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두

1. 비극의 위치를 바꾸어 놓기
어떤 책은 제목만으로도 가려운 부위가 시원해지는 느낌을 준다. 『이성애의 비극』(2020; 2026)이 내게는 그런 책이었는데, 이런 거친 감상이 그저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지난 6월 책의 저자인 제인 워드 교수가 방한하여 관련 내용으로 학술 세미나를 열었을 때 엄청난 관심 속에 빠른 속도로 신청이 마감되었을 뿐만 아니라, SNS상에서도 이 책이 얼마나 도발적인지를 강조한 호평 후기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성애가 가장 자연스러운 사랑/연애의 형태로 자리 잡은 현실 속에서, 이성애의 ‘비극’을 다루겠다고 초장부터 선언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책의 첫 문장이 “솔직히 나는 이성애자들이 진심으로 걱정된다(15쪽).”이다. 저자가 이성애의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는지, 그 걱정이 이성애에 대한 어떤 신랄한 비판과 통찰로 이어질지 기대가 됐다.
사실 비극이라는 수식어는 이성애 문화가 만연한 사회에서 비이성애, 퀴어한 관계에 더 자주 붙는다. 이를테면 여러 문화 콘텐츠 속에서 비이성애자들의 사랑은 그리 행복하지 않은 서사로 계속해서 수렴한다. 동성애 커플이 함께 살 집을 구하려 하면 법적 혼인 관계가 인정되지 않아 대출이 어렵고(럭키, 아파트[영화]), 성인 여자 둘이 사는 집에 불편한 호기심을 보이는 이웃들이 등장한다(김혜진(2020). “동네 사람”, 『너라는 생활』). 마치 이성애하지 않는 자 행복을 논할 수 없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듯 말이다. 퀴어 페미니스트 철학자 사라 아메드는 자신의 저서 『행복의 약속』(2010; 2021)에서 “퀴어의 사랑은 그 사랑이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 때만 인정받을 수 있다(172쪽)”라고 했지만, 이렇게나 비이성애가 행복과 동떨어져 있으니 인정은 요원하고 비극은 가깝다. 그럼에도 제인 워드는 과감히 그 위치를 이성애 앞으로 바꿔 두면서, 이성애 문화가 은폐하려 하는 실패와 폭력의 구조를 들추어내자고 제안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제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 작가들이 이성애가 여성을 배반하고 저버리는 오만 가지 방식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이 똑같은 작가들은 이성애의 대안을 상상하지 못하고 이성애를 필연적인 생물학적 끌림으로, 말하자면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본능으로 취급함으로써 오히려 그 실패를 승인해왔다는 것이다(56쪽).”
이때까지 이성애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기에 질문되기 어려웠다. 분명 이상하고, 불평등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가혹한 지점이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많은 이성애 관계가 여성들에게 상처와 피해를 남기는 데도 많은 여성들은 여전히 그 관계에 투자한다(66쪽).” 워드는 먼저 로런 벌랜트의 ‘잔인한 낙관주의’ 개념을 빌려 그 이유를 설명한다. 벌랜트에 따르면 사람들이 명백히 문제적인 대상(이성애)에 대한 애착을 유지하는 건, 그것이 만들어낸 환상이 이 세계 안에서 미래를 기대하며 존재할 수 있다는 감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성애가 경험하게 하는 실질적인 해악이 많거나 크더라도, 그 영향권 안에 있으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미래의 행복’이 쉽게 그려진다. 파트너와의 관계를 애써 규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편안함, 여러 사회 보장 체계에서 우선순위에 놓일 수 있다는 장점, 탄탄한 이성애 각본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안정감 등. 이 감각을 등졌을 때 다른 미래를 상상할 여지가 많지 않아서 이성애에 대한 구조적 집착은 커진다.
워드는 또한 문제적 이성애의 근간에 백인우월주의적 젠더 규범이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서 근대적 이성애는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백인 남성 사회 개혁자들에 의해 건강한 이성애 결혼으로 연결되었고, 그를 통해 남성이 여성의 감정노동, 재생산 노동을 소유하는 것이 생득적 권리처럼 여겨졌다. 건강한 이성애 결혼은 여성의 취약성, 정절, 순결 의무, 이타성과 자기희생을 전제함으로써 근대 사회에 필요한 생산자/부양자 남성-(그러한 남성을) 돌보는 여성 모델을 지원했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젠더폭력, 혼인 강간 등의 문제는 자주 비판받았지만 구조 자체가 뒤집어질 만큼 도전받지는 못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이성애의 비극적 면모들을 톺아보며 저자는 반복해서 묻는다. “이성애 여자들, 이대로 괜찮은가(43쪽)?”
