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소이

들어가며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시간을 돌아볼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에는 분명히 페미니스트로서 함께 연대하고 변화를 만들어냈다는 감각이 자리한다. 2015년도에 메르스 갤러리가 만들어지고, “너 혹시 메갈이야?”라는 검열을 하던 이들에 맞서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우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2016년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포스트잇에 추모 메시지를 쓰고 붙이던 밤과, 강의실에서 혐오표현을 일삼던 교수를 공론화하기 위해 대자보를 쓰던 시간을 기억한다. ‘낙태죄’ 폐지와 ‘미투 운동’에 연대 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에 모이던 몇 번의 계절을 기억한다. 학내 페미니즘 소모임을 향한 사이버불링에 대응하고, 캠퍼스 내 성추행-성희롱 사건 대책위가 열릴 때면 망설임 없이 연서명에 동참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하루하루가 사건의 연속으로 느껴지던 시간은 페미니스트로서 성장한다는 것, 강인해진다는 것, 임파워링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다만, 이렇게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결코 매끄럽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기사 보기)라는 ‘선언’ 이후에도 하루하루 나의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과제가 동시에 부여되었다. 첫째로, 페미니스트들을 낙인찍고 모욕하는 안티-페미니스트들의 일상적인 혐오발언, 은근한 따돌림 등에 언제나 맞설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다. 둘째로, 이러한 안티-페미니스트들에게 ‘함께’ 맞설 수 있는 나의 동료들을 만나야만 했다. 물론, 그 어느 것 하나도 쉬운 일이 없었다. 언제든지 백래시에 맞서기 위해 나는 항상 초긴장 상태로 모든 외부 자극에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나의 이러한 자기방어기제와 예민함은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나 자신도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쉽게 피곤해졌고, 아주 작은 일에도 금방 화를 내곤 했다. 지난 2020년에 출간된 윤이형의 소설 『붕대 감기』(관련 서평 보기)는 이처럼 내가 경험한 페미니스트-되기의 곤경이 나 혼자만의 어려움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작품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논의에서는 『붕대 감기』 속 세계를 재방문 함으로써, 어쩌면 ‘우리’가 잊어버리고 싶었던 기억을 마주하고, 페미니즘 리부트 10년의 시간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페미니스트-되기의 과도기와 자기 갈등의 시간
『붕대감기』의 등장인물 ‘지현’은 헤어디자이너라는 직업을 통해서 고객들이 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실현하는 사람이다. 고객이 욕망하는 아름다움을 현실화하는 것은 ‘지현’ 자신의 욕망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 ‘지현’은 동시대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탈코르셋’ 운동을 ‘올바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지현’의 내면에는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과 아름다움의 기준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신념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두 세계가 선과 악의 문제로,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설정되어 팽팽하게 긴장을 이룰 때, 그녀의 내면은 자괴감으로 채워져 간다.
“매번 손님들에게 톡을 보내 영양제 서비스를 받고 계절이 바뀌었으니 최신 유행 스타일의 파마를, 염색을, 헤어 매니큐어를 하라고 권할 때마다 지현의 내면은 분열되었다. 한쪽에는 지금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이 말도 안 되게 지나친 생각이고, 자신이 하는 일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순수한 작업이며, 하나의 예술이기도 하다는 자긍심이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는 자괴감이 있었다. 미용실에 커플끼리 온 사람들을 볼 때면 자괴감 쪽이 커졌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버려서 지현은 괴로웠다. 왜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함께 온 남자친구의 허락을 받아야 긴 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37쪽).”
