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244)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 않나. 그렇게 본다면 해랑 4의 강간살인 사건은 과거로부터의 침입인 동시에, 신인류가 외계 행성에 새롭게 건설한 사회일지라도 과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균열 하나 없이 매끈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한 것 같다. 뒤이어 논의할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에서와 마찬가지로, 「바쁜 꿀벌들의 나라」에서도 권력과 위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고 해서 폭력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주영: 소설의 초반부에 이 사건이 해랑 4의 37년 역사상 일어난 세 번째 살인 사건이라고 언급된다. 그러니까 강간이 일어난 건 처음이지만, 살인이 일어난 건 처음이 아닌 거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듀나는 살인보다 강간을 더 심각한 범죄로 보는 것 같다. 과거의 인간성에서 덜어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강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달까.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폭력성에서 강간이라는 행위만 없어진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다. 그렇다면 듀나가 그리는 새로운 세계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인간성’의 측면은 어떤 걸까? 이렇게 되물을 때 흥미로운 지점은 결말부에서 비춰지는 채이와 다예의 관계가 부치와 펨의 관계로 읽힌다는 점이다. 젠더 이분법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사회이지만, 어찌보면 꽤나 클래식하고 로맨틱한 결말이지 않나. 게다가 젠더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브리더들은 계속 오페라에서 젠더를 수행한다. 워커라고 해서 배우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언급되기도 하고. 일종의 드랙으로서 젠더가 계속해서 존재하긴 하는 거다.
오온: 나 역시 모호한 결말이 소설의 의미를 극대화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듀나가 시대의 요구에 발맞추어 최대한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면, 똑같은 강간살인 사건을 브리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해랑 5와 같은 사회에 배치했을 거다. 젠더 이분법이 유효한 세계와 젠더 이분법이 유효하지 않은 세계를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도덕적으로 ‘올바른’ 결말을 유도했을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뻔한 데다 소설로서 재미가 없지 않나. 따라서 듀나는 아직 과도기에 있는 해랑 4를 무대로 이 사건을 배치함으로써, 구인류와 신인류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여러 각도와 층위에서 조명한다. 주영이 짚어준 것처럼 결말에서 과거를 대하는 듀나의 이중적인 태도가 드러나는데, 여태껏 태오의 마초적 남성성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낡은 인간성 관념을 단호히 부정하는 것 같다가도, 다예의 멜로드라마틱한 감상주의를 담담하게 긍정하면서 바로 그 낡은 인간성이 갖는 여전한 아름다움을 감싸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중성이 듀나의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2.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피해자성 너머의 여성 정체성
유진: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으로 넘어가보자. 마지막에 뒤통수를 때리는 것이, 「바쁜 꿀벌들의 나라」만큼이나 강렬한 독서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찢어진 종잇조각’이 피식민 경험에 대한 절묘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식민화라는 게 단순히 외부가 내부를 침입해 가해자가 피해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과정이라기보다, 외부와 내부, 지배와 피지배가 뒤섞이면서 혼종적인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이지 않나. 그러한 피식민 경험의 복잡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특히 닛-이실인은 본디 지구인 남성들의 성욕을 배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지 않았나. 이렇게 착취적 연원을 가진 이들이 피해자로서, 또 새로운 주체로서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양가적이고 모순적일 수 밖에 없는지를 잘 보여주는 텍스트인 것 같다.
