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현

1.
나는 서른을 앞두고 있는 여성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힙합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행위가 대부분 그러하듯 이런저런 추억들이 녹아들면서 어느새 힙합은 자연스레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갑갑하고 울고 싶었던 순간에 힙합을 만났다. 전학생이었던 나는, 매일 장난치고 투닥투닥 놀던 교실에서 왠지 모르게 울컥 찾아오는 소외감을 느꼈다. 때마침 친구가 선물해 준 에픽하이 4집에서 울분을 표해낼 수 있는 언어를 만났다. 랩은 재밌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음정은 올라가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의 나에게 랩은 흥미로운 도구였다. 아득바득 한 비트에 온갖 단어를 쑤셔 넣고 화를 토해내는 것도, 때로는 장난치듯 늘어지거나 활기찬 단어들을 웃으며 내뱉는 것도 좋았다. 랩을 하면서 깊은 곳으로부터 힘을 끌어와 크게 소리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대다수의 친구들은 슈퍼주니어와 동방신기, SS501의 팬이었을 때, 나는 반에 한 명씩 있는 에픽하이 팬이었다. 수련회 때는 무대에 올라가서 〈FAN〉을 부르며 무대를 총총 뛰어다녔다. 마침내 무대에 오르는 날 친구와 나 둘 다 감기에 걸려서 걸걸한 목소리로 완창을 하고는 환호를 받고 뭉클함에 휩싸여 기뻐했다. 야자 시간 자유를 꿈꾸며 11시까지 공부하다 마침내 진학한 대학에서 나는 맨 처음 힙합 동아리에 들어갔다. 한때 이 힙합 동아리 생활은 인생의 전부였다. 밤을 새우며 힙합 동아리 친구들과 연습하고, 공연을 준비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해보고, 혼나고, 뿌듯해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했다. 동아리 활동이 끝날 무렵 〈SHOW ME THE MONEY 4〉에 지원했다. 드넓은 운동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차례를 기다리다 박재범에게 심사를 받았다. 비장하게 첫 소절을 시작했지만 마지막 한 마디를 절었고, 아쉬움에 뾰로통한 채로 아침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힙합을 좋아하면서 행복했고, 수치스러웠고, 괴로웠고, 기뻤다.
힙합을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해온 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한 번 괴로움을 인지한 후에는 괴로움이 배가 되어 찾아왔다. 힙합은, 빻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힙합을 좋아하면서 들어온 ‘Bitch’가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을 때 받아들이기 괴로웠다. 힙합을 좋아한 오랜 기간 동안 거쳐온 많은 래퍼들은 항상 ‘Bitch’를 찾았다. ‘Bitch’를 증오하면서도 갈구하고, ‘사용하고 버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어릴 때는 나를 여성이 아닌 무성적인 존재로 그리거나, 혹은 나도 많은 래퍼들처럼 남성적인 존재가 되어 가사를 독해하며 ‘내가 Bitch가 안 되면 그만이지.’ 정도로 넘기려 애쓴 것 같다. ‘힙합이 비록 어떤 면에서는 구리지만, 내가 좋아하는 다른 모습이 있으니까…’라고 되뇌며 한 면을 지우고 한 면만 부각해서 보려고 했다. 하지만 점점 성인 여성이 되어가면서,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더 이상 힙합의 특정 면들을 외면하고 덮어둔 채 지나칠 수 없었다. 물론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하듯 힙합이 싫어진 적도 있었고, 싫어하려고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의 여정에서 힙합은 빠르게 지워낼 수 있는 무엇이 아니었다.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힙합이 과연 뭔지 모르겠다. 내게 힙합은 밀어내고 싶다가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애증의 집합체이다.
