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내겐 20xx년 봄이다. 공기마저 달콤했다. 어느 아이돌을 따라다녔다. 몇 년 후, 그 아이돌이 성범죄에 휘말렸다. 그 사이 페미니스트가 되어 버린 나는 상처, 부끄러움, 분노와 배신감에 시달리며 플레이리스트에서 그 아이돌의 노래를 모두 지웠다.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절망감이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지웠던 노래들을 다시 듣는다. 물론 나는 여전히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반성폭력 시위를 나가면서 어떻게 탈덕을 안 할 수가 있나? 어디 가서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자기소개를 하면서 집에 가는 길에 그 아이돌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모순이고 기만이 아닌가? 옅어지고 형태도 달라졌지만 아직도 분명히 존재하는 좋아하는 마음은 상처와 부끄러움, 분노, 배신감과 어우러져 나에게 자아비판적인 얼룩을 남긴다.
이 글은 이러한 시달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쩌면 이 글은 너무 뻔하고 이미 모두 아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어느 날 오빠가 범죄자가 되”어 버린 팬들의 영화 〈성덕〉(2022)은 부산국제영화제 GV가 모두 매진이었고, 일반 상영관 개봉 이후에는 독립예술영화 관객 수 1위를 달성했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된 이후 온라인에서는 각종 스타의 여성혐오, 성차별, 성폭력 논란인 연일 터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소셜 미디어는 그것의 어떤 부분이 왜 문제가 있는지 설명하고 토론하는 글들로 가득 찼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른 요즘은 설명과 토론을 넘어, 논란에 휩싸인 무언가가 왜 ‘빻았는지’ 말하는 것 자체를 귀찮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탈덕만으로는 페미니스트이자 팬으로서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현재 팬이었던 페미니스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다. 탈덕을 거듭하며 ‘안 빻은’ 것을 찾아 나서거나, 아직도 좋아하지만 페미니스트들에게는 탈덕한 척하거나. 결국 탈덕은 해야 옳은 일이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갈아타 봤자 오빠는 계속 범죄를 저지른다. 우리는 범죄자가 된 구오빠를 뒤로한 채 다른 오빠로 갈아타고, 그 오빠는 인종차별을 해서 무해해 보이는 내새끼로 갈아타지만, 내새끼도 성차별적인 말을 해서 이번에는 언니로 갈아타는데, 언니도 결국 학교폭력 논란에 휩싸인다. 페미니스트가 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렇게 논란이 터질 때마다 덕질 대상을 손절하고 ‘안전해’ 보이는 다른 대상을 찾아 나서야 하는 삶인가?
사실 모두가 좋아하는 마음을 단칼에 잘라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탈덕’이 언제나 같은 마음과 행동을 뜻하지도 않는다. 오세연 감독은 ‘아직도 정준영을 응원하는 팬들은 왜 그러는 걸까?’ 하며 〈성덕〉을 시작하지만, 덕질 물품을 정리하려고 꺼냈다가 좋았던 순간을 회상하게 되고 진짜 ‘계를 탔던’ 물건은 버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직도 정준영을 응원하는 팬들에 관한 의문을 담았던 폴더를 휴지통에 버린다. 너도나도 같은 마음이라며 탈덕의 의지를 불태우더라도, 누군가는 바로 스타가 꼴도 보기 싫어질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런데도 볼 때마다 좋아했던 면이 눈에 밟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행복하게 덕질했던 자기의 모습을 그리워할 수도 있고, 스타가 저지른 범죄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스타의 무대를 응원하는 마음을 느낄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지워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분명히 이 현실에 존재한다. 페미니스트가 다른 페미니스트에게 취향을 변명하거나 탈덕한 척하는 것은 ‘탈덕을 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모두 사랑하거나’라는 이분법적인 규칙에서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타낸다.