‘지현’이 겪은 분열과 모순의 경험은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세계를 다시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에서 맞이하게 되는 페미니스트-되기의 과도기를 보여준다. 이제까지 익숙했던 세계로부터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은 외부의 관계들(가족, 친구, 애인 등 과의 관계)을 재구성할 뿐 아니라, 자기 이해의 측면에서 ‘나’라는 개념을 다시 쓸 수밖에 없다. ‘지현’과 마찬가지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페미니스트로서의 세계로의 이행은 만만치 않았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이십 년 동안 페미니즘을 모르고 살았던 ‘나’와 2016년의 강남역 사건 이후에 각성한 ‘나’라는 두 가지 자아가 계속해서 충돌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강남역 사건 이후의 ‘나’는 어쩌면 가장 ‘올바른’ 페미니즘이 있다면 그걸 ‘잘’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기에, 나에게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취향을 갖는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걸 견딜 수 없던 순간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했던 그 ‘오빠들’이 알고 보니 범죄자라니. 그냥 경범죄도 아니고 ‘성’범죄자였다니,’ 나는 이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2016년 초여름이었다. 한 참 기말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어느 날은 사회학과 교양수업인 ‘범죄사회학’의 기말고사를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는 길이었다. 시험 보느라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고, 트위터에 접속해서 밀린 타임라인을 정독하다가 십여 년 동안 좋아했던 ‘구오빠’가 모든 일간지의 사회면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시험시간 동안 답안지에 적었던 내용에 따르면, 범죄라는 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힘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구성물이고 그렇기에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은 개개인을 비인격화해서 달성될 일이 아니라 그러한 범죄를 정당화하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에서 범죄자 한 명을 비인간화하거나 그러한 범죄자를 좋아했던 나라는 개인의 욕망을 문제 삼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사실 나는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믿을 수 없었다. 정확하게는 믿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제까지 느껴온 감정들, 좋아하는 마음들, 애착을 느낀 대상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들 이러저러한 추억들이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 안의 이해할 수 없는 마음들을, 빛나는 페미니즘의 상식들에 비추었을 때 심각히 ‘오염된’ 마음들을, 할 수만 있다면 분리수거 통에 몽땅 갖다 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억지로 밀어내버린 마음속 빈 곳을 채운 것은 또 다른 마음이었다. 다름 아닌 ‘분노’라는 감정이었다.
『붕대 감기』 속 등장인물인 ‘세연’의 상황은 이렇게 ‘올바름’을 향한 헌신이 어떻게 해서 관계들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까지 모조리 ‘태워 없애’ 버릴 수 있는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분노’의 힘은 강력하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해의 여름방학은 그 어느 때보다 나의 분노를 통해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노가 주는 생산력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때의 나 자신을 움직인 동력은 ‘불타는 싫은 마음’이었다고 회고한다. 중요한 사실은 “분노가 나를 움직이고, 나를 강하게 만드는 거의 유일한 힘이 분노였기 때문에 그 힘은 언제든지 방향을 바꾸어 나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분노는 이 사건에 있어서는 나 자신에게 과도한 죄책감과 자기 비난이라는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이소윤, 2021).”
“에너지코어를 흡수한 캡틴 마블이 분노로 불타는 불주먹을 갖게 됐다면, 세연이 흡수한 무언가는 세연의 말캉말캉한 부분, 풍부하던 감정, 미성숙한 생각들, 마음의 빈 공간들과 어떤 너그러움까지 모조리 태워 없애버린 것 같았다. 세연은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지극히 적어졌고, 타인의 글에 대한 반응도 줄어들었다. 좋아해도 될 글인지 아닌지 몹시 신중하게 따져보고 위험하지 않은 글에만 반응을 했다. 진경은 자신이 올바름과의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걸 알았다. 이제 세연에게는 진경과 나눈 시간보다 올바름이, 자신의 원칙들이 더 중요했다(61쪽).”
