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는 관계를 맺고 싶어: 자캐커뮤를 중심으로

⁉️리예

1. 커뮤러는 무엇을 덕질하는가?

몇 년 전 질적연구방법론 실습으로 자캐커뮤 활동 경험자, 커뮤러들을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나의 인터뷰 자료를 보고 담당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열심히 활동한 결과물을, 출간하기도 하나요’라고 물었다. 나 역시 자캐커뮤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아뇨’라고 약간 질겁하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왜 그렇냐 물었을 때, 나는 ‘나왔다, 머글(서브컬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부르는 은어)의 잔인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시 궁금해지게 된 것이었다. 왜 우리는 자캐커뮤를 그렇게나 열심히 하는 걸까. 자캐커뮤를 달리는(머글을 위해 풀어쓰자면, 자캐커뮤에서 캐릭터를 활용해 활동하는) 일, 그리고 자캐를 덕질하는 일은 그야말로 순수한 욕망의 산물이다. 열정적으로 쓰고 그린 결과물은 출간물이나 금전적 재화 그 무엇으로도 변환되지 않는다. 그 욕망은 무엇이기에 커뮤러로 하여금 자캐 자캐커뮤를 계속 달리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알기 위해 설문조사, 심층 인터뷰, 참여관찰 등의 방법을 활용해 자캐커뮤를 탐색했다.

자캐커뮤[1]란 자작 캐릭터 커뮤니티의 줄임말로, 사람들이 각자의 자캐(자작 캐릭터의 줄임말)를 미리 마련한 시나리오에 참가시켜 일정 기간 그들 간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온라인상의 놀이공간을 말하며, 그러한 놀이 및 놀이공동체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 공간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커뮤러라고 부르며, 크게 운영자(또는 총괄이라 불린다)와 참가자(멤버 또는 러너로 불린다)로 분류할 수 있다.

[1] 이 공간은 전통적 공동체는 물론 ‘온라인 커뮤니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공동체’ 뿐만 아니라 그 놀이와 문화를 아울러 의미하는 특징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자캐 커뮤니티’가 아닌 ‘자캐커뮤’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하고자 한다.

이 놀이가 진행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운영자가 자캐커뮤라는 공간을 준비하면, 참가자들은 그곳에 걸맞은 캐릭터를 창작하고 이야기를 함께 진행해 나간다. 이때 자캐커뮤의 이야기가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주 활동 공간은 어디이며, 현재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요소의 집합을 ‘세계관’이라 한다(박소연・유미숙, 2019). 세계관에 따라 이 공간은 학교, 마을, 우주선, 왕국 등 어떤 곳이라도 될 수 있다. 자캐커뮤는 평화로운 나날만이 이어지는 ‘힐링물’의 공간일 수도, 좀비가 창궐하거나 재해가 일어난 ‘포스트아포칼립스물’의 공간일 수도, 농담과 유머로 가득한 ‘개그물’의 공간이거나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나가는 ‘탐사물’의 공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캐릭터들이 나이를 먹는 ‘성장물’의 공간일 수도 있다. 참가자는 이 세계관에 부합하는 캐릭터를 창작하여 자캐커뮤 참여를 신청한다. 특정한 성별, 나이, 직업, 종족, 특별한 능력이나 비밀을 지닌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이 공간에서 협력하거나 대립하며, 그 가운데 전체적인 이야기에 기여하며 서로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

자캐커뮤를 가장 단순히 이해하는 방식은 참여자들이 ‘가상의 캐릭터를 만들어 온라인 세계에서 해당 캐릭터로 살아간다’는 비유에 기대는 것이다(기사 보기). 청소년들의 자캐커뮤 활동 경험을 살펴본 선행연구들 역시 자캐를 연구참여자 ‘자신의 (이상적인) 대리자’로 전제하고, 그 활동 경험을 그들의 자아실현과 연관 지어 의미화했다. 이런 틀 속에서 연구참여자들이 자캐를 만드는 목적은 “나만의 관계 친밀도를 높이고, 더 폭넓고 강한 인기와 인정을 누리기 위해서”로 이해되며, 자캐로 활동하며 얻는 것은 “가족이나 또래 관계에서 얻지 못했던 즐거움이라는 긍정적인 감정과 더불어, 지지와 이해받음의 경험”(손유경, 2021: 77)으로 정리되었다. 이처럼 자캐가 가지는 의미가 연구참여자 개인과 가지는 관계 속에서만 주로 규명될 때, 자캐커뮤라는 공간이 지니는 함의 역시 개인적인 세계,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자기만의 판타지가 온전히 인정받고 구현화된 가상세계”(위의 글: 127)에 그치게 되어 그 내부에서 생성되는 타인들, 그리고 타 캐릭터들 간의 역동적 관계를 살펴보기 어렵게 된다.

