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wd Vol.7 ‘덕질’: 욕망과 윤리 사이 닫는 글

📬최가은

영화 〈성덕〉의 씨네 21 대담(기사 보기)을 읽었을 때, 자신의 인생 궤도를 다름 아닌 덕질을 둘러싼 서사로 정리한 대담 참여자들의 자기소개를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니셜로 가려진 아이돌 그룹과 멤버들이 누구인지 단숨에 알 수 있었고, 몇 개의 이니셜만 수정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과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덕질은 내게 언제나 현재적인 행위였으나(그때 그 시절 내 ‘구오빠’가 스스로와 멤버들의 연습생 시절을 혹독하게 다그치기 위해 사용했던  “그냥 무릎 하나 깨진다 생각하고 돌려라”는 조언은 내 척박한 입시 생활은 물론이고 이후의 인생에 들이닥친 모든 크고 작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자기계발적 주문’ 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덕질’이라는 용어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곤란함에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화 이후에 폐기하거나 처분해야 했던, 혹은 온전히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해야 했던 나 자신에 대한 온갖 부끄러운 기억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번 7호 기획을 누구보다 기다린 사람은 나였던 것 같다. 필진들의 멋진 글을 읽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 이전에, 그 고민의 과정을 함께 나누어 보고 덕질과 나 자신의 저 혼란한 관계를 ‘페미니스트’라는 위치 속에서 재정립해보고 싶다는 막연하고도 갈급한 기대 때문이었다. 7호 기획 필진들과 ‘덕질’을 중심으로 함께 달려온 근 반 년 간의 시간, 그 동안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온갖 종류의 이야기들이 내 오랜 갈증의 정체를 구체화해준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 우리의 대화방은 각자가 현재 덕질 중인 다양한 콘텐츠를 영업하고 이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얹는 것이 주된 풍경이 된 지 오래다. 그곳에서 우리는 지난 덕질에 대한 향수 어린 자기고백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과거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데 동참했고, 바로 다음날 이어진 ‘오빠’들의 범죄 소식을 전달하며 차갑게 식어가는 서로의 과거를 대신 지켜봐주거나, 때론 서둘러 덮어주기도 했다.

‘덕질’ 기획 회의에서 파생되어 우리의 후속 연구 주제로 남겨진 키워드들도 많이 생겨났다. 이를테면 페미니스트-퀴어 공론장을 넘어 ‘오타쿠 판’에서의 트리거 워닝 문제, 팬덤 영토의 인클로저 현상에 대한 분석 등이 있다. 머지 않은 날에 이들 키워드를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글감과 연구 결과를 들고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이런 새삼스런 소망을 품어보게 된 것은 이번 기획 글 전반에 대해 독자들이 우리의 예상을 넘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서브컬처와 음지 문화에 한정되어 이해되고 있는 덕질에 대한 이 열렬한 반응은 사실상 덕질이 우리 사회와 문화에 이미 중요한 한 영역을 담당하고 있음을 다시금 입증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문화적 현상에 대한 관심일 뿐만 아니라, 그 문화가 만들어내는 정치적 역동성에 대한 관심이기도 할 것이다. 페미니스트 연구자로서, 앞으로도 우리는 독자들의 그러한 관심에 성실하게 주목하고, 이를 페미니즘의 언어로 면밀히 분석하기 위해 더 많은 고민을 이어나가겠다는 각자의 다짐을 공유해본다.

다가오는 4월에 7호 기획 필진들은 독자들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구자들 각자가 생각하는 이번 연구의 보완점, 앞으로의 연구 방향, 관련하여 독자분들과 포럼에서 나누고 싶은 질문의 내용을 물어봤다.

케이팝 팬덤에 유효한 질문거리를 던져준 글, <케이팝 아이돌의 다목적 남성성: 대안도 혁명도 아닌>의 저자 오온은 케이팝의 한국 팬덤 뿐만 아니라 인터내셔널 팬덤과의 직접 만남이나 참여관찰을 수행함으로써, 더 이상 한국에만 가두어질 수 없는 이 기묘한 문화에 대한 시야를 확장하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오온이 천착하고자 하는 문제의식은 케이팝 팬덤 문화에 내재한 가능성을 닫아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의 견고한 차별적 구조를 명확하게 비판하는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분석 방법론 개발에 관한 것이다. 

특히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은 주제였던 ‘자캐커뮤’에 관한 글, <오타쿠는 관계를 맺고 싶어: 자캐커뮤를 중심으로>의 리예는 향후 ‘자캐커뮤’ 내 ‘앤캐(애인 캐릭터)’에 관련한 경험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한다. 그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의미를 연구 논문으로 완성하는 것이 당도한 목표이다. 리예는 커뮤러와 인터뷰를 할 때마다 그들로부터 “대체 뭘 하려고 이곳을 연구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는데, 커뮤러들이 만들어내는 재미의 핵심을 파악하고, 그것을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덧대는 것이 연구의 궁극적 목표라고 말한다. 리예의 글에 관심을 보였던 자캐커뮤 향유자들이 다가올 포럼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비판을 건네주기를 기대해본다.

<얼룩진 덕질에 힘겨워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를 통해 덕질로 고통 받는 페미니스트를 향한 편지의 발신자가 되었던 정연은 앞으로도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의 양상에 대하여 탐구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의 고난은 ‘덕질’의 고통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다양하게 확장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연에게 당장 남겨진 후속 연구 과제는 현시대의 정치경제학적 조건들과 몸, 감정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분석이다. 덕질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돈 판’이 되었을까? 누군가가 ‘부자’인 것은 우리의 덕질에 어떻게 관계하는가? 우리의 덕질은 어째서 그들의 ‘영앤리치’적인 요소에 열광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유진은 <회빙환물의 여주인공은 페미니즘을 꿈꾸는가?!> 이후 웹툰/웹소설계의 개별 작가와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담긴 글을 써나갈 예정이다. 이번 글쓰기를 통해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나는 어째서 사랑하는가’에 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고,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재미있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한다. 독자들은 앞으로 이어질 유진의 웹툰/웹소설 비평 시리즈를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다.

<힙합을 애증하는 페미니스트 여기 있음>을 완성하면서 다현은 일부 컨셔스 래퍼나 초기 힙합을 호명하는 것을 답으로 제안하는 것은 꽤나 손쉽고도 회귀적인 결론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한국 힙합에 페미니즘적으로 필요한 접근은 섣부른 답보다는 끝없는 질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다현은 개괄적으로 건드렸던 여러 주제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저자가 곧바로 착수할 후속 연구는 한국 힙합의 ‘진정성’이라는 개념과 그 허구적 성격에 대한 탐구이다.

마지막 글인 <미소녀를 뒤집어 쓴 남성들>의 필자 우엉은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관련 기술을 배우면서 가상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워온 연구자이다. 우엉의 글은 메타버스에 대한 언론의 장밋빛 전망에 반하여, 가상세계가 몸을 벗어나 다양한 페르소나를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 글의 주제가 VR 기술을 필연적으로 경유해야 하며 여러모로 낯선 현장이었던 만큼, 필자 본인이 연구자로서 본 현장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아있다고 한다. 

우리의 글은 ‘덕질’에 관한 그럴듯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저자들이 남겨준 자기비판적 의문, 그리고 후속 과제들과 함께 꼬리를 물고 이어질 질문이 되고자 한다. 4월에 있을 포럼에서 독자 분들과 이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하며 7호 기획 필진들은 잠깐의 재정비 시간을 갖는다. 곧 공지될 포럼 계획에 대해서도 꾸준히 관심을 보여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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