나는 힙합에 관련한 글을 찾아 읽으면서 답답했다. 나처럼 힙합 좋아하는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들이 없었을까? 도처에 있었을 것이다. 말하기 어려웠을 뿐이지. 이런 갈증은 나에게 너무나 일상적이었는데, 결코 일상적인 언어로 접하거나 나눌 수가 없었다. 대부분 힙합은 남성들의 것으로만 묘사되었다. 힙합을 만들고 향유하는 사람들은 항상 남성 집단으로 묘사되었고, 대부분 여성들은 힙합 씬 안에서 묘사되는 대상으로 여겨졌다. 힙합 씬에서 힙합을 좋아하는 여성 팬들은 얼빠이거나, 힙합 씬을 ‘아이돌화’시키고 물 흐리는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가끔 힙합 커뮤니티 안에서 등장하는 페미니스트/페미니즘이라는 단어는 절대 힙합과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다뤄졌다. 지금도 ‘슬릭[1]은 래퍼 아니다, 페미니스트지. 랩하지 말고 페미나 해라.’라는 말이 이어지면서 마치 페미니즘과 힙합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묘사한다. 페미니스트를 아예 힙합 씬 밖으로 밀어내려는 시도가 사방에서 보인다. 그래서 나는 힙합을 좋아하는, 계속 좋아하고 싶은 여성, 페미니스트로서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1] 슬릭은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였으며 사회적 소수자의 목소리를 담고자 노력하는 래퍼이다. 그녀는 제리케이의 소속사 데이즈얼라이브에서 2013년 〈Lightless〉로 데뷔하였으며, 정규 앨범 ≪colossus≫, ≪life minus f is a lie≫ 등을 낸 바 있다. 정규 앨범 1집에 속한 〈Rap tight〉 등의 곡으로 힙합 씬 전반에서 스킬 좋고 실력 있는 여성 래퍼라는 호명을 들으며 인정받아왔다. 그녀는 2016년 프리스타일 랩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밝혔고, “여성과 성소수자 등 약자 혐오를 반복하는 게 힙합이라면 ‘한국 힙합’ 안 하겠다”라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있다(기사 보기).
2.
2010년대 중반, 나는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힙합 영화제에 가기 위해 건대에 방문했다. 그리고 그날 본 영화 〈보이즈 앤 후드(Boyz N The Hood)〉(1991)는 매우 여성혐오적이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이 극히 드물기도 했지만, 가끔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욕지거리를 들으며 거의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들이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에는 숱한 폭력이 따라왔다. 너무나 불쾌했다. 영화가 끝나고 GV가 있었는데, 그날 나는 ‘오랫동안 힙합을 좋아해온 성인 여성으로써, 힙합이 갖는 여성혐오적인 면이 싫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까?’ 류의 질문을 던졌고, ‘힙합은 원래 그렇다’는 식의 답변을 들었다. 힙합을 비판하기는 물론이고 힙합을 좋아하는 여성으로 자신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을 겪는다. 여성인 나는 많은 경우 ‘진정한 힙합’을 받아들이지 못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힙합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너무 긴 사족이 필요했다. 힙합을 처음 좋아한 순간, 좋아했던 노래, 취미 생활로 가사를 쓴다는 것, 동아리 활동, 최근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늘어놓고 나면 ‘얼빠는 아닌가’에 대한 검증이 진행되면서 내 취향에 관한 평가가 이어졌다. ‘얼터너티브 위주로 들으시네’, ‘트랩은 안 들으시나 봐요’, ‘의외네요’, ‘안 어울려요’… 별종이라는 듯이 취급하거나 변두리 한켠에서 잠깐 기웃거리다 갈 사람으로 여겨진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방인처럼.
힙합은 유독 진정성 타령이 심하다. ‘진짜가 진짜를 알아본다(Real recognizes real)’은 힙합의 주요한 어구 중 하나다. ‘진정성’이 뭘까? 힘들었던 갱스터 생활—가난, 총질, 마약 유통, 성매매(대부분 자신이 구매자이지만 종종 가족이나 친구가 연루되기도 하는)—과 그를 딛고 부유하고 유명해진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는 게 ‘리얼 힙합’인가?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만이 ‘진짜 힙합’을 할 수 있는가? 고난과 시련의 서사를 딛고 물질적 성공을 하는 서사를 담아야 리얼 힙합인가? 일부 중산층/고학력 한국 힙합 아티스트들은 ‘리얼 힙합’의 서사를 따라 음악을 하겠다는 반항과 자신을 질책하는 아버지, 상처받은 어머니를 보며 자신에게 쏟아진 원망과 자책을 마침내 음악으로 성공해서 갚겠다/갚았다는 서사를 반복한다. 자신은 갱스터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중산층 집안에서 화목하게 태어나 생활했음에, 자신의 고난과 시련이 충분하지 않음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무력함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자신에게 취한다. 자신은 ‘Yellow’임에도 ‘Black’ 못지않음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되뇐다. ‘리얼 힙합’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사람들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장르나 아티스트의 랩이 리얼 힙합이라는 주장(지역별—동부, 서부 등, 장르별—트랩, 붐뱁 등)을 반복한다. 고로 한국에 정형화된 ‘리얼 힙합’은 없다.[2]
[2] ‘한국 힙합’에 대한 탐색은 한국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져왔다. 대표적으로는 2000년대 중반 버벌진트를 중심으로 이뤄졌던 한글 자모음의 특성을 활용한 라임과 플로우에 관한 논쟁이 회자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힙합의 ‘한국성’을 끌어내려는 특징일 뿐, 고정적인 ‘한국 힙합’에 대한 통일 의제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실제 분쟁 상황에 있는 아티스트들이 동부 랩, 서부 랩 등 지역에 따른 경쟁적 구도를 취하면서 서로가 ‘진짜’임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무엇이 ‘진짜’라고 규명할 수는 없다. 또한 종종 컨셔스 랩, 초창기 힙합만을 향유하는 ‘백팩커(backpacker)’들이 ‘진짜 힙합은 이래야 한다.’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에 대한 시선은 비판적이다. ‘진짜가 진짜를 알아본다(Real recognizes real)’은 마치 불변하는 ‘진짜’가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만 문화는 계속해서 유동적으로 변해가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한국 힙합 또한 마찬가지이다.