자캐는 과연 참여자 자아의 연속선상에 있는 존재인가? 자캐는 참여자 자신의 이상적인 대리자이고, 자캐커뮤 활동은 ‘자캐로서 살아가는’ 일인가? 나는 재작년부터 작년까지 총 12명의 커뮤러를 인터뷰하며 연구참여자와 자캐가 가지는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참여자들은 자캐는 자기 창작물이므로 자기 모습이 어느 정도 반영될 수도 있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라고 응답하곤 했다.[2] 이때 보고 싶은 것에는 이상적인 자아상뿐 아니라, 기성 창작물에서는 잘 찾을 수 없는 나만의 취향, 다른 캐릭터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생성되는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볼’ 수 있도록 참여자들은 캐릭터를 만들 때, 다른 캐릭터들의 개입과 교류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예컨대, 한 참여자는 개성적인 외형 특징을 만들면서도 그 특징에 얽힌 사연은 일부러 만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캐릭터들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여백을 남겨둔다는 것이다.

[2] 연구참여자들이 자캐와의 관계에 있어 사용하는 동사는 ‘굴리다’였는데, 이때 ‘굴리다’는 ‘자동차 등을 몰다.’ 내지는 0‘하급자를 고생시킨다’는 의미이다. 이런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커뮤러는 자캐를 손쉽게 자기 자신, 분신(‘아바타’ 개념으로 대표되는), 또는 ‘페르소나’로 연결 짓는다기보다 자신이 다루는 객체, 또는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여긴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응답은 선행연구에서 파악된 자캐의 의미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커뮤러들은 캐릭터를 만들 때부터 “현실의 나”라는 존재와의 관계뿐 아니라, 커뮤 참가자와 자캐, 자캐와 자캐, 그리고 참가자와 참가자 관계를 고려해 만들고 있다. 이 다층적인 ‘관계성’이 곧 자캐커뮤 경험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 덕질의 대상이 된다.[3] 한 인터뷰 참여자는 자신의 자캐 덕질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3] 커뮤러들을 부르는 다른 이름으로는 ‘자캐덕’, ‘1차덕’이라는 표현이 있다. ‘덕’이 오타쿠를 뜻한다고 볼 때, 커뮤러들은 자캐라는 오리지널 창작물(1차 창작물)을 ‘덕질’하는 이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B씨: 마치 저는 2차 장르를 잡듯이 캐릭터를 덕질하는 편이에요. 이런 캐릭터가 있고, 이런 캐릭터랑 같이 교류를 하게 되면 나오는 그 시너지를 덕질한다고 하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한 것 같아요.

25세 여성, 커뮤 경험 10년 차

커뮤러들의 덕질 방법론이 캐릭터와, 캐릭터 간의 ‘시너지’, 즉, 관계를 만들고 감상하기라면, 그것은 덕질의 일반적인 특성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소비할 대중매체가 없어도 어떤 이야기를 함께 좋아할 수 있다는 점, 패러디할 원본 대상이 없어도 함께 창작할 수 있다는 점은 덕질이라는 행위를 새로이 생각해보게 한다. 덕질의 욕망은 과연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무엇과 관계하고 있는가? 또 그 욕망은 어떻게 통제되는가? 이 글에서는 자캐커뮤의 사례를 들어, 덕질의 특징을 ‘관계성’이라는 키워드로 재검토해보고자 한다.

2. 어떻게 관계성을 덕질하는가?