2. 이성애 유혹 산업의 또 다른 도구, 페미니즘
앞선 제인 워드의 논지는 하나의 사실로 귀결된다. “남성은 여성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 책의 내용 전반에서도 느껴질 뿐만 아니라 저자 방한 기념 북토크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남성들은 실제로 이성애를 할 준비가 거의 안 되어있다.” 그렇게나 유구한 세월 이성애가 전 세계적으로 판을 쳤음에도 말이다.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워드는 이성애 유혹 산업의 한복판에 있는 픽업 아티스트 양성 프로그램을 주요 연구 현장으로 삼았다. 이성애 유혹 산업이라고 하니 말이 낯설지만, 픽업 아티스트라는 단어는 2000년대 중후반~2010년대 초반쯤 한국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거칠게 설명하자면 여자와 사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여러모로 못난 남자들에게 이성애 연애 기술을 가르쳐주는 전문가 같은 사람이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모 TV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수많은 연애 이력을 자랑하며 남성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받고 길거리 픽업(이라고 쓰고 헌팅이라고 읽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강사를 소개한 적 있다. 그는 심지어 관련 책까지 출판하여 입에 담기도 싫은 저질 농담을 글로 남기는 만행을 저질렀다(검색하면 일부 내용을 볼 수 있으니 이 글에는 싣지 않으려 한다).
미국에서는 이성애 유혹 산업, 픽업 아티스트 등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시기마다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어도 꽤 돈이 되는 시장처럼 보였다. 워드는 나이 많은 퀴어 여성 연구자로 이 시장에 진입하여 자신이 목격한 바를 기록했다.
“코치들은 소위 ‘내적 게임’이란 것도 무척 공을 들여 설명한다. 남성들은 패배주의자 같은 나약한 마음 대신에 “백번 차여도” 끄떡없을 강한 배짱을 키워야 한다고, 아무리 많은 여자들에게 연거푸 거절을 당하더라도 심리적으로 붕괴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강의 수강생들은 배운다. 여자들을 유혹할 때 필요한 최고의 내적 태도는 특정한 여자에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예쁜 여자들에게 수십 번 다가갔다가 수십 번 거절을 당해도 된다는 마음이며, 그제야 비로소 여유롭고, 풍요 지향적이며, 잃을 것이 없다는 편안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크게 실패하라’는 윤리는 기업가 정신이나 성과 중심적인 동기부여 프레임에서 직접 차용한 것이다(164쪽).”
중년/퀴어/여성이라는 워드의 정체성은 그가 현장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픽업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돈을 낸 남성들과 워드 사이에는 성애적 긴장이 발생할 일이 없었기에 자연스러운 거리두기가 가능했다. 책을 읽다 보면 현장에서 남성들의 수행에 흥미를 보임과 동시에 피곤함과 지리멸렬함을 느끼는 워드의 감정선도 따라갈 수 있다. 그가 목격한 것 중 인상 깊었던 부분은 픽업 아티스트가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기업가 정신을 이성애 관계에서 남성이 가져야 할 태도로 강조한 내용이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나아가라”라는 조언은 섬세한 배려와 상호 이해 및 존중이 중요한 연애 관계(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까?)에서 다소 혹은 꽤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나, 이성애 유혹 산업에서 이는 그저 뭇 여성들의 환심을 사는 거칠고 자기 파괴적인 남성성을 끌어올리는 검증된 방법으로 인식된다.
2017년 #미투 운동 이후 이러한 산업 기조는 리브랜딩을 시작한다. 이성애 문화와 연결된 젠더폭력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기존 이성애 유혹 산업의 기업가적 면모는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픽업 아티스트들은 여자 만나기 게임의 새로운 전략 방향성을 수립했는데, 바로 ‘페미니스트-되기’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분야는 인터넷에서 가장 여성혐오적이고 음침한 구석처럼 느껴졌던 공간이었지만 이제 ‘여자 만나기 게임’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였다고 하는 젊은 남성들이 #미투를 지지하고 상호 동의라는 문제를 넘어 여성의 성적 경험에 대해 숙고하는 태도를 보였고, 핵심을 찌르는 비유를 사용해 남녀 모두에게 좋고 인간적인 섹스를 개념화하기도 했다(196쪽).”
이제 이들의 접근은 자못 페미니즘적 실천처럼 보인다. 남자들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여자의 입장을 좀 더 생각하고, 배려하고, 전통적 남성성의 그림자를 최대한 없애고자 한다. 워드는 이 지점에서 남성들이 기대는 젠더 본질주의적 관념을 읽어낸다.
“이성애 남성들이 페미니즘 쪽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거의 언제나 애초에 문제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성별 이분법을 근거로 동원한다. 이성애 남성의 페미니즘은 ㅡ ‘진짜 남성성’에 대한 젠더 본질주의적 관념에 닻을 내리고 있을 때 ㅡ 여성의 감정 노동에도 크게 의지하는데 남자들은 이때 자신의 ‘남성적 에너지’나 ‘남성적 힘’을 비폭력적으로 사용한다는 사실 앞에서 여자들이 박수를 보내고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202쪽).”