얼룩진 덕질에 괴로워하는 이 페미니스트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잠시 덕질에서 빠져나와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의 ‘페미 판’을 들여다보자.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번아웃’되는 이유를 탐구한 논문(이정연, 2022)을 쓰며 페미니스트들이 대외적인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과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스스로에 대한 혼란스러움, 비일관적인 모습을 다른 페미니스트에게 들키면 단죄받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다 지쳐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흔히 강남역 이후의 페미니스트들은 ‘래디컬’과 ‘교차페미’로 나뉘어서 갈등한다고 여겨지지만, 내가 만난 연구 참여자 중에는 두 노선 중 무엇으로도 스스로를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히려 노선에 비일관적인 자기 모습이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이상하게 비칠까 봐 두려워하거나,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못하고 페미니즘을 지지/지향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페미니즘의 ‘정답’을 벗어나는 이야기는 언제든 인용 RT와 멘션, ‘박제’를 통해 ‘조리돌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노선에 비일관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쉽게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그 괴로움을 호소하기는커녕 ‘정답’에 해당하는 행동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내면의 괴로움은 각자의 마음속에서만 돌고 돌았다. 말했을 때 지지받고 응원 받는 이야기는 ‘빨간약’을 먹고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졌다는 이야기이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발화되지도 수용되지도 못한 괴로움은 해소되지 못한 채 ‘번아웃’으로 이어지거나, 개인적으로 병원을 찾는 과정을 통해서만 관리되고 치유되었다. 이러한 괴로움, 우울, 불안, ‘번아웃’은 개인들 각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둥둥 떠다니며 페미니즘 운동 전반에 침체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페미니스트라면서 어떻게 아직도 탈덕을 안 할 수가 있지?’ 내가 나에게 남겼던 이 비판은 페미니즘을 추구한다면 범죄를 저지른 스타를 사랑하는 마음은 더는 ‘정답’이 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물론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실천적인 사상이므로 스타의 행동이 옳지 않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행동이 사회적으로 수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논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과 바람이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까지 없애지는 않는다. 욕망을 페미니즘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개인에게 그러한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스타의 범죄를 비판하는 것과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동시에 느끼는 것은 ‘오답’이 아니다.
덕질은 팬들에게 삶과 정체성의 일부이다. 덕질하며 산다는 것은 단지 스타에게 조금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스타와의, 스타의 예술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팬들 각자의 세계와 서사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범죄자들[1]은 nn년 동안 내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 존재했다. 친한 친구들, 취향, 한때의 가치관, 좋아하는 장소, 넘치게 행복했던 순간들과 가장 우울할 때 위로받았던 기억들 속에 덕질은 시럽처럼 녹아들어 있다. 이런 정체성의 일부를 어느 날 갑자기 칼로 자르듯 깔끔하게 떼어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오답’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면 좋아하기를 멈출 수도 없고 스타의 범죄까지 사랑할 수도 없는 페미니스트 팬들은 ‘어덕행덕’과 탈덕 속에서 갈 곳을 잃고 만다. 그로 인한 괴로움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안에서 맴돌면서 점점 몸집을 키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탈덕 외에 페미니스트 팬들의 삶을 설명할 언어가 필요하다.
[1]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에서 따 왔다. 영화의 내용은 이 글과 전혀 관련이 없지만, 어쩌면 삶의 한 부분마다 사랑했던 누군가를 소환한다는 점에서 비슷할지도…?
페미니스트로 사는 것과 범죄자가 된 스타를 사랑하는 것이 ‘오답’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이돌 및 콘텐츠 산업 구조에서 기인한다. 스타의 행동을 비판하려면 탈덕부터 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현재 팬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무상노동과 소비뿐이어서다. 무상노동, 즉 ‘팬덤 노동’(lovebor)[2]은 사랑이자 노동, 또는 사랑의 노동이라는 뜻으로, 팬덤의 사랑이 무상노동의 형식을 띤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멜 스탠필(2019)이 고안한 개념이다. 스탠필은 가사노동이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이더라도 그 안에 착취적인 성격이 있고 따라서 노동이듯이, 덕질 역시 사랑하는 감정을 자유롭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수반되는 정동을 정돈된 형태로 전달해야 한다는 점에서 착취적인 성격을 띠며, 따라서 노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2] 팬덤의 행위가 사랑이자 노동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이 글에서는 ‘팬덤 노동’으로 번역해 쓰겠다.