그렇다면 커뮤러들은 자캐커뮤에서 어떤 형태의 관계들을 추구하게 되며, 그를 성취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 지난 9월 나는 커뮤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트위터를 통해 온라인 설문을 배포하였는데, 트위터는 자캐커뮤가 활발히 만들어지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설문을 통해 커뮤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칙과 그 이유를 수집하였고, 그렇게 모인 총 124개의 주관식 응답을 분석한 결과, ‘편파 금지’가 자캐커뮤에 있어 중요한 규칙 중 하나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편파’란 커뮤 참가자와 그 캐릭터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일을 말한다. 커뮤에서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하고, 캐릭터끼리 서로 교류하고, 이야기를 지으며 놀 수 있는데, 보통 그림이 글보다 더 관심을 많이 받게 된다. 같은 그림 사이에서도 더 잘 그린 그림이 관심을 더 많이 받는다. 이런 관심의 불균형한 분배는 캐릭터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예컨대 여자 캐릭터보다 남자 캐릭터가 더 많이 창작된다는 것, 남자 캐릭터는 더 수월하게 합격하고, 커뮤 내에서 더 인기가 많아 교류도 활발히 일어나고, 좋아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 등이 그렇다. 이런 식으로 참가자들의 표현 수단과 실력 수준, 캐릭터의 생김새, 성격, 성별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두가 균등하게 관심을 주고받아야 함을 명문화한 규칙이 곧 ‘편파 금지’이다.

‘지인플 금지’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만들어진 규칙인데, 이는 아는 사람끼리 노는 일을 말한다. 자캐커뮤에서 참가자들은 서로가 누구인지 알려선 안 되고, 종류에 따라서는 참가자 신분으로 발언해서도 안 된다. 자신이 어느 자캐커뮤에서 활동하려 하는지, 또 현재 어느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등을 커뮤 외부인들에게 언급해서도 안 된다. ‘지인플’이 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설령 우연히 아는 사람의 캐릭터를 마주치게 되더라도, 참여자들은 서로 아는 척해선 안 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 등에 대해 운영자가 없는 곳에서 따로 상의해서도 안 된다. 즉, 자캐커뮤가 운영되고 있는 동안 참가자들은, 숨길 것 없는 초대면의 캐릭터로서만 친목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규칙이 필요한 이유는 자캐커뮤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재미 요소와 관련이 있다. 자캐커뮤가 여타 롤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장르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중 하나는 놀이의 최우선 목적이 ‘승리’보다도 ‘이야기 만들기’에 있다는 점이다. 세계나 이야기를 만드는 월드빌딩 게임(Worldbuilding Game) 및 스토리텔링 게임(Storytelling Game)과도 차이점이 있는데, 이들 게임이 무작위적인 시공간과 플롯을 협업하여 즉흥적으로 만들고 발전시키는 데서 재미를 준다면, 자캐커뮤는 배경과 사건보다도 캐릭터를 함께 변화, 성장시키는 데서 재미를 찾기 때문이다. 즉, 자캐커뮤는 ‘캐릭터 간의 이야기 만들기’, 커뮤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캐릭터 간의 관계를 짜고 서사를 쌓는 일’을 즐기는 놀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캐릭터 간에 짜일 수 있는 관계는 무궁무진하다. 친구, 동료, 선후배, 가족, 친척, 라이벌, 원수, 주종, 애인 등등. 캐릭터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더욱 입체적으로 되기에, 이야기를 만드는 재미가 배가 된다. 이런 재미를 얻기 위해서는 캐릭터 간의 상호교류가 충분한 빈도로, 그리고 다양한 양태를 가지고 일어나야 한다. 자캐커뮤라는 놀이의 매력에 관해 묻는 문항에 15세 논바이너리라고 자신을 밝힌 설문 참여자는 “도박성, 불확실성(완전히 모르는 사람들과 완전히 모르는 이야기 만들기)”이라고 응답하였는데, ‘도박’, ‘불확실’, ‘비합의’,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우연한’ 등의 표현은 다른 응답자들과 인터뷰 참여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M씨: 소설을 보면 얘랑 얘 관계가 되게 좋다 이렇게 느끼는 관계가 있잖아요. 나도, 그런 관계가 내 캐릭터와 다른 사람 캐릭터 사이에 생길 때. 그럴 때 약간 아 이거 재밌다, 라고 느끼는 거죠. 내가 짜지 않았어. 그 사람 캐릭터와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짜지 않았는데. 커뮤니티에서 얘기를 해보니까 그러니까 캐입을 해서 얘기를 하잖아. 얘기를 하다보니까 우리 이런 점이 비슷하고 이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관계가 내 맘에 들면 이제 재미가 있는 거죠.