불타는 분노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고갈된 정신과 몸이었다. 페미니스트 연구자 이정연(2022)은 이렇게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리부트를 경험한 여성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소진 현상을 페미니스트 ‘번아웃’으로 설명한다.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은 ‘안티-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조롱과 비하 심지어 혐오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 공동체 내부를 들여다보았을 때, 우리는 페미니스트들이 서로에 대해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끊임없이 검열하고 판단하며 스스로를 소진하는 윤리적 폭력의 경험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페미니스트가 서로에게 더욱 엄격하고 냉정한 도덕률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과연 ‘올바르지 못한 욕망’과의 손절 혹은 ‘탈덕’ 뿐인 것인가(기획글 보기)라는 성찰의 시간이지 않았을까? 요컨대, 우리에게 간절했던 것은 ‘올바르지 못한 욕망’조차도 언어화해 보려는(대담 보기) 다채로운 실험이지 않았을까?
분노를 지나서 고통의 역할을 마주하기
내가 비로소 올바름과의 경쟁, 원칙과의 승부를 멈출 수 있었던 건, 나에게 두 번의 멈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분노가 정말로 내 안의 감정들을 다 태워버렸다고 느꼈을 시점에 휴학계를 제출했던 게 첫 번째 멈춤이었다. 두 번째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코로나로 인한 전세계적인 팬데믹을 계기로 주변의 관계들로부터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해야 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멈춤’은 비로소 나에게 성찰의 시간을 허락했다. 멈춰야 비로소 보인다는 어떤 스님의 깨달음이나 자기계발서적인 논리를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자발적으로든(휴학계 제출) 타의로든(사회적 거리 두기) 내가 익숙하던 삶의 시간이 잠시 중지될 때마다, 혼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감정들에 연루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관계망에 실시간으로 접속하고 있었는지 체감할 수 있었을 뿐이다. 혹자는 21세기 인류의 특징 중 한 가지를 ‘과잉 연결 시대’로 설명하던데, 어쩐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에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는지 비로소 직시할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사라 아메드의 개념에 의하면 내가 페미니스트-되기의 과도기에 겪었던 ‘화병’의 경험은 페미니스트-분노(feminist anger)의 산물(Ahmed, 2014)로 설명할 수 있다. 아메드가 보기에, 페미니스트 주체화의 자원으로서 분노라는 정동은 단순히 ‘비합리적인’ 광기나 울부짖음 혹은 복수심에 가득 찬 원한 감정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 자체가 지닌 고유한 창조성, 생산적 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메드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분노할 것인가의 문제이지, 분노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아메드는 분노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아메드는 『감정의 문화 정치』에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질문은 더 이상 “고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고 한다. 아메드가 보기에,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고통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이라고, 고통의 역량에 관한 사유라고 주장한다(Ahmed, 2014: 27). 아메드의 이 질문은 서로 다른 신체들을 접촉하게 하거나 분리하는 역량으로서 고통을 바라보자는 제안이다. 즉, 고통에 관한 ‘본질’이 세계 어딘가에 이미 주어진 채로 ‘존재한다’고 가정한 뒤 그 본질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단, 고통이 접촉하게 하거나 분리하는 새로운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들을 통해 창출되는 또 다른 정동들에 주목하길 요청한다.
