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되나 적당히 좋아하는 게” : 영화 〈성덕〉 대담

<성덕>(오세연, 2022) 영화 포스터

이번 Fwd 대담에서는 오세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을 보고 감상을 함께 나누어보았습니다.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상영된 <성덕>은 올해 9월 정식 개봉해 1만 관객을 돌파했는데요. ‘스타에서 범죄자로 추락한 오빠’라는 충격적인 영화 소개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관람하고 감상을 나누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대담 기사를 준비하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유명 아이돌 출신 한 남성 연예인이 음주운전으로 단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는데요. 이는 <성덕>이 담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동시대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울분을 토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에 케이팝 산업과 팬덤, 특히 여성 팬덤에 관심을 가진 Fwd 소속 필진들과 외부 필진들 몇몇이 모여 영화 <성덕>에 대한 대담을 진행했습니다.

1. <성덕>에 대한 기대와 첫 인상

오온: 다들 영화 <성덕>을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하다.

미현: 귀여운 영화였다. 사실 기대와는 약간 달랐는데, 왜 우리는 ‘실패한 덕후’가 되었는지에 대한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무거운 색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워낙 오세연 감독의 에너지가 긍정적이어서 그런지 너무 유쾌하더라. 

유진: 영화관에서 낯선 여성들과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하나의 집단적인 경험이었다. 나와 같이 영화를 봤던 여성들이 모두 처음에는 깔깔 웃다가 어느 순간 보니 훌쩍거리며 울고 있더라. 나도 어머니의 인터뷰가 나오는 마지막 부분에서 조금 울었다.

가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부터 누가 성덕을 보러 가는 사람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웬걸 역시나 그 사람들과 같은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일동 웃음) 

정연: 삶의 원동력으로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었나 한다. 사랑은 원래 논리적이지도 당위적이지도 않은 감정이자 행위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원래 사랑을 할 때 살아있다고 느끼는 존재이지 않은가.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애인이든. 

가은: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사랑’이다보니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트위터에서 ‘<성덕>의 속편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속편은 이 영화와는 다른 톤이어야 할 것’이라는 듀나의 단평을 읽었는데(트윗 보기), 동의한다. 지금 현재 한국의 팬덤 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논해야 할 지점들이 분명히 있지 않나. 더군다나 영화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 대상인 만큼, 그가 연루된 사건과 그를 지탱하는 수많은 여성들이라는 구도에 대해서 감독이 어떠한 물음을 제기하고, 어떠한 답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남성 스타’와 ‘여성 팬’이라는 구도의 부조리함을 계속해서 호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것이 중년 남성들로 이루어진 박사모와 분명하게 대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영화는 ‘사랑’의 정체가 무엇이며 이 ‘사랑’은 왜 젠더화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더 묻지 않는다.

오온: 가은이 이야기한 아쉬움은 정준영을 여전히 옹호하면서 2차 가해를 일삼는 여성 팬들을 영화에서 비추지 않은 부분과 연결되는 것 같다. 영화의 중간 즈음에 바탕화면에 있는 폴더를 휴지통에 끌어다 놓지 않나. 나는 이들을 비추지 않기로 한 감독의 선택이 어떤 면에서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또 어떤 면에서는 윤리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탈덕’한 사람의 입장에서 묻는 ‘왜 너는 (아직도) 남아 있느냐’는 질문은 이미 답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렇게 물었을 때, 감독 자신이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 나오지 않나. (정준영의 성범죄를 최초로 보도한) 박효실 기자를 원망하는 일기를 썼다던가 하는. 스스로를 반추하면서 제한적으로나마 그 답을 찾아 나가는 것이 감독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방법이지 않았나 싶다.

2. 오빠들의 범죄와 ‘빠순이’들의 욕망 사이에서

다현: 영화에서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 여성 팬의 ‘놀랍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그를 온전히 좋아하고 팬이 될 수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오온: 나는 비슷한 경험을 가져본 적이 있다보니, 그 ‘놀랍지는 않았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러한 상황이 언젠가는 닥치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 팬들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의 부조리함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덕질이란 게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기대와 실제 사이의 간극을 조정하면서 그 대상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미 그 대상을 좋아하게 된 이상 무언가 ‘쎄한’ 걸 알면서도 그것을 덕질의 일부로, 더 나아가서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설사 ‘놀랍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괴로운 것이기도 하고.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멜랑콜리’의 상태가 되는 거다. (웃음)

유진: 그러한 괴로움을 최소화하려고 많은 여성 팬들이 ‘얘도 언제든 사고칠 수 있으니 너무 좋아하지는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걸 봤다. 그런데 그건 사실상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지 않나.