한마디로 ‘낡고 폭력적인 남성성에 붙들려 있는 남자들과는 다른 나’를 여성들이 인정하고 알아봐 주길 바라며 페미니즘의 관점을 차용하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특정한 남성성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성별 이분법적 구분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구분이 발생시킨 젠더 불평등을 직시하고 해결하려 하지는 않으므로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되기’ 과정에서 계속해서 미끄러진다. 워드는 페미니즘이 이처럼 이성애 유혹 산업의 차별화된 도구로 등장한 현실을 마주하며 착잡한 한편, 그럼에도 그 안에서 작은 가능성이나마 발견하고자 했다.
“21세기의 많은 개인적, 관계적 위기에 신자유주의가 나섰듯이 남성들의 이성애적 불행에도 신자유주의가 개입했다. 이 다층적인 산업은 이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여성들을 유혹하는 기술을 상품화한 각종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페미니스트적인 공감을 연기하고 ‘여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가능하다고 한다. 여성을 인간적으로 보려는 시도는 비록 수단과 도구에 불과하다 해도 남자들이 성차별을 인식하고 거부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 훈련이 되어 주기도 한다(210쪽).”
그의 낙관대로 이성애 유혹 산업의 도구화된 페미니즘은, 비록 그것이 여성을 꾀어내어 하룻밤을 함께 하는 데 주요한 목적을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유의미한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여성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 말과 행동이,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처럼 이후에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관점을 체득하여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저자가 이상한 기대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작이야 어찌 됐든 결국은 다 함께 페미니즘 하게 되면 좋은 거 아닌가 싶다가도, 아무리 그래도 페미니즘을 그렇게 가져다 쓰는 게 맞나 하는 마음이 동시에 떠오른다. 워드가 이 장을 마무리하면서 쓴 몇 문장을 읽으며, 그도 나와 비슷하게 고뇌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보았다.
“나는 남자들이 여성의 인간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다. 여성과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젠더 이분법이 역사적, 정치/경제적, 문화적 산물이며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끝없는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다(210쪽).”
3. ‘지루한’ 이성애
워드가 생각하기에 이성애의 비극성을 강화하는 핵심 요인은 뜻밖에도 ‘지루함’이다. 말인즉 이성애는 재미가 없다. 책의 4장에서 저자는 엄밀한 이론적 논의를 다루기보다는, 주변 퀴어 친구들에게 이성애에 관한 각자의 생각을 묻고 듣는다. 그 안에서 가장 자주 언급된 단어가 ‘지루하다’ 였는데, 이는 단순히 본인이 이성애자가 아니므로 남 일에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이성애 실천 자체가 진심으로 따분하고 상투적으로 느껴진다는 의미였다. 워드는 “이성애의 관습들은 너무 대본 같아 보인다”라는 말로 친구들과의 대화를 간략히 요약했다. 앞선 장에서 이야기한 이성애 외의 다른 대안이 없어 보이는 구조와 이어지는 맥락인 듯했다. 이성애 규범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는 시기마다, 상황마다, 특정 장소마다 정해져 있는 이성애 각본이 있고, 그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극의 구렁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나 그 구렁이 정말 ‘비극’이기만 할까?
워드는 다시 한번 비극의 의미를 묻는다.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고, 정해진 것 없는 다양한 비규범적 실천으로 주어진 시간을 풍요롭게 영위하는 퀴어한 친구들이 도무지 불행하게만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퀴어로서 느끼는 힘, 해방감이 커서 그저 지루한 이성애 문화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보다는 이성애의 비참함과 근시안적인 세계관 앞에서 느끼는 퀴어의 힘, 퀴어의 자유, 퀴어의 풍요와 해방감 때문일 수 있다. 퀴어 입장에서 이성애 문화와 남녀 관계는 가끔 너무 안쓰럽고 서글프거나, 너무 화가 나거나, 너무 지루하거나 상처와 아픔 뿐이라서 보고 있기 힘든 탓일 수 있다(215쪽).”
이성애 문화가 아무리 가리려 해도, 요는 결국 퀴어들이 퀴어로서 살아가는 삶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퀴어한 삶에 어떠한 고통과 슬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애자로 사는 순간이 늘 비극이라 할 만큼 따분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성애 중심의 문화가 비이성애적 실천을 계속해서 시련과 비극의 영역에 남겨둔 역사가 분명히 존재하며,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반대항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이성애가 유일하게 행복한 규범으로 자리 잡은 과정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성애가 애써 감춰온 불행의 얼굴과 삶의 협소함을, 퀴어한 삶에 내포된 가능성과 눈부신 열망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무시한 채 이전과 같은 삶의 양식만을 지루해하며 따를 것인가? 새롭게 던져볼 질문이 이렇게나 많은데.