팬덤 노동은 다음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팬들은 대상을 사랑하고, 또 그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노동한다. 아이돌 팬덤으로 예를 들면 콘서트장에서 떼창을 하거나, 유튜브에서 댓글을 다는 행위이다. 흔히 아이돌 콘서트장을 떠올리면 무대 위의 아티스트와 함께 열광적으로 야광봉을 흔드는 팬덤의 모습이 함께 상상되는데, 이러한 표준적 상상도는 팬덤의 노동, 즉 아티스트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특정한 모습으로 다 함께 표출하는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둘째, 팬들의 노동은 물질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이돌 팬들이 인형 등의 개별적인 굿즈를 제작하는 것이 한 예시이다. 마지막으로, 스탠필은 팬들이 긍정적인 반응만을 보이리라고 기대받는 것 역시 팬덤 노동의 한 형태라고 본다.
페미니스트 팬들에게 있어 탈덕의 의미는 팬덤 노동의 세 번째 형태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탠필은 팬들이 실제로 어떤 감정을 느끼든 팬덤 내에서는 긍정적인 응원만이 받아들여지며 비판은 대상을 싫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어덕행덕’을 당연하게 여기는 국내 팬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문화이다. 논란이 스타와 팬들을 휩쓸고 지나갔을 때 탈덕하지 않고 남은 팬들에게는 마치 논란이 없었던 것처럼 굴거나, 그 모든 논란까지 다 수용하면서 스타를 사랑하는 역할만이 주어진다. 일단 팬덤에 남았다면 사랑해야 하고, 사랑을 정해진 형태로 표현해야 하며, 오직 사랑만을 전해야 한다.
팬덤 노동은 소비자본주의를 만나며 더더욱 사랑만이 전해지는 세계가 된다. 소비자본주의적 산업구조에서 진정한 팬이라면 스타에게 돈을 써야 한다. 스트리밍하지 않고 음반과 굿즈를 사지 않는 팬은 ‘진정한’ 팬이 아니며, ‘진정한’ 팬이라면 소비를 통해 스타의 성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김수아, 2020). 김수아는 팬들의 소비주의적 수행을 팬덤과 스타가 상상적인 한 팀이 되어 신자유주의적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의 일환이라고 보며, 그 과정에서 팬덤과 스타 둘 모두의 노동 착취가 정당화된다고 지적한다. 팬덤의 사랑이 곧 소비로만 인식된다면 소비는 스타가 잘되기를 바라는 무조건적 지지를 의미하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견 표명은 불매와 함께할 때만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빻았음’을 지적하고 싶은 페미니스트 팬의 목소리는 탈덕을 통해서만 인정받는다.
탈덕은 분명 하나의 페미니스트적 실천이지만, 페미니스트 팬의 팬덤 이탈을 의미하기에 팬덤 내 비판의 목소리가 줄어들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조은수・윤아영, 2020). 원래부터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목소리도 크게 낼 수 있는 구조임을 차치하더라도, 불매운동이 유의미한 금전적 타격을 입힌다고 해도 남은 소비자들이 ‘어덕행덕’을 한다면 그 속에서 비판은 이뤄질 수 없다는 문제가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팬들이 사랑만을 전하는 무임 노동과 소비자라는 두 역할 외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팬덤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긍정과 소비를 통해서만 받아들여지는 산업 구조 속에서 다른 방식의 덕질과 비판이 가능해지려면 우선 다양한 삶이 드러나야 한다. 탈덕 선언문을 올리든 욕할 거면 나가서 하라는 트윗을 올리든, 그들의 마음은 제각기 다양할 것이다. 〈성덕〉의 한 장면처럼, 성범죄로 조사를 받은 ‘구오빠’ 때문에 속이 쓰려서 술을 마시려다가도, 믹서기 뚜껑을 닫지 않아 막걸리 쉐이크가 와르르 쏟아지면 울다가 웃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삶은 그렇게 복잡하고 비일관적이고 모순적이고 왔다 갔다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수면 위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소설가 윤이형의 『붕대 감기』(2020)에서 탈덕도 ‘어덕행덕’도 아닌 삶들을 가시화할 힌트를 얻으려 한다. 이 소설에는 서로 다른 위치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고딕체[3]에서 미끄러지는 순간들이 그려져 있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삶의 궤적 위에서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페미니즘과 불화하는 순간들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자기혐오와 미움, 상대를 걱정하면서도 판단하는 마음에 시달린다. 서로 너무도 달라 갈등하는 두 친구는 소설의 끝에서 이런 대화를 한다.