연구자: 우연적인… 화학적인…

M씨: 우연적일수록 재밌어. 우연이 아니게 짜기도 하지만.

26세 여성, 커뮤 경력 10년 차

B씨: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자극 같은 것도 있고요. 예를 들면 내가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 없었던. 허점이나 설정이… 음. 설정에서 나올 수 있는 또 다른 설정 같은 것들? 그것들을 상대방이 캐내서 가져와 줄 수 있는 거죠. 그러면은 약간, 새롭다 라는 자극이 생겨나는 거죠. 너무 많으면 너무 많은 자극이 되는 거고, 딱 적절한 자극이라고 생각해요. 외롭지 않고.

25세 여성, 커뮤 경험 10년 차

인터뷰 참여자 M은 자캐커뮤에서 타인의 캐릭터와 나의 캐릭터 사이에 공통점 등이 발견되고, 그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관계성이 만들어질 때 재미를 느낀다고 응답했다. B는 혼자서 캐릭터나 이야기를 만들 때의 이점도 있지만, 외로운 것이 문제라고 응답했다. 자캐커뮤는 이때 그 캐릭터와 이야기를 알아주는 사람,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나게 해준다. 타인의 캐릭터는 ‘내가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낼 수 없었던 (내 캐릭터의) 허점이나 설정’을 캐내어 준다. 여기서 적당히 자극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의 상상력 바깥에 있던, 타인의 캐릭터와 예상치 못한 조우에서 만들어지는 관계성, 상호작용, 갈등과 애정이 곧 자캐커뮤가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며, 혼자서 캐릭터나 이야기를 창작할 때는 얻을 수 없는 자극적인 즐거움의 정체이다.

3. 관계 맺을 기회를 공평히 분배하기

관계성을 얻기 위해 커뮤러들은 여러 자원을 활용한다. 사교적이고 친절한 성격을 가진 캐릭터, 매력적이거나 독특한 외형을 가진 캐릭터를 만드는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문제는 모두가 공평한 양과 질의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특히 개개인의 (글과 그림 등을 창작하는) 능력과 그 숙련도, 인맥 등이 그렇다. 자캐커뮤에서 참가자의 신원과 이점이 되는 자원은 모두 내려놓고, 일종의 ‘원초적 입장’이 되어 초대면의 캐릭터로서만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관계성을 만들 기회가 모두에게 공평히 돌아가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캐릭터의 이야기를 너무 불행하고 드라마틱하게, 또는 능력을 너무 뛰어나게 만들면 안 된다는 규칙이나, 세계관과 분위기에 어울리게 만들어야 한다(예를 들어, ‘힐링물’에서 잔인무도한 캐릭터는 좋지 않다)는 규칙 역시 같은 맥락을 띠고 있다. 불행한 캐릭터에겐 이미 혼자만의 이야기가 가득 준비되어 있어 다른 캐릭터들과 교류할 필요가 없다. 뛰어난 캐릭터는 어떤 사건에서나 튀게 되어 다른 캐릭터들과 협력하기 어려울뿐더러, 다른 캐릭터들이 활약하기도 어려워진다. 모두가 원만히 어울릴 수 있도록, 참가자들과 마찬가지로 캐릭터들도 관계성 접근에 있어 공평한 위치에 놓여야 한다.

이러한 규칙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앤캐 금지’ 규칙이다. ‘앤캐’는 애인 캐릭터를 뜻하는데, 캐릭터들이 연인 사이가 되면 그들은 서로의 앤캐가 되는 것이다. 앤캐는 무엇보다도 그 돈독하고 애정 어린 관계성으로 인해 캐릭터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고, 즐거움을 연장한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은 관계성이다.