오온: 그 불가능성에 대한 깨달음이 곧 여성 팬들의 자조로 이어지는 것 같다. 버닝썬 게이트를 비롯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착취적인 구조가 명약관화해진 상황에서, 여성 팬들은 남성 스타에 대한 욕망을 부인하거나 유예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여성 팬들 사이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여긴 아직 안터졌을 뿐이다’라는 언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을 지속하는 여성들에 대한 비아냥인 동시에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자조이기도 한 것 같다. 부인한다고 해서 욕망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여성 팬들이 지금껏 남성 스타에게 투여해온 애정이 스스로에 대한 부정으로 되돌아왔기에, 여성들의 욕망이 자조로 굴절될 수밖에 없는 거다.

다현: 영화에서 한 여성 팬이 ‘원래 이런 새끼였는데 이제서야 알려진 건가? 아니면 원래 이런 새끼까지는 아니었는데 돈과 권력을 얻게 되면서 이렇게 된 건가?’라고 묻는데, 후자의 물음에 대해 더욱 탐구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여성 팬이 그 간극을 포착했던 순간, 무언가 ‘쎄했던’ 순간에 대해 집중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했더라면 구조적 차원의 사유도 더 이루어질 수 있지 않았을까.

3. 케이팝 산업의 착취적 구조와 팬덤의 친밀성 규범

가은: 영화에서 다른 한 여성 팬은 ‘우리가 너에게 돈과 권력을 줬는데, 너는 다른 여성들을 착취하고 가해자가 되었다’고 토로하면서 ‘우리도 피해자’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여성 팬들이 ‘피해자’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케이팝 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여성의 욕망을 산업 구조에 깊이 연루시키면서, 여성 팬들이 스스로를 구조적 성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위치짓는 거다. 

미현: 영화에서 어떤 여성 팬이 ‘내가 너한테 쏟아부은 돈이 얼만데’라고 이야기하는데, 약간 섬찟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구조 하에서 여성 팬들의 감정이 착취된다고 한들, ‘산업이 우리를 착취하는 만큼 우리도 너희를 착취하겠다’고 맞서는 게 옳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중산층 엄마들이 자식들에게 하는 말과 겹쳐 들렸다. 요즘 NCT를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어떤 멤버는 자기가 (팬이 아닌) 다른 여자와 접촉하지 않는다는 걸 굉장히 어필하더라. 그리고 팬들을 이 멤버를 ‘효자’라고 부르고. 이러한 문화가 아직 내겐 생소해서 왜 저렇게까지 하지? 싶었다. 

가은: 요즘의 케이팝 팬덤 문화는 상호적으로 구성된 친밀성의 규범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철저히 이행하는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걸 잘 하면 엄청 예쁨 받는다. 웹소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의 ‘박문대’가 바로 그런 캐릭터이지 않나. 팬들의 욕망을 미리 알고 그것을 정확하게 충족시켜 주는. 

오온: 암묵적 합의라고 할까, 너도 이걸 알고 나도 네가 이걸 알고 있다는 걸 알지만, 겉으로는 서로 모르는 척 찡긋거리면서 이 친밀성의 규범을 따르는 모양새다. 산업과 팬덤과 스타가 완전히 짜여진 안무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달까. 케이팝 자체가 레거시화 되었다는 증거인 것 같기도 하다. 

가은: 최근 부쩍 떠오른 ‘무해한 남성성’이라는 말도 그렇지 않나.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배우 엄기준이 연기한 ‘박재상’처럼, ‘여자가 죽으라면 죽는 남자’에 대한 여성들의 갈망과 열광이 하나의 현상이 된 것 같다. 그런데 ‘무해한 남성성’을 직조하고 이들과 관계맺는 것이 과연 해결책일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한창 여성 팬들 사이에서 ‘우리 뫄뫄는 페미니즘 책도 읽었다’는 식으로 ‘영업’하는 게 성행했던 게 떠오른다. 그렇게 ‘페미니즘 공부하는 오빠’를 찾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런데 나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게, 요즘 누군가를 좋아하려고 하면 일단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본다. 이런 짓을 하는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하고 우스우면서도 별달리 방법이 없다. (일동 웃음)

미현: 요즘 또 관심을 두는 그룹은 뉴진스다. 뉴진스를 좋아하는 팬들이 대부분 2-30대 여성이라고 하더라. 뉴진스를 비롯해 에스파, 아이브, 엔믹스 등 이른바 ‘4세대’ 걸그룹은 여성 팬들이 먹여 살린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성이 여성을 좋아하는 것, 이른바 ‘여덕’은 대안일 수 있나? 하는 물음도 생겼다.