가은: 유진이 말했듯 닛-이실인의 존재 자체가 지구인 남자들의 성 착취에서 비롯한 것이다. 닛-이실 행성에서 지구인 남자들을 몰아낸지 오래인데도, 심지어 이웃 행성의 외계인들에게는 강간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위”(112)임에도, 닛-이실인들에게 고화의 강간이 중요한 사건이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간 닛-이실들은 과거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행성에 절대 지구인 남성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기와, 순수한 종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며 공동체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강간–이 마침내 일어나고야 말았을 때, 닛-이실인들의 반응이 묘사되는 방식이 섬뜩할 정도로 흥미로웠다. 강간범의 처형권을 찢어진 종잇조각 교회가 획득하자, 어떤 이들은 교회가 고화를 어떻게 처형할 것인지 궁금해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지구인 남자 강간범을 마주하는 스스로의 반응에 호기심을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이 날을 기다려왔다는 듯한 설렘까지 전해지는, 상당히 소름 끼치는 묘사였다. 같은 맥락에서 지구인 남자들이 성 착취를 위해 만들었던 노예들이 바로 그 재생산 기술을 이용해 해방 전쟁 세대를 탄생시켰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중층적인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
오온: 듀나가 『구부전』(알마 2019)에 실은 에세이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들에 관하여」에서 1990년대 잡지에 연재하다 중단된 SF 장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 설정이 바로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속 세계를 구성하는 단초가 된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버전은 성적으로 착취당해온 토착 생명체가 지구인 여자를 선봉으로 삼아 피지배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꽤나 고전적인 형태의 페미니스트 디스토피아 혁명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물론 완결되지 않았으니 속단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2021년에 다시 쓰이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되었다는 게 정말 흥미롭지 않나. 듀나는 에세이의 해당 부분에서 “지금의 내가 아이러니를 섞지 않고 진지한 어조로 완성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306)라고 코멘트하는데, 바로 그 아이러니가 ‘찢어진 종잇조각’이라는 은유가 된 거다. 1990년대와 2010년대의 페미니스트 문화운동이라는 맥락과 함께 볼 때 훨씬 더 흥미로워지는 텍스트가 아닌가 한다.
유진: 『낯익은 괴물들』에 실린 작품들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성 착취와 식민화를 다룬 소설 중 가장 세련된 작품이 아닌가 한다. 요즈음 나오는 SF 소설, 웹툰, 영화, 드라마 등을 보면 아직까지도 남성중심적인 성욕 해소를 위해 외부 식민지를 개발하거나, 섹스 로봇을 만들어내는 등의 스토리를 가진 작품이 많다. 성적 지배와 착취에 대한 20세기적인 아이디어들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는 와중에, 듀나는 성 착취와 그로 인한 피해자 정체성이라는 키워드를 굉장히 복합적으로 다루어낸다. 그런 동시대적인 격차, 시차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하영: 나 역시도 이 작품이 N번방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전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후에 성 착취를 테마로 쓰인 소설이라는 점이 특히 흥미로웠다. 당시는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가 쏟아지는 시점이었고, 피해자들이 얼마나 완전무결했는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오고가지 않았나. 그런데 듀나는 완전무결한 피해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닛-이실인들이 이룩한 독특한 문화를 공들여 묘사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세련되게 표현한다. 여기에서 나는 피해자성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듀나의 급진적인 시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오온: 요즘 장르를 불문하고 젠더 폭력을 비판하는 소설이 쏟아져 나오지 않나. 그런데 듀나는 성 착취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독자들의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 역시 결말부가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야기 내내 독자가 서술자 노의에게 자연스럽게 이입할 수밖에 없도록 강간범 고화를 한껏 비웃다가, 마지막에 노의가 찢어진 종잇조각 교회의 첫 지구인 신도이자 희생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건조하게 제시함으로써 서술자의 시점과 독자의 시점을 극적으로 분리시킨다. 노의가 닛-이실인들에 대해 이야기한 모든 메시지가 서술자인 노의 자신, 곧이어 독자인 나를 향하게 되면서 “이중의 소격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2] 듀나의 여성 주인공들은 사회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인식적으로는 언제나 우월한 위치를 점한다. 이러한 듀나 특유의 합리적인 여성 주인공이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뒤집히는 게 워낙 예외적인지라, 결말의 반전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완전무결한 여성성/피해자성은 허상에 불과하며 그에 대한 종교적 믿음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굉장히 단순하고 어찌 보면 진부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면서도, 강간은 추악한 범죄라는 다소 의도된 메시지를 부정하거나 유보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가해자에게 죄를 물으면서도, 완전무결한 피해자성에 대한 희구라는 동시대 페미니즘의 가장 첨예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거다. 어떻게 이 모든 걸 단편 하나에 담을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2] 강은교(2022). “페미니스트 세계만들기(worlding)로서 듀나의 SF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61쪽.