3.
과연 힙합은 여성들과 아직도 내외하고 있는 것일까? 힙합 씬에서 나와 같은 여성들이 다양한 얘기를 표출하는 것을 더 듣고 싶다는 희망은 성사되기까지 쉽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겪은 건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닌 것 같다. 힙합을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어느 집단에 수용되려면 여러 단계를 반복적으로 겪는다. 먼저, 힙합 말고 다른 장르는 어떠냐는 권유를 항상 듣는다(기사 보기). 처음 만나는 사람이 취미를 물어봐 힙합이라고 답하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듣곤 했다. 굳이 안 하고 안 들어도 됐을 말들을 종종 들었다. 이런 패턴에 신물이 나서 한동안 힙합 얘기는 꺼내지 않은 적도 있었다. 다른 한편, 젊은 여성으로 힙합 씬에 있다 보면 순식간에 ‘연인 관계’로 호명되거나, ‘힙합을 좋아하는 남성들을 이해하는 여성’으로 지극히 객체화되어버리는 경험을 할 수 있다(기사 보기). ‘게임 좋아하는 여자’, ‘공대생 아름이’처럼 남초 사회에서 괴로워하는 수많은 여성들과 같이 ‘힙합 좋아하는 여자’도 ‘자신들의 타자’, 잠재적 연인으로 여겨짐에 따른 지나친 환대와 기대를 받음과 동시에 그가 충족되지 않았을 경우 무시와 홀대를 마주한다.
마침내 커뮤니티에 진입한다 싶으면 ‘여성 래퍼’에게 쏟아지는 여러 응원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여성 래퍼라니 소중하다, 얼마 없는데 응원한다’ 같은 말을 몇 번 듣다 보면 알게 된다. 사실은 ‘여성 래퍼’에게 영역이 얼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여성 래퍼는 이래야 한다는 제약[3]에 따라 수행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정말 원했던 것들은 멀어져있고 마침내 비슷한 제약을 반복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뿐이다.
[3] 2015년 언프리티 랩스타 방영 당시 출연자였고 지금도 힙합 활동을 하고 있는 치타는 한 인터뷰에서 같은 래퍼로서 윤미래의 의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일단 그냥 봐도 너무 잘하시잖아요. 그런데 아주 예민한 부분이지만 ‘윤미래 선배님밖에 없었으니까’라는 점도 선배님이 대단해 보이는 하나의 이유라고 봐요. 우리나라에 힙합이라는 게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하던 때의 ‘1세대’ 같은 여자 래퍼이니까요. 사람들은 ‘세뇌’처럼 그것을 기준으로 그 이후의 여성 래퍼들의 실력을 재는데, 그것은 조금 잘못됐다고 봐요.”라고 대답하였다(기사 보기).
한국의 힙합 씬은 반복된 호명이 가졌던 영향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힙합 씬에는 ‘유일하게 인정되는 여성 래퍼 1, 2, 3위는 1위 윤미래, 2위 T, 3위 조단 엄마’라는, 꽤나 오랜 우스갯소리가 있다. 윤미래, T, 조단 엄마는 모두 윤미래를 뜻한다. 이는 단 한 명의 여성 래퍼를 인정함으로써 씬 내의 성차별을 ‘그래도 이 여성 래퍼 있잖아’라는 말로 회피할 수 있도록 했고, 많은 (잠재적인) 여성 래퍼들을 항상 윤미래와 비교하면서 1) 윤미래를 거치는 연습 과정을 원활히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나친 비판을 들으며 힙합 씬에서 멀어지게끔 하거나, 2) 윤미래를 거치며 더욱 유사해진 사람들이 결국은 ‘윤미래 같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이야기를 거치며 힙합 씬에서 멀어지게끔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윤미래’에 대한 긍정적 호명은 오랫동안 한국 힙합씬에서 여성 래퍼를 지우기 위한 언어로 사용되어 왔다.