오온: 사실 그 전에도 걸그룹을 먹여 살리는 건 여덕이었다고 생각한다. 덕질의 대상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깊은 감정적 애착을 가짐으로써 팬덤을 유지시키는 본드 역할을 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 팬들이었다. 팬덤 문화를 지탱하는 감정 구조 자체가 여성화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여덕에 대해서 논할 때 ‘같은’ ‘여성’으로서의 공감sympathy을 강조하는 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제 남자 아이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자 아이돌의 경우에도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 수백 장의 앨범을 구매하고 앨범깡을 하는 주요 행위자가 여성들이라면, 걸그룹을 향한 여성 팬들의 ‘공감’은 어디까지 작용하는지 질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덕의 욕망을 예외화하거나 단순히 이상화된 대안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케이팝 산업의 친밀성 교환 구조에 대해 비판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우리에게는 팬덤을 위한 페미니즘의 언어가 필요하다

미현: 사실 라이트한 덕질을 주로 해온 입장에서, 팬덤 내부의 여성 팬들에 대한 언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이 들기도 했다. 연구자로서 팬 산업의 시장화에 대한 비판에는 흥미를 갖고 있는데, 실제로 남성을 좋아하는 여성 팬들을 위한 페미니즘의 언어가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왜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유진: 미현의 의문에 동의한다. 요즈음 케이팝과 팬덤 문화를 젠더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먼저 여성 팬들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분석해야 하는 필요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여성 팬들이 많다고 해서 페미니즘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당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 이유를 간단히 생각해보자면, 우선 케이팝 산업이 여성들의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그들의 노동에 막대한 이익을 의존하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한편, 막상 여성들은 그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모순을 짚을 수 있을 것 같다. 여성들이 각자의 ‘사랑’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그들의 감정과 노동력을 산업에 갖다 바쳐야 하는 모순, 더 나아가 그로 인해 여성들의 ‘사랑’이 ‘가해’로 탈바꿈되는 모순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온: 앞서 말했듯 케이팝 시장을 유지시키는 것은 여성-젠더화된 욕망이다. 문제는 욕망은 너무나 여성친화적이지만 산업의 구조는 전혀 여성친화적이지 않다는 거다. 만들어진 상품의 이미지와 상품이 실제로 생산되는 구조 간에 분명한 간극이 있고, 이러한 간극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파열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탈케이팝’이나 ‘탈덕’만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덕질의 즐거움 뿐만 아니라 괴로움까지도 이 산업을 굴러가게 하는 핵심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페미니즘의 관점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처한 딜레마와 모순을 간단히 제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것을 포착하고 풀어내기 위한 인식론이자 언어이니까. 

정연: 얘기를 쭉 듣다보니, 팬들은 그냥 주어진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남성 연예인들은 계속해서 성폭력, 학교폭력,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일으켜왔지만, 몇 년 새 여성 팬들이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이러한 사안들이 왜 문제적인지를 보다 정확히 지적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다만 그와 같은 노력이 소비를 통해 연예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는 점도 문제인 것 같다. 여성 팬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놓치지 않은 채 이를 분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아직도 팬덤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무작정 비난하고 깎아내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글을 쓰는 사람과 대상이 되는 사람을 구별짓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한다.

<성덕>에서 여성 팬들은 ‘오빠’의 추락 이후 ‘이젠 누구도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결국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합니다. 케이팝 산업이 빚어낸 ‘오빠’의 이미지와 실제 간의 간극을 알면서도 몇 번이나 속아 넘어가주는 우리는 정말이지 못 말리는 덕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그저 답 없는 ‘빠순이’들의 행보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팬들의 애정과 노동을 기반으로 구성되어있는 케이팝 산업의 구조, 거기서 발생하는 온갖 모순과 착취에 대한 통찰이 부재하는 비판은 그저 표면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팬덤의 행위성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빠순이’에 대한 익숙한 비난과 팬덤의 생산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 사이에서, 산업의 구조와 문제점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번 대담을 통해 생겨난 문제의식들은 곧 돌아올 Fwd의 일곱 번째 기획으로 이어질 예정입니다. 케이팝 아이돌 산업, 팬덤 문화, 서브컬쳐와 오타쿠에 대한 Fwd 필진들의 글은 과연 어떤 질문들을 품고 있을지, 이는 또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로 뻗어나가게 될지 많이 기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리: 오온, 유진

댓글 3개

  1. 누구라곤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지만 구설수 없는 연예인 중 1명을 꽤 오랫동안 좋아했었습니다. 그러다가 탈덕했는데, 사건사고 때문이 아니라, 제가 조현병이라는 사실 때문에 탈덕했죠. 조현병이면 남을 좋아해서는 안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실제로도 그 연예인은 조현병 환자 팬에게 범죄를 당한 피해자로 언론을 탄 적도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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