[3] 김홍미리(2017)의 “페미니즘 고딕체”에서 따 온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 고딕체란, 페미니즘에 단 하나의 정답이 있고 그것만이 옳다고 여겨졌던 1990년대의 상황을 저자가 회고하며 붙인 이름이다.
“우리가 반드시 같아질 필요는 없어. 억지로 그러려고 했다간 계속 싸우게 될 거야.”
윤이형. 『붕대 감기』. 158쪽
“같아지겠다는 게 아니고 상처받을 준비가 됐다는 거야.”
어쩌면 페미니스트 팬들에게 ‘어덕행덕’ 아니면 탈덕밖에 남지 않은 것도 더 이상의 상처를 피하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사랑했던 대상에게 이미 상처 입은 상황에서 그 상처를 깊이 후벼 파고 싶지도, 남은 팬들끼리 서로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비난당하고 싶지도 않으며, 페미니스트가 계속 범죄자를 좋아하는 모습에 또 다른 배신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를 단 한 번도 저버리지 않을, 나를 단 한 번도 상처 입히지 않을 ‘안전한’ 타인이란 없다. 우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배신하곤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무언가를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처 입고 배신당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처받을 준비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 상처를 감수하고 서로의 삶을 묻지 않으면 우리는 탈덕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에서도 완벽하게 안전한 덕질 대상이란 없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덕질에 대한, 사랑에 대한, 페미니즘에 대한 여러 모양새의 정의가 필요하다. 탈덕을 하든 안 하든 페미니스트일 수 있고 팬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탈덕과 ‘어덕행덕’ 사이에 숨겨진 셀 수 없는 삶들이 보일 것이다. 페미니즘 운동의 힘은 겉보기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한두 가지 기준으로 모든 일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긍정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데에서 나온다. 기존 세계의 규칙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삶이 뾰족뾰족 드러날 때, 우리는 모두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상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나 자신이, 그리고 우리 서로가 삶의 궤적 위에서 덕질과 페미니즘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지 묻고, 그 답이 내게 상처가 되더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좀 더 서로를 믿고 페미니스트적인 세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가부장적 사회에서 나고 자라 페미니스트가 된, 그래서 꼬여버린 우리의 삶을 이고 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김수아 (2020). “소비자–팬덤과 팬덤의 문화 정치”. 『여성문학연구』 제50호. 10–48쪽.
- 김홍미리 (2017). “‘페미니즘 고딕체’ 권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 『페미니스트 모먼트』. 서울: 그린비. 135–169쪽.
- 윤이형 (2020). 『붕대 감기』. 파주: 작가정신.
- 이정연 (2022). “페미니스트들의 ‘번아웃’ 호소를 통해 드러난 강남역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 조은수・윤아영 (2020). “BTS ARMY에서 페미니스트 팬으로: 3세대 K-Pop 아이돌 팬의 페미니즘 실천과 한계”. 『미디어, 젠더 & 문화』 제35권 3호, 5–59쪽.
- Stanfill, Mel. (2019). “Fandom and/as labor”. Exploiting Fandom: How the media industry seeks to manipulate fans. University of Iowa Press. Iowa City. 130-157쪽.
- 오세연 (2021). 〈성덕〉. [영화]. 해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