“우리는 얼마나 친밀할 수 있는가, 얼마나 창의적일 수 있는가, 얼마나 방탕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어디까지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새로운 관계의 형식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안전하게, 건강하게, 상호 합의하에 실천하기 위해 어떤 규칙이 필요한가(261쪽)?”
북토크에서 워드는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어떻게 본인이 이성애자임을 확신하나요?” 본인도 과거에는 이성애자라고만 믿었기에 남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그들이 너무 진절머리 나게 해서(!) 개별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자신 내면의 목소리를 제대로 한번 들어보기로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워드는 자신을 스스로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으로 재정체화했다. 그는 지금도 자신의 여성 파트너와 함께 재밌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삶이 너무 행복한 나머지, 그는 ‘레즈비언 산파’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여성애를 영업(?)하고 다닌다고 했다. 물론 행복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이 좋은 걸 왜 안 하지…? 한 번만 해보세요.” 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웃겼다. 마치 지루한 이성애에서 한 발짝만 내밀면 한층 흥미로운 퀴어 세계가 열릴 수 있다고 열심히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4. 대안적 이성애는 가능한가
이쯤 되면 이성애는 정말 ‘답이 없다’라고 느껴질 수 있겠다. 실제로 책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불쑥 든 적이 있다. “이성애 이거 어떡하지…?” 하는. 그렇다고 또 너무 비이성애 관계를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 가능성과 회복력을 인정하면서도) 이 복잡함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저자는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던 주지의 사실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제안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어찌 됐든 계속해서 그들과 파트너가 되고자 했다. 픽업 아티스트에게 전문적인(?) 유혹 기술을 전수하고 여성들이 듣고 싶어 할 말을 연습했다. 워드가 보기에 사랑은 아닐지언정 이 또한 선명한 욕망이므로, 이를 토대로 남성들이 여성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남성들은 좀 더 이성애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워드는 남성들에게 여성을 갈구하는 욕망의 자리에 정치를 함께 놓으라고 요청한다.
“이성애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겨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과 내 삶에서 근본적이고 중요한 어떤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성과 파트너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 나는 그들에게 욕망이 있는 자리에 정치도 함께 놓으라고, 여성과 정치를 같은 노선에 정렬시키라고 부탁한다(287쪽).”
이성애자 남성들이 갑자기 이성애 문화에서 탈주할 리 만무하니(워드도 그것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우선 애정의 대상이 될 여성의 욕망이 명확하게 무엇인지를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여성을 고양하는 것이 무엇이고 여성을 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자신의 욕망을 여성의 고통이 아니라 여성의 집단적 해방 옆에 정렬시키는 것”이다(306쪽). 또한 퀴어 욕망의 특징을 차용하여 “이성애 문화 안에서 비하된 남녀의 몸을 긍정하고 탐욕스러울 정도로 욕망”해 보는 것이 좋다(304쪽). 파트너의 몸을 통해 나의 몸을 어떻게 욕망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욕망과 동일시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고 급진적으로 얽혀 있는 동성애 섹스에서 특히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지루하고 비극적인 자리에 놓인 이성애로부터 사랑을 재발명함으로써 ‘기쁜’ 이성애가 가능하게 하는 것. 워드가 궁극적으로 바란 욕망과 정치의 합집합이었다. 단순히 이성애는 나쁘고 퀴어한 관계가 좋다는 이분법 도식이 아니라, 내게는 모든 욕망과 사랑의 형태를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을 함께 마련하자는 의미로 읽혔다. 그러려면 그 감정과 욕망의 주체는 반드시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이성애의 관점에서 여성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남성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받고 싶다면, 여성의 몸뿐만 아니라 여성의 복잡성, 고통, 성취, 구조적 취약성, 에로틱한 의지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이런 태도를 갖추지 못한(혹은 하지 않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겐 분명 어려운 일일 테다. 구조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한 환경에 놓인 이성애자 여성들이 스스로 욕망의 심연까지 들여다보는 일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워드는 그런 이성애자들을 위해 먼저 손을 내민다.
“이 책을 읽는 이성애자들에게 나의 모든 애정과 연대의 마음을 담아 말한다. 나는 당신들의 앨라이다(27쪽).”
참고 문헌
- 강유가람(2024). 럭키, 아파트 [영화]. 서울: (주)인디스토리.
- 김혜진(2020). “동네 사람”, 『너라는 생활』. 서울: 문학동네. 173-208쪽.
- Ahmed, S.(2010). The Promise of Happiness: An Essay on Melancholy Love,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성정혜·이경란 옮김(2021), 『행복의 약속』, 서울: 후마니타스.
- Ward, J.(2020). The Tragedy of Heterosexuality,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노지양 옮김(2026), 『이성애의 비극』, 서울: 라우더북스.