물론 아메드 역시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전유하고 동일시하는 태도를 분명하게 비판한다. 타자의 고통이라는 것은, 아무리 ‘사랑’으로 노력해도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 맞다. ‘나’가 아무리 ‘너’에게 가닿으려 노력해도 ‘너’가 느끼는 대로 ‘똑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나만 아는 고통’은 철저히 혼자만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아메드는 당연히 이러한 ‘혼자만의 몫’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메드는 우리들이 각자가 혼자만의 몫을 감당하는 와중에도 그 ‘몫’은 결코 완벽히 ‘사적인 것’일 수 없으며, 언제나 이미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몫’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들에도 언제나 이미 정동적 정치경제가 만들어내는 감각들, 그 감각들의 접착을 통해 ‘너와 나’, ‘공동체’를 감싸는 피부이자 ‘표면(surface)’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아메드의 세계관에서 그러한 표면에 소속되지 않은, 말하자면 ‘피부를 지니지 않은 신체’로 세계에 존재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아메드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면, 『붕대감기』 속 인물들이 겪는 저마다의 고통은 그들의 삶을 연결 짓는 ‘표면’의 생성 조건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붕대 감기』에 등장하는 동시대 여성들은 각자가 체현한 위치성에 따라서 저마다의 고통을 생생하게 겪어낸다. 그리고 그녀들의 고통은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삶에 지대한 흔적으로 인상을 남기고, ‘나’를 짓누르고, 압박하다가 특정한 방식으로 ‘나’를 감싼다. 마치 붕대처럼. 그래서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깨닫게 되는 사실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고통을 그렇게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은 그들이 연결되어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점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아주 ‘우연히’ 조우하고 마주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상황들은 인물들에게 매우 다채로운 감각들을 일깨우고 그 감각들은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reaction하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돌봄과 지속의 시간으로
아메드의 논의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로서 우리들을 연결해 내는 ‘표면’이자 피부를 만드는 과정은 긍정적인 환희나 기쁨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분노와 슬픔, 좌절 그리고 우울과 외로움처럼 고통에 가까운 감정들 또한 우리들을 이어주는 토대이자 조건이며, 이 또한 페미니스트-되기라는 과도기 및 이행기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험난한 ‘페미니스트 애착’을 이루는 정동의 세계는 어떻게 해서 지속 가능한 연대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붕대 감기』 속 ‘세연’과 ‘진경’이 나누었던 우정에 관한 대화는 이러한 지속 가능한 페미니스트로 살아남기에 관한 한 가지 실마리를 던져준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늘 아무 일 없는 듯이 ‘괜찮은’ 척하는 것이 습관이 된 ‘세연’에게 ‘진경’은 어째서 자신이 도와주려 해도 원하지 않는지, 왜 너는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진경’의 질문을 받은 ‘세연’은 가장 솔직한 답으로 자신이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 답한다. ‘세연’의 말을 들은 ‘진경’은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의 의미에 대해 세연에게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음…. 일단 네가 아프거나, 아팠거나, 입원을 했다면 그런 사실을 나한테 알려줘야 해. 그건 친구의 알 권리야.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 같은건 하지마, 그 정도의 부담은 컨트롤할 능력이 있는게 친구니까. 너한테 축하할 일이 있을 때도 알려줘, 나는 네 일을 같이 기뻐해 주고 싶어. 가서 박수를 쳐주고 맛있는 것을 사주고, 샴페인을 터뜨리고 싶어, 네가 내 친구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데, 너는 나한테는 그럴 기회를 주지 않잖아(157-158쪽).”
힘들 때 함께 힘들어하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할 것. ‘진경’의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소위 ‘우정관’이라는 것은 너무나 명료하고, 그만큼 원론적이지만 의외로 실천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쁠 때 함께 기뻐하는 것만큼이나 힘들 때 함께 힘들어하는 방법에 대해서,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연은 자신이 ‘친구가 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진경과 함께하지 못한 시간이 더 많다고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우리는 ‘돌봄을 받는 법’을 알지 못해서 함께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여성학 연구자 오혜민(2024)에 따르면, 오히려 페미니스트 커뮤니티 내부에서 페미니스트들 개개인이 느끼는 부정적인 정동들(우울, 무기력, 불안 등)이 공유되거나 공감받지 못했던 맥락들을 짚으며, 이른바 ‘백래시’를 경험하며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페미니스트로서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돌봄의 행위자가 되는 대신 돌봄 수혜자의 위치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인식, 이것이 ‘자율적’이거나 ‘주체적’이지 않다는 자가 진단(오혜민, 2024: 173)”을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해, 페미니스트의 자기고립이라는 현상은 자신의 취약성(일상적인 소진의 경험, 백래시를 경험하며 겪은 피해 경험, 혹은 무기력이나 자원 없음의 상황 등)이 페미니즘의 지향점(독립성, 자율성, 주체성 등)과 모순된다는 자기진단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고립이라는 문제에 개입하기 위한 출발점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돌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새롭게 재정의해야만 이러한 자기고립의 역설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페미니즘 커뮤니티의 지속가능성이라는 쟁점에 있어서 “느슨한 공동체에서라도 자신의 취약성과 자기 돌봄 행위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정치성의 포기가 아닌,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당연한 전략이라는 걸 보다 가시화하며 공유할 필요가 요청되었다(오혜민, 2024: 173).”