과거 자캐커뮤 진행 중 애인 관계가 성사되는 것은 자캐커뮤 차원에서 축하할 경사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금기로 여겨지고 있다. 애인 관계에 있는 캐릭터들이 다른 캐릭터들보다 돋보이게 되고, 이러한 관계를 얻기 위해 마음에 드는 캐릭터와만 교류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앤캐 금지 규칙은 독점적인 관계를 선취하고자 남들을 소외시키는 일을 규제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 규칙을 통해 관계 접근성을 공평히 분배하고자 하는 당위성이 강화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설문 참여자들은 편파를 금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소외감’을 꼽았다. “다 같이 놀자고 하는 건데”(31세 여성), “외로워요”(23세 여성), “모두 다 같이 뛰는 러너인데 단체활동 중 소외감”(28세 여성)이 든다는 것이다. 교류에 적합한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 애인 캐릭터를 모색하면 안 되는 이유에서도 비슷한 응답이 이어졌다. “다 같이 어울리려는 생각보단 날 지독하게 사랑할 사람 하나 찾으러 온 느낌은 좀 별로”(22세 여성)이고, “캐릭터끼리 교류해야 하는데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곤란”(20세 여성)하며, “두루두루 놀아야 할 것 아니냐”(26세 여성)는 것이다. ‘로맨스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응답한 25세 여성은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전략) 로맨스적인 분위기를 형성하는 페어 대부분은 자신들만의 서사에 집중하느라 다른 친구들과는 제대로 교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니 절대적일 수는 없겠습니다만) 물론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겁니다. 현실에서도 애인이 생기고 나면, 가족이나 친구는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자캐 커뮤니티는 모두와 교류를 하며 놀기로 약속을 한 놀이공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모두가 함께 놀 수 있는’ 놀이공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도 반 친구들과 놀기 위해 놀이공원에서 모였는데, 친구 둘이 뽀뽀를 하고 있으면 머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이유입니다.

관계성 배분을 위한 규칙 속에 자캐커뮤는 “모두와 교류를 하며 놀기로 약속을 한 놀이공간”으로 정의된다. 이곳은 로맨스로 대표되는 독점적인 애인 관계를 지양하고, 분위기에 맞추어 친구들과 교류해야 하는 곳이다. 친밀한 정도에 따라 위계가 생기는 것은 현실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자캐커뮤라는 대안적 놀이공간에서는 그 위험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4. 평등한 우리들의 각별한 덕질대상

자캐커뮤에서 발견되는 규칙은 근래 온라인 공간을 기반으로 하는 팬덤의 규칙과 공명한다. 최승연(2021)은 뮤지컬 팬덤의 변천을 검토하며, 과거 PC통신 동호회에서는 소수의 개인이 위계적으로 정보를 생성하고 공유했다면, 근래 뮤지컬 마니아들이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인 ‘연뮤갤’에서는 이러한 위계적인 관계가 거부됨을 지적한다. 이들은 익명의 구경꾼들로만 서로와 관계를 맺고, “철저히 취향과 정서의 공동체로 결집하며 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활동한다는 원칙”(최승연, 2021: 204)을 갖고 있는데, 이 규율의 질서를 벗어나는 사람에게는 비판을 가하면서 “관계의 평평함”(같은 곳)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자신이 ‘뮤덕(뮤지컬 오타쿠)’이 아니었던 ‘머글’ 시절에 대한 회상, 대동한 뮤지컬 초보자들의 감상 등을 옮겨 적으며, “뮤덕과 머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뮤덕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팬들을 끊임없이 구별 짓고 개념화하면서 결집하는 행위를 지속”(198)한다. 뮤지컬 오타쿠라는 정체성은 ‘뮤지컬을 관람하는 행위’ 자체보다도, “매일의 관람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쌓아가는 집단의 활동”(203)으로 비로소 ‘인증’된다.