4.
한편, 힙합을 페미니즘으로 호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더디지만, 예전에 비해서 힙합 씬 내의 여성들은 더욱 늘었고, 가시화되고 있다. 이들의 수행을 페미니즘적 맥락에서 긍정적으로 호명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 일부는 반대하고, 일부는 긍정한다. 가장 손쉬우면서 가장 우려해야 할 태도는 모든 여성 행위자의 수행을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으로 호명해내는 것이다. 힙합 씬에서 소수 집단에 속하는 여성들이 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은 분명 다양성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단지 여성들의 수적 증가와 그들의 모든 행위를 긍정하는 것에서 논의가 멈춰서는 안된다. 이것은 힙합 씬에 만연한 남성중심성과 여성혐오를 내재화하고 반복하는 여성 행위자들의 모순을 포착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남성 행위자들의 남성중심성과 여성혐오의 성찰에 대한 직무 유기를 방관하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히려 이러한 성별 기반의 해석은 힙합씬 내 다양한 행위자들의 퀴어적/페미니즘적 수행을 읽어내기 어렵게 할 수 있으며 한국 힙합 씬의 구조적 변화를 포착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Phillips et al., 2005; Oware, 2009; Weitzer, Kubrin, 2009).
힙합을 페미니즘적으로 호명하려는 시도는 여성 아티스트가 성적 자유를 외치고 섹슈얼리티를 부각하는 행동—여성이 유혹하는 섹스, 트월킹, 매력적인 자신에 대한 긍정—을 여성들의 주체적인 전복으로 독해하며 옹호했다(Richardson a. k. a. Dr. E, 2021). 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 사물화, 객체화되어 묘사되었던 곡이 지배적이었던 힙합 씬 안에서 이것은 분명 의미 있는 변화이다(글 보기). 하지만, 우리는 이 긍정이 갖는 모순을 읽어내고, 이에 주목할 수 있어야 한다. 힙합 씬 내 여성의 발화가 주로 성적 욕망을 긍정하고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향한다면, 이것은 섹스에 적극적인 여성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욕망으로부터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일부 여성 아티스트들은 그동안 ‘매력적’으로 여겨졌던 획일적인 신체상, 규범적인 행동의 틀을 깨고 그간 지배적이었던 성적 수행의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수행들이 힙합 씬의 큰 작동 방식 안에서 남성들의 환상을 재생산하는 ‘매력적 여성성의 수행’에 갇혀있지는 않은지, 우리는 그것을 ‘여성들이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옹호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힙합 씬 안팎에서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이다. 나는 오랫동안 힙합의 여러 면들을 좋아해왔지만 동시에 힙합의 편협한 시각에 지쳤다. 페미니즘의 언어는 이 편협한 시각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언어를 제시한다. 무엇이 아름답고 매력적인가? 애초에, 여성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어야 하는가? 무엇이 나쁘고, 좋은가? 무엇이 ‘나쁜 여성’이고 ‘좋은 여성’인가? 힙합 씬 바깥에서 오랫동안 이어왔던 이야기들을 우리는 왜 힙합 씬 안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었는가?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자격’은 누가 갖고 있는가? 누가, 왜 그런 기준을 설정했는가? 누가 그 기준에서 손해를 보거나 지워져 왔는가? 과연 우리는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가? 우리는 힙합의 여러 면—가사, 공연 방식, 뮤직비디오, 인터뷰, 커뮤니티와 그 작동 방식, 그 안의 문법 등—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에서 끝날 수는 없다. 행해나가야 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진정성’의 문법에 따라 힙합에서 수행된 여러 관행들이 시기에 따라 변모하며 ‘진정’하지 않은 사람들을 억압해온 과정을 읽어내고 그 고리를 무마시켜나가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다(Richardson a. k. a. Dr. E, 2021).
5.
우리는 그럼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케이트 만은 남성들의 성폭력과 성차별이 용인되고, 오히려 지지와 공감, 연민을 받을 수 있었던 현상을 일컫는 ‘남성 연민(himpathy)’라는 개념을 등장시켰다(Manne, 2020). 그동안 한국 힙합은 남성 연민의 집합체였다. 힙합 씬에서 성폭력은 그동안 남성 아티스트들에 의해 숱하게 ‘하룻밤의 실수’, ‘쟁취’, ‘유희’로 묘사되어왔다. 여성 청년들의 입장에서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 고통과 우울을 공유할 수 있는 장으로 충분히 작동하지 못해왔다.