나 역시 만일 코로나 시기에 엄마를 간병하던 시간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돌봄을 주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 의존성의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새롭게 생각해 볼 기회는 없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엄마는 내 도움이 필요했지만, 엄마의 의존성이라는 것은 절대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았으며 언제나 나와의 협상을 통해서 구성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엄마는 병원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 가만히 누워있는 게 아니라 어떤 밥을 먹고 싶은지,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은지에 관한 필요를 계속해서 만들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엄마는 엄마의 주체성을 계속해서 발명하고, 자신의 삶을 여전히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일상 또한 엄마의 새로운 생활패턴과 매일 매일의 필요에 맞추어서 새롭게 재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즉, 보호자와 환자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거나 영향을 받기만 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엄마의 간병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새로운 질문은 이러한 것이었다. 능동성/수동성이라는 구분이야말로, 페미니즘이 그토록 저항하고자 했던 가부장제의 인식론이 만들어낸 오래된 이분법이지 않은가? 오히려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것은 의존과 독립이라는 이분법 사이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필요에 반응하려는 힘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나가며
누군가는 소위 ‘2030 여성들’로 재현되는 페미니즘의 행위자들이 마치 ‘메갈리아’의 등장을 기점으로 어느 날 갑자기 발현한 집단인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이야말로 정말 다양한 ‘세대들’이 서로 토론하고, 논쟁하고, 오해하고, 하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끝까지 돌보면서 지금의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렇게 돌봄 받고 돌봄 주는 행위자들의 공동체는 페미니즘 운동의 경계를 계속 확장해 왔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난 12월 20일, 남태령역에서 농민들의 트랙터 행진이 가로막혔을 때, 페미니즘뿐 아니라 성소수자, 그리고 장애인권 등 소수자들 깃발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서 추위를 녹이고 음식을 나누고, 수도회에서는 난방 공간을 개방하고, 서로를 돌보는 노력이 모여서 결국에는 막혔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돌봄이 가지는 급진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누군가가 나에게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당신이 지난 십 년간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나를 구성하는 복잡한 삶의 현실 중 한 가지의 진실을 말해줄 뿐, 나의 전부일 수가 없었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 ‘비시민권자’로 살아가는 동안, 나는 성별에 관한 생각만큼이나 나의 인종이라는 정체성, 이주민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관한 생각을 더 자주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내가 민족(ethnicity), 국적(nationality), 그리고 인종(race)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모두 다수자에 속해 있었기에 내가 가진 특권에 대해서 깊게 성찰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출신’에 관해서 남들이 알아듣기 쉽고 ‘친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특권이라는 점을 이제야 깨닫는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얼마나 계속 나의 페미니즘을 지속하면서 나아갈 수 있을까. 망가져 가는 세상을 끝까지 돌보고자 하는 용기가 무기력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들을 구원할 것이라 믿으면서, 앞으로의 10년, 20년도 계속해서 페미니스트-되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 문헌
- 오혜민(2024). “포스트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 여성 청년 페미니스트의 부상과 인식론적 취약성”,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청구논문.
- 윤이형(2020). 『붕대 감기』. 작가정신.
- 이소윤(2021). “분노 속에서 생존하며 페미니스트-되기”, 『출렁이는 시간[들] 제4물결 페미니즘과 한국의 동시대 페미니즘』, 59-94쪽, 에디투스.
- 이정연(2022). “페미니스트들의 ‘번아웃’ 호소를 통해 드러난 강남역 이후 페미니즘 운동의 정치학”,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청구논문.
- Ahmed, S.(2014). The Cultural Politics of Emotion, Edinburgh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