아이돌 팬덤 내 구성원들은 어떨까? 김수아(2020)에 따르면, 아이돌 팬덤은 구매력이 없는 ‘얕덕(얕은 오타쿠)’을 배제하고, 같은 가치를 ‘구매’하지 않는 팬들을 외부로 몰아내는 경계 감찰을 수행하고 있다. 집단에서 배제되는 것은 구매력이 모자란 존재들인데, 이때 팬덤이 구매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돌 그룹이 팬과 같은 생각[아이돌로서의 성공, 비연애 상태의 유지 의무 등]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즉, 팬덤이 소비하는 것은 “재화 자체가 아니라 팬덤-아이돌 스타 간의 공동체성”(김수아, 2020: 27)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덕질을 한다는 것, 오타쿠가 된다는 것은, 홀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관람하고 시청하는 것 자체, 열정적으로 재화를 지불해 무언가를 소비하는 것 자체, 어떤 대상에 헌신과 사랑을 불태우는 것 자체보다도, ‘얕덕’과 ‘머글’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 짓고 결집하는 일로써 이루어진다. 덕질의 대상 앞에 평등한 오타쿠들이 된 이후에는 그 대상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 덕질대상은 우리들의 취향, 신념, 가치관과 공명하기에 사랑스러운 존재이며, 그 취향과 믿음에 어긋나는 경우, 즉 우리들을 ‘기만’하는 경우, 덕질대상의 지위로부터 추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오타쿠들이 열광하는 것은 자신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구성된 덕질대상이다. 이문희(2017)는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것으로부터 특정한 속성을 추출하여 더욱 허구적인 것으로, 그리하여 사랑할 만한 것, 자기들만의 것으로 전유하는 특성을 ‘모에화化’라는 용어를 활용해 설명한 바 있다. ‘모에’란 캐릭터의 성격이나 외형 등의 요소가 저마다의 개인적인 취향에 부합할 때 불타오르는 마음을 뜻한다. ‘모에하다’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대상이 오타쿠들에 의해서 캐릭터화 되어야 한다. (藤環, 2008; 이문희, 2017 재인용) ‘오타쿠’는 무엇보다도 자신과 대상 간에 형성되는 관계성, 즉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과 대상 간의 위치 및 관계를 재배치하는 데 중점을 둔다. ‘모에’화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오타쿠들에게 있어 사랑할 대상이 될 수 있다.[4]

[4] 무엇이든 ‘나만의 것’으로 재맥락화할 수 있는 그 범용성으로 인해 ‘덕질’은 명칭을 넘어 하나의 방법론이 된다. 오늘날 ‘덕질’의 대상으로 ‘서브컬처’에 속하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뿐 아니라 ‘주류문화’의 스타, 공예와 취미 활동, 심지어는 자신의 결벽이나 신변잡기, 반려동물까지 그야말로 삼라만상이 소환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덕질’의 방법론 아래 대중매체의 스타, 픽션의 캐릭터, 그리고 가족까지도, 실존하거나 하지 않는 모든 것은 나만의 최애로 재구성·재배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돌이나 뮤지컬 작품, 자캐커뮤의 캐릭터 들은 오타쿠 구성원들이 축적한 취향의 데이터를 활용해 덕질의 대상으로 (재)구성된다. 그 취향은 구성원들과의 관계성을 내포한다. 덕질대상은 평등한 우리들의 각별한 대상이기에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이자 열광할 만한 것이 된다. 오타쿠의 덕질이 추구하는 이러한 관계 지향성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자캐커뮤라 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 커뮤러들이 열광하는 것은 ‘캐릭터 되기’나 ‘롤플레잉’ 같다. 그러나 우리가 덕질을 관계성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읽을 때, 커뮤러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관계의 (재)구성’임을 읽을 수 있다. 자캐커뮤는 “무작위로 만나는 남의 캐릭터가 내 캐릭터와 엄청난 서사를 만들어서” 매력적이라는 응답(22세 여성)이 명징하게 요약했듯, 자캐커뮤의 재미는 예상치 못한 관계의 성립으로부터 온다. 커뮤러가 ‘자캐덕’이라면, 덕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캐, 그리고 그가 맺은 관계들이다.[5] 관계는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주고, 서로의 이야기가 되어준다. 캐릭터 간 관계는 참여자들의 관계도 새롭게 만든다. 자캐커뮤의 전체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캐릭터 간 관계가 남아 있다면 그 캐릭터는 계속해서 생동할 수 있다. 참여자들은 새로운 세계관이나 관계 캐릭터들을 이식하고 시뮬레이팅해보며, 자신들의 놀이 관계를 지속한다. 참여자들은 저마다의 취향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캐릭터 간 관계를 계속 새로이 생성하고, 캐릭터 간 관계로 인해 참여자들도 서로의 이야기 제공자이자 청자라는 관계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5] 커뮤의 매력을 묻는 주관식 문항에 30대 응답자들은 ‘공동창작’적 요소(다양한 사람들과 스토리를 만들어 나간다., 창작의 부담이 덜하다)를 답하곤 했으나, 10대 응답자는 ‘캐릭터 간 상호작용’을 더 많이 답했다. 이런 점을 볼 때 관계성은 자캐커뮤의 재미에 있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듯하다.