우리는 계속해서 엇박자를 더해야 한다. 그래야 비트가 다채로워질 수 있다. 나는 인생에서 가장 우울하고 불안했던 순간에 힙합을 활용하여 소리쳐 응어리진 분노를 내뱉었다. 교내 가까웠던 사람의 성폭행 가해 사건이 있었다. 얼마 안 지나 직접 성추행을 경험했다. 나는 붕괴되는 느낌을 겪었다. 철저하게 무너졌다. 당시 나는 이 모든 일을 언어화할 힘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피했다. 방 한 켠에 혼자 고립된 채 다른 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게 방 안에 있던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가, 무기력에서 서서히 깨어나자 비로소 좌절을 느꼈다. 슬펐고 답답했고 분노했다. 다 때려 부수고 싶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뭘 할 수는 있는 건지, 달라질 수는 있는 건지 되뇌고 되뇌었다. 그러다가 누워서 힙합을 들었고 거센 비트에 내 시든 감정을 위탁했다. 한동안 누워있던 나는 앉을 힘을 얻었고 이어폰을 꼽아서 비트의 벌스를 세었다. 그리고 대충 가사를 끄적였다. 차마 일기로는 쓰기 힘들었던 거친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실의 참담함, 빡침, 무기력함, 분노, 살고 싶은 열망이 뒤섞여서 비트 위에 얹어졌다. 조용히 허공에 내뱉어야 했다면 힘들었을 말들이 거센 비트위에 조잡한 라임과 플로우의 탈을 쓰니 입 밖으로 나왔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을 때 나의 것을 내뱉을 수 있는 힘을 얻는 느낌이었다.
림 킴도 아티스트로서 정체성의 변화를 만들어내면서 나의 개인적 경험과 유사한 과정을 거친 듯한 곡을 냈다(인터뷰 보기). 〈살기(SAL-KI)〉라는 곡은 아시안이자 여성으로써 받은 온갖 차별과 낙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곡이다(곡 듣기). 가사의 내용은 여성들을 향해 남성들의 시선—규범적인 사회의 시선—에 갇혀있는 대신 적극적으로 빠져나와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나가자고 외친다. “더 이상의 침묵은 사양해. 우린 용감하게 대면해. 넌 막을 수도 감당할 수도 없을 거야. 난 이 게임을 바꿔야 해. 남성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찾지 마. 내 목소리가 들려지길, 내 세상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있어.”
정형화된 ‘리얼 힙합’은 없다. 힙합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정해진 건 없다. 힙합은 그동안 너무나 남성중심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의 언어가 부족했다. ‘진정성’의 장벽으로, 토크니즘의 장벽으로 여성들과 페미니스트들을 힙합 바깥으로 밀어내거나 제한된 구역에 가두려고 시도해왔다. 하지만 그것에 순응하고 머무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이 힙합을 바꿀 수 있다. 바꾸어야 한다. 힙합을 좋아하는 페미니스트들과 얘기를 이어가고 싶다. 힙합은 글렀으니 손 놓은 페미니스트들과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페미니즘의 언어와 힙합의 언어가 더욱 공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힙합이 우리가 하고 싶은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도구가 될 기회를 줘 보자.
참고 문헌
- Manne, K. (2020). Entitled: How Male Privilege Hurts Women. Penguin Random House LLC.
- Oware, M. (2009). “A “Man’s Woman”? Contradictory Messages in the Songs of Female Rappers, 1992-2000”. Journal of Black Studies. Vol. 39, No. 5, pp. 786-802. Sage Publications.
- Phillips, L., Reddick-Morgan, K., Stephens, D. P. (2005). “Oppositional Consciousness within an Oppositional Realm: The Case of Feminism and Womanism in Rap and Hip Hop, 1976-2004”. The Journal of African American History. Vol. 90, No.3, pp. 253-277.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on behalf of the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African American Life and History.
- Richardson, E. a. k. a. Dr. E (2021). “‘She Ugly’: Black Girls, Women in Hiphop and Activism – Hiphop Feminist Literacies Perspectives”. Community Literacy Journal. Vol. 16, Issue. 1, Critical Social Justice Possibilities in Hiphop Literacies., Article 3.
- Weitzer, R., Kubrin, C. E. (2009). “Misogyny in Rap Music: A Content Analysis of Prevalence and Meanings”. Men and Masculinities. Vol. 12, No. 1, pp. 3-29. Sage Publica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