주영: 동의한다. 내가 여기에 따로 덧붙일 코멘트가 없는 이유는, 작품이 그 자체로 완결적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개연성과 메시지의 설득력이라는 모든 차원에서 완벽하다. 이미 듀나가 소설 속에서 다 이야기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할 수 있지? 싶다.
가은: 동시대의 ‘문제’를 이야기로 가져와달라는 것이 편집자의 의도이자 독자의 요구였을 텐데, 이러한 압박 속에서 소설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닌가 한다. 오온이 이야기한대로 듀나는 지구인 남자의 강간이 허접하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범죄라는 걸 보여주면서도, 어쨌든 닛-이실인들과 잇니케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피억압자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반성적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피해자들에게 순수성을 강요하지 말라’와 같은 구호를 그대로 읊는 소설이 아닌 거다. 특히 닛-이실인들의 구호가 왜 결국 종교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단순한 성 노예에서 자의식을 가진 지성체로 진화한 후세대의 닛-이실인들은, 상상되고 학습되어 반복적으로 주입된 성 착취의 경험을 바탕으로 닛-이실인의 이데아를 만들어냈다. 두 세기에 걸친 피지배의 역사는 잇니케들의 노래 가사가 보여주듯 아름다운 미래를 희구하는 숭고한 예술의 원료가 되었지만, 이는 내셔널리즘이나 종교적 배타성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리 멀지 않기도 하다. 소위 ‘여성서사’라 일컬어지는 근래의 텍스트들이 작품 속 여성 인물에 지나치게 동일시하는 바람에 쉽게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듀나는 여전히 동시대의 흐름에 쉽게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동시대를 그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추는 작가인 것 같다.
유진: 닛-이실인들과 잇니케들의 집단 행동을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거대한 운동의 흐름을 목도하고 있는 듯한 압도감을 느꼈다. 우리도 현실 속에서 여러 사건과 집회를 겪으며 느꼈던 것이지만, 특정 사건을 계기로 군집한 여성들이 새로운 언어와 액티비즘을 만들어낼 때, 그 흐름은 다른 누군가가 쉽게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지 않나. 우리 역시 그 흐름에 함께하고 있기에, 아무리 거리를 두려 해도 계속해서 휘말리고 만다. 그 속에서 느꼈던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 그러나 동시에 군중에 휩쓸리면서 엄습하는 무력감과 같은 감정들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도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이 동시대적인 텍스트가 아닐까 한다.
오온: 무엇보다 듀나가 찢어진 종잇조각 교회와 잇니케들–짐짓 좁게 해석하자면 동시대 페미니즘 운동과 페미니스트들–을 타자화하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데 성공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듀나는 닛-이실인들이 왜 그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비판하되 결코 타자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여성서사’에 필요한 윤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한다. 그렇게 할 때 동시대성을 획득하면서도 이야기로서 긴 수명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여태껏 듀나의 소설은 ‘여성서사’ 또는 ‘페미니즘 SF’로서 적극적으로 독해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듀나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젠더가 조형되고 배치되는 방식은 SF적 세계가 구축된 방식과 긴밀하게 조응하면서 듀나의 페미니스트 시각을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는 듀나의 소설을 다층적인 해석과 개입을 요하는 텍스트로 만들어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번 모임에서 함께 읽은 두 단편 「바쁜 꿀벌들의 나라」와 「찢어진 종잇조각의 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듀나는 특정한 장르 소재가 담지하는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가치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당 소재의 잠재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현실 세계의 면면들을 포착하여 함께 엮어냅니다. 이를 통해 당대의 독자들과 접속하면서도 이야기로서의 보편적인 재미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1990년대에 이어 2010년대 이후 듀나의 페미니스트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함께 읽어보았습니다. 저희는 한동안 듀나의 SF를 계속해서 함께 읽고자 합니다. 더불어, 대담이라는 형식을 넘어 저희가 나눈 이야기를 책이나 종이 잡지의 형태로 구체화할 방안도 고민 중에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대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리 : 오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