정리하자면, 자캐는 다양한 관계를 고려하며 만들어져 관계 속에서 입체적으로 완성되어가는 존재이고, 자캐커뮤는 그러한 관계들이 공평히 실험될 수 있는 공간이다. 자캐커뮤란 나의 이상적인 자아를 실현하는 진공이라기보다, 혼자서는 생각해낼 수 없는, 돌발적이고 우연한, ‘쩌서깊관(쩌는[근사한] 서사 깊은 관계의 줄임말)’을 만날지도 모르는 ‘도박성’의 공간이며, 그 각별한 관계성을 만들 기회가 참여자 전원에게 공평히 분배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러기 위해서 참여자들은 덕질대상 앞에 평등해야 한다. 참여자들끼리도 개별적인 관계를 맺어선 안 된다. 그때서야 덕질 대상인 캐릭터들만의 관계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비단 자캐커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덕질의 방법론이 적용되는 영역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다. 예컨대, ‘팬들은 새우젓’과 같은 수사는 팬 집단을 젓갈 속 자그마한 새우 떼에 빗대며 구성원 간의 개별적인 특성과 관계성을 소거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런데 덕질대상에게 있어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아이디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는, 도무지 소거되지 않는 사랑, 이 뻐렁치는 팬심, 재구성된 우리만의 각별한 관계성을 부상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다루지 못했으나, 이처럼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덕질하는 것은 젠더화된 행위 양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부기한다. 김환희(2016)는 2~30대 여성의 애니메이션 팬 활동을 분석하여, 연구참여자들이 캐릭터(덕질대상)는 물론 팬덤 구성원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며 팬 활동을 실천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연구참여자들은 덕질로써 욕망을 실천할 때, 몰입감에 방해가 되거나 윤리적 딜레마를 유발하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자캐커뮤, 뮤지컬 팬덤, 아이돌 팬덤 등 이 글에서 다뤄진 덕질의 공간들에선 모두 ‘여자 오타쿠’라는 상태가 ‘평등한 관계’를 ‘페미니즘적’으로 수정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편파’를 줄이고, 자캐커뮤의 성비를 맞추는 것, 성 감수성이 낮은 작품을 거부하는 것, 여자 아이돌을 소비하거나 불매하는 것은 덕질대상과의 관계를 ‘페미니스트 여자 오타쿠’로서의 나와 유지하거나 단절하기 위한 덕들의 행동 방침이었다. 여자 오타쿠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평등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지향하는지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할 것이다.


참고 문헌

  • 김수아(2020). “소비자–팬덤과 팬덤의 문화 정치”, 『여성문학연구』, 제50호, 10–48쪽.
  • 김환희(2016). “애니메이션 팬 활동으로 재 정의되는 여성의 ‘관계’와 의미: 20·30대 여성의 일상생활과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미디어, 젠더 & 문화』, 제31권 3호, 139–172쪽. 
  • 박소연・유미숙(2019). “자캐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청소년의 경험 연구”, 『한국청소년활동연구』, 제5권 1호, 81–114쪽.
  • 손유경(2021). “여자 청소년의 ‘자작 캐릭터(자캐) 커뮤니티’ 활동 경험”,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논문.
  • 이문희(2017). “오타쿠로서의 자기 인식과 정체성 형성 과정에 관한 연구: 한국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수용자들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 최승연(2021). “청년 테마로 본 뮤지컬: 팬덤의 참여욕망과 수행성에 대한 고찰–연뮤갤 팬의 활동을 중심으로”, 『한국극예술연구』, 제71호, 173–2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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